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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우상화에 1천억 쓴 구미시, 독립운동가 대우는?

왕산 허위, 110년 만에 시민 추모제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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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이 순국(1908)한 지 110년 만에 구미시민들의 추모제가 치러졌다. 왕산은 기꺼이 흠향했을까.

왕산 허위, 110년 만에 시민 추모를 흠향하다

▲ 기념관의 왕산 흉상

10월 21일은 왕산 허위(1855~1908) 선생의 순국일이었다. 1908년 경성감옥(뒤에 서대문감옥으로 개칭)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 지 꼭 110주기였다. 1세기하고도 10년을 더한 그 날, 구미시 임은동의 왕산 묘소에선 왕산 추모식이 열렸다. 그리고 그것은 110년 만의 추모제였다.


왕산은 흔히들 서대문감옥 ‘제1호 사형수’로 널리 알려진 한말 의병장이다. 그는 1896년 김산(김천)에서 창의한 을미의병이었고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의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된 1907년에 다시 경기도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가을에 전국의 의병들이 양주로 집결해 13도 의병 연합부대를 편성하니 이것이 곧 십삼도창의군이다. 이인영(1867~1909)이 총대장이 되고 진동(경기·황해) 창의대장 왕산은 군사장이 됐다. 


왕산은 정예병사 300명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후속 부대의 지원이 미치지 못해 패퇴했다. 의병을 수습해 임진강 의병연합부대를 편성, 일본군과 싸우다가 1908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관련 글: 1908년 오늘-경성감옥에서 이강년, 허위 선생 순국하다


왕산의 시신은 뒷날 대한광복단(1913) 총사령을 지낸 제자 박상진(1884~1921, 1963 독립장)이 수습해 김천시 남면 부상리에 장례를 치렀다. 왕산의 순국 후 허씨 일가는 일본 헌병과 순사의 탄압을 피해 1915년 만주로 집단 망명한 뒤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해방 뒤 왕산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에 추서된 것은 1962년이다. 그러나 그게 고작이었던 듯하다. 고향인 임은동에서도 왕산에 대한 추모가 따로 없었던 것은 일가가 전부 망명했고 남은 이들은 먼 친척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2009년 임은동 산자락에 세워진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 오른쪽 경부선 철길 건너에 박정희 생가가 있다.

▲ 기념관 왼쪽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왕산의 묘소와 사당, 유허비각이 있다.

▲ 김천시 남면 부상리에서 왕산을 묘소를 옮겨온 것도 2009년 왕산기념관을 세우면서다. 오른쪽은 사당

▲ 왕산 허위 선생의 유허비와 비각. 왕산 순국기념비는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임은동 산자락에 세워진 것은 2009년이다. 산 아래 생가터는 직계 후손이 기증한 600평에다 시에서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기념관을 열면서 김천의 묘소도 이장했다. 묘소 옆에 사당도 세워졌다. 그러나 역시 그게 다였다. 그의 순국에 대한 추모 행사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박정희는 전임시장이 ‘반신반인’으로 우상화하며 1천억 원을 넘는 예산을 투입했지만, 왕산기념관은 시의 지원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고 보면 된다. 지역에 직계 후손도 없었고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시민은 더욱 적었다.  


이상이 110년 만에 왕산의 추모제가 베풀어진 배경이다. 지역에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준비 모임이 꾸려지면서 추모제가 베풀어질 수 있었다. 장세용 구미시장이 잠깐이라도 기념관에 다녀가는 등 관심을 보였고 생각보다 많은 50여 명의 시민이 모여서 추모제는 엄숙하게 진행됐다. 


무엇보다도 이 행사에 허위 선생의 친손자인 허경성(1928~) 선생 내외가 참석해 조부의 영전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각별했다. 올해 아흔이 된 선생은 왕산의 둘째 아들인 허영의 맏이였으나 후사가 없는 백부(허학)에게 출계한 이다.

▲ 왕산의 직계 손자 허경성 선생. 아흔의 나이에도 선생은 꼿꼿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 손자의 절. 허경성 선생은 왕산의 차남 영의 아들이었으나 백부에게 출계했다.

