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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술국치 후 벌어진 애국지사들의 자결 행렬

조회수 2018. 9. 22.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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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이근주도 "의를 취하겠다"며 목숨을 끊었다.
▲ 이근주가 자신의 중형에게 밝힌 유언. 그는 부모 묘에 주과로 제사 지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10년 의병장 이근주 자정 순국하다

1910년 9월 23일 충남 홍주의진의 의병장 이근주(1860~1910)가 부모의 묘에 주과로 제사 지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술국치, 일제의 강제병합(08.29.)으로부터 25일 만이었다. 향년 50세.


그는 죽기 전 나무에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이라는 8자를 써 놓았다. 가족과 사우에게 남긴 유서는 왜경이 압수해가서 그의 형 이근상이 돌려달라고 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매장하지 말고 화장할 것을 당부하면서 ‘매장은 비린내 나는 땅으로 나를 멸하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며 자정

이근주는 충남 홍성의 사족 출신이다. 자는 문약, 호는 청광이며, 본관은 전의. 어려서 부친한테 한문을 배운 뒤에는 주로 산사에 들어가 홀로 학문을 깨치고자 했던 이다. 스물두 살 때(1881) 공주 마곡사의 부용암에서, 이듬해는 덕산사에서, 1884년에는 결성의 고산사에서 독학했다.


그는 『맹자』 가운데 「고자 상」에 있는 ‘웅어장’을 좋아했다. 웅어장은 맹자가 ‘사생취의(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함)’ 정신을 강조한 장이다. 이근주는 평소 “뜻을 세우고 몸소 행함에 마땅히 웅어편으로 기준으로 삼고 구차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맹자 가라사대, 생선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바이며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해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출처: ⓒ문화재청
▲ 홍주성의 남쪽 성벽. 제2차 홍주의진은 이 성을 점령했다가 일본군의 총공격에 무너졌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된 뒤 이근주는 통분하여 홍주(홍성) 의병에 참여했다. 홍주 의진은 김복한(1860~1924, 1963 독립장) 등 관료 유생들과 안병찬 등 지역의 유생들이 연합해 결성됐다. 의진의 지도자들은 홍주성에 들어가 영장 홍건과 관찰사 이승우에게 거병을 권했다. 이때 이근주도 장서를 작성해 관찰사에게 전달하고 의병에 합류했다.


홍주성 안에 창의소가 설치됐으며 김복한이 대장에 추대됐다. 그러나 이튿날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김복한 등 주도자 23명을 붙잡아 가뒀다. 이근주가 면천에 있는 백형의 집에 모친을 뵈러 간 사이였다.

의리는 의거에 있는바, 이 대사는 하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둘은 단발의 수치를 갚는 것입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홀로 도피할 수 없으니 자수를 하려고 합니다.
출처: ⓒ독립기념관
▲ 홍주의사총에 세워진 비석.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라고 적혀 있다. 홍성군 홍성읍 의사로
출처: ⓒ독립기념관
▲ 1906년 홍주성 전투 중에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홍주 의병의 유해를 모신 홍주의사총

이 소식을 들은 이근주는 홍주성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노모와 형이 “네가 의로서 더불어 나가 죽는 것은 마땅하나 다른 날 다시 도모함만 못 하다”라고 만류해 들어가지 못했다.


지도급 인사가 붙잡히는 바람에 제1차 홍주의진은 와해됐다. 김복한과 홍건(2009 건국포장)·안병찬(1990 애국장) 등은 서울로 압송돼 이듬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근주는 이후 1896년에 조의현 등이 청양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일이 이뤄지지 않음을 보고 돌아와서 울분을 이기지 못했다.


을사늑약 후 1906년에 결성된 제2차 홍주의진은 전 참판 민종식(1861~1917, 1962 대통령장)을 대장으로 옹립해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각지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거뒀다. 제2차 의진은 5월 31일 새벽 홍주성이 일본군의 총공격으로 점령될 때까지 활약했다.


이근주는 이 무렵, 항일 관련 사적과 심경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을미의병 이후 1895년 홍주 의병의 과정을 기록한 「을미록」을 비롯해, 「절의가」, 「화심주가」, 「신년탄사」, 「태일자문답약초」, 「사자구」 그리고 민영환과 이설에 대한 애도시 등이 그것이다.


「절의가」에서는 매국의 무리로 더럽혀짐을 한탄하고 백이와 노중연 같은 충의지사의 절의를 칭송했다. 「화심주가」는 중국으로 망명함을 거부하고 고국에 남아 있는 자신의 심정을 읊은 노래다. 「신년탄사」(1910)는 그가 50세가 된 것을 기념해 지은 것으로 ‘지천명’의 나이가 돼 나라를 위함을 알지 못하고 단지 수심만을 하고 있음을 한탄했다.


