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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폐에 독립운동가가 없는 까닭

조회수 2019. 2. 12. 10: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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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는 흔한 일이다.
▲ 현행 5만 원권에 오른 신사임당은 화폐 도안인물로 유일한 여성이다.

마침 때가 됐다. 평소에는 입에 올리지 않는 ‘독립’이니 ‘운동’이니 하는 낱말이 줄줄이 소환되고 관련 논의의 밑돌을 까는 때 말이다. 2019년은 3·1운동 100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 망명지에 ‘가(假)정부’ 하나 세운 거지만 어쨌든 1910 경술년에 나라가 망한 뒤 처음으로 ‘왕정’(대한제국)에서 ‘공화정’(대한민국)을 선포한 해니 그 100돌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우리 지폐엔 독립운동가가 없다

온 나라가 이 100돌을 기념하는 행사로 분주하다. 어저께는 2·8독립선언 기념식이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열렸고 20일 뒤면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이다. 4월 11에는 임시정부 수립 100돌이 기다리고 있다.


언론매체에 소환된 기사 가운데 ‘세뱃돈엔 왜 그 흔한 독립운동가 얼굴이 없을까?’(노컷뉴스)가 눈길을 끈다. 짐작했듯 우리나라 지폐의 도안 인물에는 독립운동가가 없다는 얘기다. 노컷뉴스는 “조선 이씨 남자들 단골 모델로 쓰는 한국 지폐”라고까지 표현했다. 


1천 원권에는 퇴계 이황, 5천 원권 율곡 이이, 1만 원권 세종대왕이 나오니 ‘조선 이 씨 남자들’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나마 고액권인 5만 원권에 신사임당이 오르게 되면서 유일하게 여성이 올랐다. 


그러나 그는 율곡의 어머니다. 율곡은 100원짜리 동전에 오른 충무공 이순신(500원 지폐 도안 인물)과 마찬가지로 덕수 이씨다. 이 집안 며느리가 된 사임당까지 포함하면 ‘덕수 이씨 종친회’라는 비아냥이 있을 만큼 치우친 건 맞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조선 시대 인물이라는 점, 불행하게도 우리 화폐에는 근현대 인물이 없다. 이 민주공화국 시대에 여전히 봉건 왕조시대의 인물을 지폐에 올리고 있다. 


외국에서는 독립운동가를 지폐 도안 인물로 올리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 보라. 식민지 압제를 받다가 독립해 신생 공화국을 세울 때 독립에 이바지한 인물을 지폐에 새겨 기리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 아닌가 말이다.

▲ 미국의 1달러 지폐
▲ 스코틀랜드 20파운드 지폐

미국의 1달러 지폐의 도안 인물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다. 스코틀랜드의 20파운드(pound) 지폐엔 13세기 잉글랜드에서 독립을 쟁취한 로버트 브루스의 얼굴이 실려 있다.

독립운동가가 실린 영미, 아세안 국가의 지폐들

아시아권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필리핀은 5페소(peso) 지폐에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인 에밀리오 아가날도의 초상을 실었는데 그는 스페인 식민지배와 맞서 싸우며 독립을 선언한 이다. 인도네시아도 5천, 2천, 1천 루피아(rupiah) 지폐에 각각 네덜란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인 이드함 칼리드, 모하메드 호스니 탐린, 튜트 메우타를 새겼다. (관련 기사: 세뱃돈엔 왜 그 흔한 독립운동가 얼굴이 없을까?)

▲ 필리핀 5페소 지폐에 실린 독립운동가 에밀리오 아가날도
▲ 인도네시아 지폐에도 독립운동가인 이드함 칼리드, 모하메드 호스니 탐린, 튜트 메우타를 새겼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긴 했다. 한국은행이 2007년 5·10만 원권 지폐 발행을 추진할 때 도안 인물로 몇 분의 독립운동가가 후보에 오른 것이다. 2차로 압축된 후보는 10명은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이었다.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빼면 모두 남자다. 애당초 여성계에서 추천한 인물로는 허난설헌, 김만덕도 있었지만, 이들은 10명의 후보로는 오르지 못했다. 결국, 여성계의 반대에도 신사임당이 도안 인물이 됐다. (관련 글: 다시 난설헌을 생각한다


유관순 열사가 탈락한 것은 안타깝다. 미혼여성으로 일제에 맞서다 감옥에서 순국한 그가 지폐에 올랐다면 그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에 못지않은 상징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연대해 유관순을 지지했는데도 신사임당이 뽑힌 이유는 역으로 유관순이 탈락한 까닭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유관순 열사가 열여덟의 여성이 아니라 한 가정을 이룬 어머니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가 아닌 여성’이 ‘미완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이 땅에선 여전히 관습인 것이다. 어쨌든 신사임당이 도안 인물이 된 것은 여성계의 지적처럼 ‘가부장 시대의 현모양처 이미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 고액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거론되었던 독립운동가들(김구, 안창호, 안중근, 유관순)

10만 원권은 김구를 도안 인물로 낙점했다. 그러나 2009년 고액권이 나올 때 정작 10만 원권은 발행이 무산되면서 독립운동가가 지폐에 실릴 기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당시 이명박 정부가 도안 인물로 김구를 올리는 걸 마뜩잖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 지폐에 독립운동가가 없다는 문제 제기에 한국은행에서는 ‘독립운동가의 경우 좌우 사상이 달라서 국민 평가가 나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글쎄, 이미 법적·역사적 평가가 끝난 ‘광주민주화운동(5·18광주항쟁)’을 두고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망언을 서슴지 않고 제1야당이 ‘다양한 해석’ 운운하는 상황이라면 독립운동가에 대한 국민 평가가 수렴될 일이 있기나 할까.

독립운동과 건국을 바라보는 '슬픈 확증편향들'

한국은행은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 역사적인 고증을 완료하고 국민이 일관되게 해당 인물을 평가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소수 극우세력이 일삼는 역사 왜곡 뒤에 숨어서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꾀하는 정치적 상황이 이어진다면 그건 가망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김구가, 안창호, 안중근이, 유관순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은 한국인이라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좌우 사상이 달라서 국민 평가가 나뉜다고? 문제는 독립운동을 정치적 입장과 이해에 따라 재단하는 걸 용인하는 우리 사회에 있다. 


저들은 올해를 대한민국 100년으로 규정하는 것이 마뜩잖다. 저들의 뇌리에는 ‘국부’ 이승만이 정부 수립을 선포한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이라 강변한다. 저들에겐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일이 저들이 우러러 받드는 이른바 ‘국부’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것은 저들이 이승만과 동렬에 놓고 숭앙하는 박정희의 친일부역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우러르는 가치를 위해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확증편향’의 질곡에 저들의 대한민국은 꽁꽁 갇혀 있는 것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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