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감독을 꿈꿀 수 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생존자들

조회수 2018. 10. 26. 13: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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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영화계의 '홍일점'이 아니다.

1919년 10월 27일은 한국 영화계에서 역사적인 날이다. 첫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5년 12월 10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날은 한국의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이 <미망인>을 개봉한 날이다. 영화 문화가 태동하고도 한 세대가 지나고서야 여성 감독이 등장한 것이다.

출처: ⓒ고함20
한국영화박물관 전시실 맞은편

최근 <미쓰백>을 흥행시킨 이지원 감독은 9월 11일 제작보고회에서 “여성 영화가 많지 않은 한국 영화계에서 조금 더 영역이 넓혀졌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처럼 한국 영화업계는 여전히 ‘알탕’이란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여성 영화인은 늘어가고 있지만, 입지를 다지거나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 가운데 여성 감독들의 분투와 행보는 가히 ‘생존’으로 불릴 만하다. 한국영화박물관에서 9월 28일부터 12월 8일까지 개최되는 <여성영화감독 展: 아름다운 생존> 전시회는 그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여성 감독들의 역사를 집중 조명한다.

출처: ⓒ고함20
전시회 전경

홍일점이 아닌 ‘아름다운 생존자’

한국영화박물관의 기획전시실에 들어서면 큼직한 칸막이로 총 여섯 구역이 나뉘어 있다.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이미례, 임순례 감독들이 해당 공간의 주인공이다.

출처: ⓒ고함20
전시회 일부. 박남옥 감독의 사진이 걸려있다.

전시실을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이다. 전시의 캐치프레이즈기도 한 “나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 우리나라 여성 영화인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세계에 진출하는 것도 보고 싶다”는 그녀의 어록에서부터 박남옥의 생애사 설명과 다양한 사진과 영화 <미망인> 편집 영상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출처: ⓒ고함20
최은희 감독 전시 일부

첫 여성감독 이후 각 감독의 데뷔시기에 따라서 전시는 이어진다. 이들은 모두 특정 시기 한국 영화사에서 제각각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여성 감독들이다. 이들의 차이와 공통점에 주목하면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박남옥이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라면 최초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인 홍은원(1922-1999), 배우에서 감독까지 다재다능했던 최은희(1926-2918), 무진 기행을 영화화한 <안개>의 제작자이자 뛰어난 영상미로 주목받았던 황혜미(1936-), 여성 불모지인 상업영화계에서 성공을 거둔 이미례(1957-), <남쪽으로 튀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리틀 포레스트> 등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임순례(1960-) 감독의 공간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출처: ⓒ고함20
스크랩북과 기록물

각 구역에는 감독들의 사진과 일부 영상, 시나리오, 애장품 등 다양한 시각 자료가 생애사와 함께 제공돼 있다. 괜스레 그들의 작업실을 엿보는 것 같은 공상에 빠지게 된다. 또한 감독들의 삶과 어록을 시대순으로 정리한 연표가 전시실 전체를 감싸고 있어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기 쉽다. 시간을 맞춰간다면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1962)>, 임순례 감독의 <아름다운 생존(2001)>도 관람할 수 있다. 여성영화인 사진 전시도 동일 박물관 지하 1층에서 진행되고 있다. 

더 많은 생존을 기대하며

여성 감독을 꿈꿀 수도 없었던 시절. 당신들의 열정과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영화는 더 납작해졌을 터.

감독들의 어록에 더해 많은 관람객의 메시지가 가득 담긴 포스트잇 메모판 역시 전시를 한층 풍부하게 만든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끼적인 회고와 감사의 한마디 역시 여성 영화인들의 연대와 역사에 하나의 발자취로 남지 않을까.

출처: ⓒ고함20
관람객의 메모

1955년 12월 10일 이후로 63년이 지났다. 미투 운동과 더불어 #영화계_성폭력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여성 감독을 포함한 여성 영화인들의 현장 사정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그러나 척박한 불모지를 개척한 사람들이 있고 지금도 분투하고 있는 아름다운 생존자들이 있다. 그 아름다운 생존을 되짚어 보며 더 많은 여성 감독들을 기대하고 더 많은 지지를 보낼 것을 다짐해본다.

* 외부 필진 고함20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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