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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엄마가 잘 본다? 전 비육아 체질입니다

육아는 엄마만의 타고난 적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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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라는 책을 펴낸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에서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질문을 나눕니다.

출처ⓒKBS2 <고백부부> 스틸컷

나는 8개월 차 엄마다. 임신 기간 100일 남짓의 심각한 입덧기를 제외하고는 출산 이틀 전까지 일을 쉬지 않았다. 출산 이후의 삶도 노력하면 출산 전처럼 유지할 수 있을 거란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산후 70일경부터 글 쓰는 엄마들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고, 백일이 넘을 무렵 재택근무와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돌아보면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었나’ 싶다. 사회에서 배제될까 두려웠고 ‘엄마’란 무게는 버거웠다. 이 글은 초보 엄마의 육아 노동 적응기이자 ‘나’를 지키기 위한 200일간의 투쟁기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는 게 없다는 현실을 임신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입덧 좀 하다 보면 배가 불러오고 몸이 버거워진다 싶을 즈음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짠’하고 아기가 태어나는 줄 알았다.


당시 나는 육아 지식과 산후조리만 고민했을 뿐 ‘엄마’라는 새 정체성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했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모빌을 보며 방긋 웃어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엄마 껌딱지’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었다. 내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24시간 내내 아기만을 위해 살 각오였다.

엄마, 왜 나만 힘든 걸까

독박육아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육아는 노동 집약의 끝판왕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신생아는 20시간 넘게 잔다는데, 도대체 어디서 20시간을 충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양육자에게 찰싹 붙어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언제나 아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아이는 잠이 든 이후에도 내게 붙어 있었다. 잠시라도 소파나 침대에 걸터앉으면 바로 깨서 울어댔다. 덕분에 종아리가 퉁퉁 붓도록 아이를 안고 집안을 배회했다. 종일 집에 있어도 쉴 수 없었다. 


둘째, 사회적 교류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초기 육아 시기에 엄마는 기본값이다. 산후조리란 명목으로 ‘엄마에게만’ 주어지는 휴식기는 독박으로 이어진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슈퍼조차 갈 수 없었다. 집보다 집 밖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던 내게는 큰 고문이었다. 


외출보다 더 절실한 것은 ‘어른과의 대화’였다. 남편이 늦는 날이면 온종일 “우와~”, “끼야악”과 같은 감탄사나 “안녕”, “엄~마”와 같은 단순 단어만 쏟아내며 하루를 보냈다. 아이와의 대화는 고독했다. 


어제까지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 한순간에 일상의 자유를 빼앗겼다. 그런데도 변화된 환경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어려움은 ‘엄마니까’라는 말로 퉁친다. ‘엄마는 아이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엄마의 시간이 없는 건 당연하다’, ‘다들 그렇게 해왔다’, ‘엄마니까’. 그렇게 나는 내가 속해 있던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밀려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우리가 보고 자란 엄마처럼 나 또한 무난히 엄마가 되리라 믿었다. 그 과정에서 방황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수면 부족이나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약하다 생각하기도 했다. 


나 자신이 같은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 ‘나는 다르겠지’라며 허세를 부렸다. 나 또한 아이와 단둘이 고립되면서 눈물과 자책의 시간에 부딪혔다. ‘내 아이를 혼자 못 돌보겠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지금껏 배워온 모성신화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엄마 과도기의 고통’은 공론화되기도 전에 ‘나약한 우는 소리’나 ‘호르몬 영향에 의한 산후 우울증’으로 치부된다. 우리 엄마들은 다 그렇게 아이를 키워왔다며 비교한다. 누구나 다 하는 일, 심지어 신성하기까지 한 이 일을 힘들거나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학습된 금기이자 숨겨야 하는 열등감이었다.

출처ⓒ넷플릭스 <렛다운> 스틸컷

우울증이 아니라 ‘엄마기’입니다

“그 시기에 저도 많이 힘들었어요. ‘엄마기’잖아요.”

부너미 글쓰기 모임에서 산후우울증을 주제로 토론하다 ‘엄마기’라는 단어가 나왔다.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소년이 사춘기를 겪는 것처럼 엄마는 ‘엄마기’를 겪는다.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정신적·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며, 이때 불안이나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시기의 감정 변화를 대변하는 말은 내가 알기로 산후우울증뿐이었다. 출산 후 85%의 여성이 우울감을 느낀다곤 하지만, 나의 복합적인 감정에 산후우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니 납득도 치유도 되지 않았다. 상태만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만난 ‘엄마기’라는 말은 환자나 비정상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에게 큰 힘이 됐다. 


그동안 제 몸만 챙기면 됐는데, 엄마가 되면 갑자기 아이 돌봄에 내 삶을 통째로 내어주어야 한다. 이 과정을 ‘당연하다’며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건 폭력적이다. 한 인간을 책임지기 위한 새로운 정체성을 완성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왜 이렇게 힘든 걸까?”라고 질문하던 내게는 “너만 힘든 것이 아니야,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힘든 건 당연한 거야”라는 답이 간절했다. 문제는 나의 모성이 아니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말을 덧붙여야겠다. ‘엄마기’가 시작된다는 말은 엄마만 과도기를 겪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엄마뿐만 아니라 아이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돼야 한다. ‘엄마기’라는 말이 필요한 만큼 ‘아빠기’라는 말도 필요하다. 엄마 혼자 지나는 과정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비육아체질이다

출처ⓒ영화 <해피이벤트> 스틸컷

“남편이 육아체질이 아니라고 집안일만 하겠대요.”

인터넷에서 이런 고민 글을 보았다. ‘육아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당당함에 놀랐다. ‘어머, 남편분이 참 저 같네요’라고 댓글을 달 뻔했다. 나도 육아가 한없이 어렵다. 그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엄마가 처음부터 남편보다 육아를 잘해서 도맡는 것이 아닌데, 어느 순간 ‘더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맞다’라거나 ‘애가 엄마를 더 좋아한다’는 등의 이유와 함께 주 양육자는 ‘역시 엄마’라는 결론이 나버린다. 

“육아 얘기에서 나는 다 빠졌네?”

이 글을 읽고 난 남편이 입을 열었다. 남편은 내 주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육아에 적극적이다. 나 없이 남편 혼자 하루 꼬박 아이를 돌보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아빠가 혼자 육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 또한 ‘서툴다’는 이유로 남편의 육아 기회를 빼앗은 적이 있다. 남편이 육아에 숙련될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독박의 벽이 더욱 견고해질 뿐이다. 


놀랍게도 우리 아이를 가장 잘 돌보는 사람은 친정 아빠다. 엄마는 남편의 재발견이라며 놀란다. 환갑이 지나고서야 숨겨진 아빠의 육아 체질이 발현됐을 리 없다. 정년 퇴임 후에 시간이 생긴 아빠는 딸의 SOS에 적극적으로 응했고 그러면서 숙련된 것이다. 


처음에는 혼자 분유도 제대로 타지 못했고, 내가 잠시 외출이라도 하면 똥 폭탄이 터질까 전전긍긍했던 아빠다. 하지만 이제 온종일 아이와 단둘이 있어도 여유가 넘친다. 


모성의 후광이 엄마를 가호해서 육아 체질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육아는 단순노동이다. 그저 많이 하다 보면 어떻게든 잘하게 된다. 육아 체질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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