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만들어낸 재수학원의 신분제도

조회수 2018. 11. 21. 18: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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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학생의 '시민권'이 된다.

2013년 5월 반수를 결심했다. 친구와 함께 학원을 알아봤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듣는 ‘재수종합반’(이하 재종반) 대신 저녁에만 수업하고 낮에는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반수반’에 등록했다.


학원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는 재종반 수강생들이 모여 있는 층에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거의 모든 사람이 카페를 빠져나갔지만, 아직 음료를 받지 못한 나는 남아있었다. 별안간 카페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남성은 나에게 윽박질렀다. 

야! 종 쳤잖아! 빨리 안 들어가?

학창시절엔 밥 먹듯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스무 살의 나에게 그 고함은 새삼스럽게 불쾌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쳐다봤다.


내가 별 반응이 없자 그는 약간 당황하며 다가오더니 퉁명스러운 반말로 몇 반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반수반이요”라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그가 갑자기 모든 걸 납득했다는 듯 태도를 바꿔 깍듯한 존댓말로 대답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럼 천천히 올라가세요”하고.

한 재수학원의 광고물

노출 금지 규정이 생활지도?

그는 학원의 생활지도 선생이었다. 재수 학원의 규칙들, 예를 들면 이성 학생 간 대화 금지 규정, 일정 시간 통행금지 규정, 복장 규정 등이 잘 지켜지나 감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러니까 그에겐 쉬는 시간이 끝났는데도 교실에 들어가지 않은 학생이나 이성끼리 대화하는 학생들, 짧은 치마를 입은 학생들에게 반말로 소리를 지를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가 있었다. 오로지 재종반 학생들에게만 말이다. 



그가 유유히 카페를 나간 후 나는 한동안 그가 보여준 엄청난 존중감의 ‘갭 차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멍하게 앉아있었다. 반수생이라는 신분 하나만으로 몇 초 만에 시민권을 따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재종반과 반수반 학생들 사이에 과연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사실 차이가 없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두 집단은 동질적이다. 나이도, 목표도, 일과도 같다. 유일한 차이점은 대학에 발가락이라도 담가봤는가의 여부다.

출처: ⓒTG교육그룹
한 재수학원의 온라인 홍보물 일부

생활지도 선생의 고함에서 학창시절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재종반은 마치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대학에 다녀본 스무살 반수생과 달리 대학에 가본 적 없는 스무살 재수생은 학교 안 청소년과 유사한 강도의 통제를 받는다.


비단 재수학원이나 생활지도 선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재종반에 등록하는 대다수의 학생 역시 자신이 학원으로부터 통제받는 데에 일정 정도 동의한다. 진짜 문제는 학원뿐만 아니라 학생들 역시 억압에 동의하게 만드는 입시 시스템에 있다. 

성인식이 된 대학 입학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통제 수단이 된 지는 오래다. 대학은 체벌이나 욕설과 같은 직접적인 통제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학의 통제력은 보다 은밀하고 강력하다. 억지스러운 학원 규칙 앞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그래, 대학 가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대학의 통제력이다. 이 힘은 통제를 받는 사람들에게 내면화된다.


결국,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에 대한 통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억압받는 학생들이 반발심을 느끼거나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누군가가 입시 질서에 저항한다 해도 그를 쉽게 ‘경쟁에서 낙오되어 불만을 품은 자’로 낙인찍어 버릴 수 있다. 경쟁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매우 효과적인 사회적 통제 수단인 이유다. 


대학은 통제 수단이면서 동시에 통과 의례이기도 하다. 대입에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재수 학원에서 대학은 성인식과도 같다. 반수생은 입시생들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는 기준인 대입을 불완전하게나마 성취한 존재다. 대학생에 대한 소위 ‘고등학교식 통제’가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처럼 반수생에 대한 통제는 재수생에 대한 통제보다 조금 더 부당하게 느껴진다.

중앙일보 기사 일부

2019학년도 수능이 또 한 번 끝났다. 역대급 난이도의 ‘불수능’이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표준점수를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정시 모집의 특성상 수능이 어렵게 출제되면 표준점수 변별력이 높아져 상위권 학생들에게 유리해진다.


성적 높은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믿는 사회에서 불수능은 환영받는다. 능력주의, 성과주의는 사람들 사이에 차등을 두려 하는 보수적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아마 곧 어떤 학생들은 제 발로 생활지도를 철저히 하는 재수학원을 골라 등록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단지 대학 입학이 유예되는 것뿐 누군가의 인권이 유예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입시가 조장하고 있는 경쟁적 질서를 문제 삼아야 한다. 재수생이 자신의 1년을 유예되는 삶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 외부 필진 고함20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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