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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의 노구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은 이범윤

조회수 2018. 10. 20. 14: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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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간도관리사'로 끝까지 싸웠다.

1940년, 13도의군 도총재 이범윤 순국하다

▲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사포대를 운영하며 동포를 보호했다.

1940년 10월 20일 마지막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李範允, 1856~1940)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그는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도와 일본군과 싸웠고 을사늑약 후 연추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였던 의병장이었다.


이범윤은 주러시아 공사를 지냈고 경술국치 후에 자결한 이범진(1852~1910)의 아우다. 1907년 고종의 밀명으로 이준·이상설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동행했고 뒷날 러시아에 귀화한 이위종(1887~?)이 형의 아들, 곧 조카다.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이범윤이 1902년에 간도시찰로 관계에 들었을 때 그는 마흔여섯이었다. 백두산의 동북쪽,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간도 지방은 압록강 건너의 서간도와 함께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장악하면서 그들 발상지로 신성시해 이 지역은 봉쇄됐고 우리 정부도 월경을 금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민생이 어려워지자 한국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해 농경을 시작했고 양국 사이에 간도 귀속문제가 불거졌다. 청나라가 임오군란 이후 간도 거주 한국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호적 정리를 시행하는 등 귀화를 강요하자 조선 정부도 서북경략사 어윤중을 파견하여 간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케 했다.

산포수 사포대 운영하며 동포 보호

의화단 사건(1900)으로 청나라 세력이 약화하자 한국 정부에서는 간도 한인들에 대한 행정․보호 기관으로 1901년 변계경무서를 설치했다. 그리고 다음 해 5월 이범윤을 간도시찰로 임명한 것이었다. 이범윤은 1903년에는 간도관리사가 돼 간도의 한인 동포들에 대한 행정과 보호 사무를 펼쳐 인망을 얻었다.


이범윤은 구한국군과 의병 출신이 포함된 산포수와 장정들로 사포대라고 하는 1천 명 규모의 충의대를 조직해 한인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다. 간도 한인 동포사회에서 높아진 그의 인망은 뒷날, 이 지역에서의 구국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자산이 됐다.

▲ 형 이범진(주 러시아 공사)과 조카 이위종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범윤은 러시아 군대와 연대해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함경도 무산․회령․종성․온성과 간도의 양수천자·화룡·6도구 부근에 충의대 연병장, 모아산·마안산·두도구 등지에는 충의대 병영을 각각 짓고 서울에서 총기와 탄약을 들여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일본군과의 전투과 러시아로의 망명

이범윤은 충의대 장병들을 거느리고 1905년 7월 러시아의 아니시모프 장군 부대와 연합해 함경북도에 침입한 일본군과 교전했다. 이 전투에서 그의 충의대는 일본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일제의 승리로 끝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사실상 국권이 상실되기에 이르렀다. 1905년 청나라의 강력한 철수 요구를 받은 정부로부터 소환 명령이 내려왔으나 이범윤은 소환에 응하지 않고 간도를 떠나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 조선 후기 민생이 어려워지자 한국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해 농경을 시작했다. 간도 동포들의 생활 모습

러시아령 연추(노키에프스크)에서 이범윤은 지역 한인 사회의 유지이자 거부인 최재형(1858~1920, 1962 독립장)의 지원으로 의병부대의 편성에 나섰다. 연해주에서는 마적의 습격에 대비해 총기의 민간인 소유를 공인하고 있었으며 원래 허가제였으나 총기·탄약의 매매도 연추에서는 사실상 자유로이 매매되고 있었다.


이범윤은 의병부대의 무기와 장비를 러시아 군인들로부터 저가로 구매하거나 한인 사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무기의 주종은 러시아제 5연발 총, 14연발 총으로 국내 의병들의 화승총보다 성능이 매우 우수했으므로 그의 부대는 높은 전투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범윤은 동의회와 창의회를 결성해 의병부대의 인적·물적 기반으로 삼았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한인 동포들의 단결도모와 환란구제를 표방하면서 1908년 5월에 결성한 항일 단체였다. 이 회는 최재형이 총장, 이범윤이 부총장, 그리고 안중근·엄인섭이 평의원을 맡고 있었다. 


창의회는 의병부대를 지원할 목적으로 1908년 7월께 조직한 항일 단체였다. 이를 기반으로 이범윤은 1908년 여름 연추에서 최재형과 연합해 3~4천 명에 달하는 청년들을 모아 의병부대를 편성했으니 이 부대가 곧 ‘이범윤 의병부대’, 혹은 ‘연추 의병부대’다.

