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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누가 뭐래도 일본인이 되는 거야!”

소설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한 친일 소설가 이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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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에 실린 이석훈의 글(1943.11.30.)

출처ⓒ민족문제연구소

소설가 이석훈 혹은 마키 히로시

▲ 작가 이석훈(1907~?)

소설가 이석훈(1907~?)은 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도 낯선 이름이다. 소설과 희곡, 수필을 썼고 방송 쪽에서 일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인물이지만, 그는 문학사에서조차 거의 거론되지 않는 잊힌 작가다. 이는 단지 징병과 지원병을 선전, 선동했으며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화려한 친일 부역의 전력 때문일까. 


이석훈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석훈, 호는 금남이다. 필명으로 이석훈·석훈생·이훈·석훈 등을 썼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키 히로시, 또는 이시이 군. 


1925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해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다. 와세다대학 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문과에서 수학했는데 1928년 부친이 운영하던 쌀새우 가공공장이 화재로 파산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같은 해 결혼한 뒤 강원도 김화에서 잠시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다 1929년 강원도 춘천에서 3년간 경성일보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특파원 생활을 했다. 

소설가, 희곡작가, 아나운서 등 다채로운 활동

이석훈은 1929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아버지를 찾아서」를 연재(10.31.~11.7.)하며 등단했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궐녀는 왜 자살했는가」로 당선(193.3.4.)했다. 


이후 그는 개벽사에서 발간하는 잡지 『제일선』에서 근무했고 1933년 4월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했다. 같은 해 초여름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과(조선어방송) 아나운서로 방송 생활을 시작했고 1936년에는 1936년 평양방송국 방송주임을 맡았다. 

▲ 1933년 초여름 이석훈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과(조선어방송) 아나운서로 방송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소설집 『황혼의 노래』(한성도서)를 발간했다. 당시 성행하던 브나로드 운동*을 다룬 사회계몽적이고 인도주의적 중편인 표제작과 1930연대 지식인의 좌절과 정신적 고뇌를 형상화한 단편 「광인기」 등이 실렸다. 


*브나로드 운동: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가 주축이 돼 일으킨 농촌계몽운동


1938년 함흥방송국 방송과장을 맡아 근무하다 1939년에 조선일보사 출판부로 전직해 1940년까지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조광』과 『여성』 등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이석훈이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40년 12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원으로 조직된 시국 강연부대에 참가하면서부터다. 그는 함경도 원산·함흥·성진·청진·진남, 강원도 춘천 등지에서 강연을 통해 일반 민중에게 ‘반도의 신체제인 국민총력운동’에 발맞출 것을 선전했다.


이 강연부대의 활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 단편 「고요한 폭풍」(『국민문학』 1941년 11월호)이다. 주인공은 문인협회 강연대원으로 지명된 소설가 박태민. 그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작가적 자세 확립에 대한 고민, “소승적 민족적 입장”과 “대승적 지성과 예지”의 갈등을 지양하고 싶어서 함경선 방면을 지원한다. 

「고요한 폭풍」으로 친일 노선 정당성 주장

일제에 대한 협력을 ‘민족’과 ‘지성’, ‘소승’과 ‘대승’의 대립으로 눙친다. 대단한 수사다. 문인들 특유의, 상황에 자기 논리를 끼워 맞추는 합리화 능력을 유감없이 선보인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주위의 오해와 경멸에도 불구하고 일제와 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택한 끝에 결국 주위 사람들도 설득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결국 「고요한 폭풍」은 시국에 각성하는 문인과 및 세칭 친일파들의 노선이 옳았고 그들을 백안시하던 이들이 자기 입장을 철회한다는 것을 넌지시 그러나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작품이었다. 어쨌든 주인공 박은 지식인이기를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인물의 전형, 작가 자신의 초상인지도 모른다. 

▲ 후방 총력체제를 선전 홍보하는 엽서.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총후봉공’을 강요했다.

「고요한 폭풍」은 1943년 6월 매일신보사가 발행한 일문 단편집 『고요한 폭풍』에 표제작으로 실렸다. 여기 실린 작품 가운데 「동으로의 여행」(『녹기』 1942년 5월호 발표)도 문인들의 시국 행사에서 취재한 작품인데 내선일체를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성지순배’차 일본에 온 주인공 박철은 “한 점의 어둠이 없는 밝은 처녀의 피부와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국토는, 유구 3천 년이라고 하는, 한 번도 외침을 받지 않는 숭고한 역사의 상징”이라면서 일본의 아름다운 풍물을 찬양한다. 그리고 기꺼이 일본인이 되겠다고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일본인이 되는 거야!”

아! 나는 일본을 좋아한다. 나는 일본인이 되자. 이 아름다운 국토, 아름다운 사람, 풍요로운 생활, 누가 뭐라고 해도 일본인이 되는 것이야!

낯간지러운 황민화와 내선일체에 대한 노골적 선전 덕분이었던가. 『고요한 폭풍』은 김용제(가네무라 류)의 『아세아시집』과 함께 국어문예 총독상 후보작으로 추천됐다가 실격해 대신 국어문예 연맹상을 받았다. 