「태일자문답약초」는 그가 ‘태일자’란 가상의 벗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나라가 망한 뒤 취할 길에 대해 자문자답한 글이다. 그는 이때 자결의 뜻을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포의로서 의를 취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병마에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취한 것이다”라고 할 것이니 이것이 원통하다고 했다.

"위기의 학문인가, 위인의 학문인가. 배운 대로 행하라!"

이에 대해 태일자는 “그대의 평일에 배운 학문이 위기의 학문인가! 위인의 학문인가! 이는 어찌 평일에 바라던 바가 그대의 말과 같겠는가!”라고 하며 세인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평일에 배운 대로 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가 남긴 글로는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의 방에서 혈죽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만사가 있다. 그는 여기에서 “나라가 없는 데 공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면서 그의 죽음을 기리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의 비보를 접하고 이근주는 “나의 의는 적도와는 함께 살 수 없다”라 하고, 대궐에 나아가 적신의 죄를 성토하려 했으나, 병이 심하여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자결로 항거하고자 했다.

삼천리 강토가 원수 오랑캐의 땅이 되고 5백 년 예의의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 나라가 되었으며, 한 나라의 임금이 갑자기 이적의 신민이 되었습니다. 절조가 있는 선비로서 어찌 편안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겠습니까. 이는 개와 돼지와 같은 것이고, 또한 매국한 무리들과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삶을 훔치겠습니까.
▲ 이근주와 홍주의병을 함께한 임한주가 홍주의진의 활약상을 담은 <홍양기사>

1910년 9월에 백형 이근하의 환갑잔치가 끝난 뒤 이근주는 중형에게 자결의 뜻을 밝히고 부모님의 유택 앞에 나아갔다. 준비한 주과로 제사를 지낸 뒤 소나무에 기댄 채 목과 옆구리, 가슴 등을 찔러 마침내 목숨이 끊어졌다.

"의로움을 취해 인을 이루다"

그가 자결한 후 김복한을 비롯해 안병찬, 임승주(1990 애족장), 임한주 등이 영전에 제문을 바쳤다. 김복한(1963 독립장)은 의로움을 취했으며 인을 이루었다고 그를 기렸다. 안병찬(1990 애국장) 역시 열혈의 마음으로 자결해 우리의 ‘백미’가 됐다고 그의 죽음을 기렸다.


한편 이근주와 홍주 의병을 함께하고 홍주의진의 활약상을 담은 「홍양기사」를 지은 임한주(1990 애국장)는 「이근주전」과 「대한의사청광이공근주묘갈명」을 썼다.

굳고 굳음은 쇠와 돌 같은 마음이고,
밝고 밝음은 해와 별 같은 절개로다.
오직 그 판단이 명철한지라.
이 때문에 행실 또한 그렇게 열렬했도다.
대저 그 생명을 버리고 순국한 일은,
다만 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중화문물의 이어짐을 위해
하루아침에 놈들과 끊은 것이로다.
천년이 앞에 있고 만세는 뒤에 있으니
춘추대의를 아는 사람 있으면
아마도 이 말의 참뜻을 알리라.

- 「대한의사청광이공근주묘갈명」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여러 형태로 진행됐다. 충의를 최고 덕목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의병투쟁에 참여하거나 독립투쟁을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 그것은 일견 매우 소극적인 저항이었지만, 자신을 파괴하여 죽음에 이르는 비장하고 처절한 저항이었기에 가장 적극적인 투쟁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을사늑약(1905) 전후부터 군대해산(1907)에 이르기까지 민영환과 박승환 등 적지 않은 이들이 죽음으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했다. 경술국치(1910) 이후에도 이 자정 순국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관련 글 : 1910년 오늘, 망국의 책임을 대신하여 황현 자정하다)

자정 순국, 소극적이되 적극적 투쟁

전국에서 자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북 안동에선 이명우(1872~1920)·권성(1868~1920) 부부가 함께 자결 순국했다. 부부가 순국한 사례도 유일할뿐더러 권성 부인은 일제강점기에 자결 순국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관련 글 : 아름다운 부부, 순국의 길로 함께 갔네)

충청도에선 국치일 저녁에 목숨을 끊은 홍범식(벽초 홍명희의 부친)을 비롯해 1913년까지 모두 10명이 순국했다. 대전의 송병순(1839~1912)은 을사늑약 후 순국한 형 송병선(1836~1905)의 뒤를 따랐다. 이강년의 을미의병(1896)에 함께한 의병장 김상태(1864~1912)는 옥중에서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이근주는 충남의 내포 지역(충남 북서부) 출신으로는 유일한 순국 지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참고자료>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 달의 독립운동가 이근주,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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