유인석·안중근 등과 연추 의병부대 조직 운영

이범윤 의병부대는 이범윤이 총독을, 총대장은 망명 중이던 의암 유인석(1842~1915), 대장은 전제덕과 김영선, 좌영장에 엄인섭, 우영장에 안중근(1879~1910) 등으로 진용을 갖췄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주장한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신분이었다.


이범윤 의병부대는 1908년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 동안 여러 차례 국내 진공 작전을 벌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식민통치 시설과 기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특히,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만주·노령 지역의 투쟁역량을 결집하고자 유인석과 함께 13도의군을 결성했다.

▲ 이범윤과 함께 간도와 연해주에서 독립투쟁을 함께한 홍범도, 안중근, 최재형

13도의군은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부대를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함으로써 투쟁 역량을 결집하고 나아가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우수리스크 부근의 추풍에서 편성됐다. 13도의군은 도총재에 유인석을 추대하고 창의군 총재는 이범윤(뒤에 도총재), 장의군 총재 이남기로 편제됐다.


이상설은 외교 통신원으로 외교 통신과 사무, 그리고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했다. 안창호와 홍범도·이진룡·이갑 등은 동의원으로 선임돼 활동했다. 이범윤·유인석·홍범도·이진룡은 의병장 출신이지만, 계몽운동 계열인 안창호와 이갑이 13도의군에 동참한 것은 이 조직이 공동전선을 모색한 결과였다. 


그러나 13도의군의 활동 기간은 경술국치 때까지 불과 2~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미처 항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조국이 병탄되자 13도의군의 간부들은 일제의 한국 강점을 규탄하고 그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성명회를 조직했다. 성명회는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조직한 항일 결사였다. 


일본 정부에 국제공약의 배신을 맹렬히 비난하는 공한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발송할 것을 의결하는 등 독립전쟁의 방략을 논의했다. 성명회의 반일운동에 대해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이범윤·유인석·이상설·홍범도 등 주요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고 나왔다.

13도의군 도총재, 러시아 유형생활도

이에 러시아 당국은 성명회를 주도하던 13도의군의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성명회와 13도의군은 1910년 9월 해체됐고 10월에는 연추에 은신하던 이범윤 당국에 체포됐다.


일제는 이범윤의 인도를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그를 이르쿠츠크로 호송했다. 이는 “이범윤을 무슨 죄를 범한 사람으로 보지 말고 그를 이르쿠츠크 경내에 가능한 한 최고의 조건으로 안주시키는 데 조력하라”고 한 연해주 지사 스베친의 지시로 미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르쿠츠크에서 7개월간의 유형 생활 끝에 1911년 5월 이범윤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후 이종호·이상설·최재형 등과 함께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 결사로 권업회를 창립했다. 


권업회는 연해주 전역에 걸쳐 한인 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해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1919년 만주·노령의 민족 지도자들이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이범윤은 대표 39인 중 1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이범윤은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북간도에서 조직된 의군부의 총재로, 복벽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광복단의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자유시참변 이후 1922년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을 때에도 그는 총재로 추대됐는데 이는 간도관리사 이후 그가 일관되게 살아온 삶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1925년 대한독립군단과 북간도에서 재정비한 북로군정서 등 각 단체가 통합에 합의해 새로이 신민부를 창립했을 때에도 그는 자문기구로 설치된 참의원 원장으로 추대됐다. 또한, 신민부가 무관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에 설립한 성동사관학교의 고문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의 이범윤 묘. 유해가 없는 허묘다.

이후에도 이범윤은 노구를 이끌고 만주·노령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국립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노령 신한촌에서 영면’이라 새겨져 있으나 유족들에 따르면 1938년께 그는 병든 몸으로 고국으로 돌아왔고 이태 후에 노환으로 극적인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일경의 감시 때문에 주변에 알리지도 못하고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화장됐으나 경황 중에 자손들도 수습된 곳을 알지 못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고 1968년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으나 허묘가 된 까닭이다. 


한때 청나라와 귀속권을 다퉜으나 이제 간도는 남의 땅이다. 그런데도 간도가 남의 땅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 파란의 역사가 생생하고 그 땅에서 살던 동포들의 삶을 지키고자 애썼던 간도관리사 이범윤의 이바지가 있었기 때문임은 부인할 수 없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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