▲ 왕산의 종친 허벽 선생의 인삿말. 그는 해방 전에 귀국하여 후손들의 국적 취득과 정착 등을 도왔다.

▲ 왕산의 종질 허형식의 전기소설 <허형식 장군>을 출간한 작가 박도 선생

중국에서 귀국해 공무원으로 어렵게 살면서 매입한 생가터를 시에 기부해 왕산기념공원을 꾸미게 한 그는 고령으로 쇠약했지만, 꼿꼿한 자세로 자리를 지켰다. 아마 그에게는 2009년 기념관을 개관할 때 일가친척이 모여서 조부를 기릴 때만큼이나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한 세기 이전에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희생을 기리는 이 행사는 일견 한갓진 의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 벽두에 떠난 왕산을 이 난만한 21세기에 새롭게 소환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제국주의 파시즘의 식민지배에 맞선 주권회복 투쟁(광복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 근대사는 여전히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올바르게 성찰하고 청산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지만, 한국은 식민지 역사 청산에 실패했다. 그것도 처절하게.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는 ‘역사 왜곡’으로 이어졌다. 식민지배를 통해 근대화가 이뤄졌다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 뒤에 숨어 일부 학자들이 역사를 능멸하고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책임자급 간부가 공식 석상에서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하는 사회다. 그걸 용인하는 사회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개인적 일탈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일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반민족행위자를 국가지도자로, 고위 행정가로, 사회 지도층 인사로 우대해 온 사회의 책임이다.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단죄 없는 역사는 모래 위 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 추모제 내내 추모객들은 시종 옷깃을 여몄고 선생께 차례로 헌화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자, 이른바 친일파 문제에 대한 보수층의 인식은 지리멸렬하다. 그들은 지나간 역사이니 용서하자, 이제 잊을 때도 되었다, 다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한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 베푸는 아량으로, 피해자의 참회와 사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죄도 참회도 한 적이 없다.


단죄의 시기를 놓쳐버린 지금, 남은 일은 역사적으로 그 진상을 조사하고 그걸 기록하는 일이다. 국가 대신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으로 그 일을 해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일제 파시즘 잔재의 청산에 앞장서는 이유다.  


친일부역자, 만주군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의 고향으로 보수의 아성으로 불리어 온 구미, 박정희 생가가 있는 상모동에서 경부선 철길을 건너면 임은동, 왕산의 동네다. 오랫동안 구미에서 왕산은 잊힌 존재였다. 일종의 지역감정으로 고착될 만큼 박정희에 숭앙은 일방적이었던 이 지역에서 그가 기억되기 시작한 것은 기념관이 들어선 2009년부터다.  


그리고 다시 9년, 마침내 구미시민들은 지방선거에서 24년간 지역 권력을 독점해 온 지역 정당 후보 대신 현 여당의 후보를 시장으로 뽑았다. 그리고 110년 만에 관의 힘을 빌지 않고 시민들이 모여 왕산 허위 선생의 추모제를 꾸려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여전히 지역에는 청산해야 할 역사적 적폐가 적지 않다. 우리 시대 역사에 대한 성찰을 시민들이 나누면서 역사적 청산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지회 창립을 앞둔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년도 3·1운동 100돌에 임은동 만세운동 재현을 기획하고 있는 것도 그 노력의 일부가 되겠다.  


지난 8월 15일 정부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인 허은(1907~1997) 여사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이가 태어난 이듬해에, 재종조부인 왕산이 순국했다. 허은 여사는 안중근, 이상룡, 이회영, 김동삼 선생 가문과 함께 5대 항일가문으로 불리는 왕산 가문에서 왕산, 허훈, 허겸, 허학, 이기영(왕산의 사위)에 이어 여섯 번째 수훈자가 되었다. (관련 글: 광복 73돌, 허은·이은숙 여사도 마침내 서훈 받다


11월에는 수자원공사에서 공사 중인 구미 제4공단 확장단지 안에 ‘왕산광장’이 준공될 것이라 한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투쟁과 그 투사들을 기리는 일이 현창 시설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구미시민들이 박정희만큼이나 친근한 위인으로 왕산을, 그 후예들의 강고한 항일투쟁을 기억하는 일이 더 소망스러운 일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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