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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전범 7인 사형을 이끌어낸 1948년 도쿄재판

그런데도 이 재판이 ‘최악의 위선’이라 평가받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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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2일 작성된 글입니다.

▲ 극동국제군사재판 법정에 선 일본인 A급 전범들. 28명이 기소돼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48년 11월 12일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재판장 윌리엄 웹 경은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11월 4일부터 시작된 판결에서 재판부는 아라키 사다오 등 16명에게는 종신형, 도고 시게노리 등 2명에게는 각각 20년, 7년의 유기금고형을 선고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자에 대한 심판은 마무리됐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자 중 28명이 기소돼 판결 전 병사자 2명과 소추 면제자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동경재판, A급 전범 25명 실형 선고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설치한 법적 근거는 직접적으로는 일본이 1945년 9월 2일에 조인한 항복 문서였다. 일본은 이 문서에서 포츠담선언(1945)의 조항을 확실히 이행한다고 약속했다. 포츠담선언 제10조는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한 전쟁 범죄인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목표와 결과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실제 A급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설치된 법정이었지만, 도쿄 재판의 결과는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았다. 태평양전쟁의 최대 책임자였던 일왕 히로히토를 비롯해 적지 않은 전쟁범죄자들이 처벌을 비껴갔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참모였던 찰스 윌로비 장군의 언급은 그런 상황을 에둘러 짚은 것이었다. 

“이 재판은 역사상 최악의 위선이다.”

- 찰스 월로비(Charles A. Willoughby),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부 장군

난징대학살(1937)의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를 비롯한 주요 일본 왕족들도 처벌을 면했다. 왕족으로선 유일하게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만이 전범 지명자 명단 안에 포함됐지만, 그는 끝내 불기소로 석방됐던 것이다. 


생체 실험 부대인 731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와 관계자들 역시 미국에게 연구 자료를 넘겨주는 대가로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그 외에 만주국의 실력자 기시 노부스케와 아이카와 요시스케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 전범으로 불기소돼 처벌을 면한 1급 전범들. 도쿄재판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도쿄재판은 1946년 1월 점령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의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특별 포고와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 제정으로 준비되기 시작했다. 전범 28명이 기소된 것은 같은 해 4월이었고 5월 3일부터 재판이 시작됐다. 


법정은 도쿄 이치가야의 구 육군사관학교 2층 대강당에 설치됐다. 재판장은 윌리엄 웹(호주) 경 외 11명이, 수석 검사 조셉 베리 키넌(미국) 외 30명이 검사진으로 참여했다.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재판의 판결은 1948년 11월 4일부터 11월 12일에 이뤄졌다.

그리고 12월 23일 오전 0시부터 35분 동안 사형수 7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16명의 전범은 4명이 수감 중 병사했고 나머지는 1958년까지 대부분 석방됐다. 조선총독을 지냈던 고이소 구니아키와 미나미 지로는 각각 1950년과 1955년에 감옥에서 죽었다.

처벌을 피해 간 A급 전범들

도쿄 재판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단죄했지만, 전범 처벌과 관련된 후속 조치는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도쿄재판에서 불기소로 석방된 A급 전범 가운데 기시 노부스케가 뒷날 총리가 되고 사사가와 료이치가 전후 우익의 실세가 된 배경이다. 처벌받아야 할 전쟁 범죄자들은 전후 일본의 주류로 컴백했다. 지금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그뿐이 아니다.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된 7명과 복역 중 사망한 7명 등 전쟁을 지휘한 지도부 14명은 1978년 후쿠다 내각 때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이 올려지고 비밀리에 합사됐다. 그런 일련의 반역사적 전개에 일본의 과거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한편 도쿄의 극동국제군사재판은 A급 전범 위주로 이뤄진 반면 B·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은 연합국 피해 당사국에 의해 수행됐다. 주로 포로 학대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B·C급 전범 가운데에는 148명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전범 재판을 담당하는 ‘국제군사재판소헌장’은 ‘모국어로 재판받을 권리와 변호권을 인정’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의 변호는 일본인 변호사가 맡았고 재판은 영어로 진행됐다. 조선인들이 제대로 된 변호를 받을 수 없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훈련부대인 부산 노구치부대에서 일본군 교관들과 찍은 기념사진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은 약 2개월간 포로감시원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제네바 조약이나 포로에 대한 규정을 배운 것이 아니라 혹독한 군사교육과 정신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범죄 사실은 이러한 정상을 참작 받지 못했다.


조선인 전범들은 일본인이 본국으로 송환될 때 함께 일본으로 이송돼 스가모 구치소에 수용됐다가 1950년대에 순차적으로 가석방됐다. 그러나 이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돼 아무런 생활 지원도 받지 못해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전범으로 처벌받은 조선인 포로감시인

B·C급 전범들과 그 후손들은 경계인이나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피해자이면서도 ‘일본군의 앞잡이’와 그 후손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6년 국무총리실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한국인 B·C급 전범자에 대해 전범이 아니라 ‘강제 동원 피해자’라고 인정하면서 이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우리 정부는 B·C급 전범자에 대한 보상책을 마련해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2천만 원, 그리고 당시 생존자에게는 연간 80만 원의 의료비를 지원해줬다. B·C급 전범과 유족들은 2007년부터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얻지 못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이들에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처형된 일본 전범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고 해마다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 각료들이 거기 참배하고 있다. 조선인 전범에게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들에게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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