이석훈은 1941년 2월 ‘부여신궁어조영 근로봉사’에 참가한 뒤 『신시대』 1941년 3월호에 근로봉사 소감문 「부여기행」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역사를 끌어들여 “백제는 망하였으되 말하자면 양 민족 일체의 아름다운 정신만은 부여의 산하에 영원히 얽히어 있었던 것이니, 금일에 와 부여신궁을 이곳에 창설케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것”이라면서 내선일체를 합리화했다.


『문장』(1941년 4월호)에 발표한 1막짜리 희곡 「사비루의 달밤」에서도 그는 주인공인 시인의 발언을 통해 내선일체를 1천 수백 년의 역사에 걸친 숙명적 필연성으로 포장했다. 

당시 일본군이 먼 수로(水路)로 백제를 도와주었으나 이미 자체가 워낙 국방을 게을리했으니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1천 수백 년 뒤의 오늘날까지 지금 이 부소산에 부여신궁을 건설하기 위한 큰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걸 보면, 그 양자 간의 숙명이란 것에 어떤 필연성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석훈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호국신사어조영지 근로봉사’에 참여했고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가 통합해 전시체제기 최대 규모의 전쟁협력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될 때 경성지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1월에는 조선문인협회 상무 간사로 사무 일체를 맡았고 녹기연맹의 일본어 기관지 겸 사상교양지 월간『녹기』 편집부 촉탁(임시직)이 됐다. 녹기연맹은 조선인의 자발적인 전쟁동원과 황민화를 목표로 한 전시체제기 대표적인 민간 내선일체 단체였다. 이 단체가 펼친 사상운동의 핵심은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을 꿈꾼 현영섭의 ‘조선어 전폐론’으로 대표되는 급진적인 내선일체 이념으로 조선인의 민족적 성격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다. 

▲ 급진전 내선일체 이념을 표방한 친일단체 녹기연맹의 기관지 <녹기>

같은 달 그는 조선문인협회 사업으로 ‘황군의 무운장구 기원과 함께 총후에서의 정신운동의 수련’ 달성을 위해 일본에 성지순배사로 파견돼 신사·신궁과 천황들의 무덤을 순배했다. 순배 후 발표한 기행문에서 그는 일본은 ‘신국(신의 나라)’이라 칭하며 조선인들도 ‘황국신민’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신국’, 조선인도 ‘황국신민’ 돼야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은 신국(神國)이란 것이다. (…) 내지 사람들이 신도를 유대로 하여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끼리는 서로 굳게 얽히어 국체의 기초는 반석같이 견고하며, 죽기를 신과 같이하기를 염원함은 우리들로선 상상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라 하겠다. (…) 앞으로 우리는 먼저 일본정신을 파악하고 체득하기에 각자가 힘써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또 실천이 있을 것을 염원하는 것이다.

- 「성지순배록」(『국민문학』 1942년 3월호) 

이석훈은 1943년 7월 『국민문학』에 이른바 ‘네거리 소설’ 형식의 「돼지몰이 놀이」(돈추유희)를 발표했다. 국민의 전쟁 의지를 높이기 위해 짧은 글을 거리에 게시한 것에서 유래한 네거리 소설은 전시체제 선전·선동을 위해 극도로 짧게 만든 콩트 형식의 글이었다. 

이것은 운산(雲山)에 있었던 실화이다. 영미인 광산사(鑛山師)들이, 단오 명절날, 소위, 조선인 노동자의 위로회라는 것을 열었다. 그런데 그 위로회라는 것아 매우 색다른 취향이어서 미끌미끌해서 붙들기 힘들게끔, 콜타르를 시커멓게 칠한 몇 마리의 양돼지를 풀어놓고, 그놈을 노동자들에게 쫓게 했던 것이다. 즉, 돼지를 붙든 만큼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가 있다는 꾸임새였다. 얼간망둥이 같은 동포들은, 조금이라도 더, 침이 흐르는 마음을 만족시켜 보자는 천박한 생각에서, 열심으로 돼지몰이 내기를 하는 것이었다. 양키들은, 높은 자리에 점잖게 걸터앉아서, 이 능욕적인 경기에 신바람 나게 박수를 보내면서,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얼간망둥이 같은 가련한 동포들은, 비지땀을 홀리며 얼굴이건 옷이건, 껌정 일색으로 더러워져 가지고, 그래도 정신없이 돼지를 쫓아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슬픈 일이었다. 누구 한 사람, 인간 취급을 받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분개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 「돼지몰이 놀이)」 전문*

이 글의 목적은 조선인에 대한 열등의식을 드러내면서 반미를 선전하고 영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그는 ‘대동아전쟁’을 ‘성전’이라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가보인 놋촛대까지 헌납하는 이야기를 통해 총후봉공을 선동했다. 

대동아전쟁은 10억의 전 아시아인을 백인의 기반(羈絆: 굴레)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성전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 조선의 지식인은 소승(小乘)을 버리고 대동아의 맹주로서의 자각과 황민으로서의 자부를 가지고 명일의 명랑하고 위대한 희망에로 나가며 매진하기 바라마지 않는다.

- 「문화·지식인에게 격함」, 『반도의 빛』(1942년 2월호)
머뭇거리던 마지막 한 명의 동포도 뒤처지지 말고 일본인으로서의 긍지와 감격에 떨쳐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태양을 향해 전진하자 일장기와 함께. 2천4백만 조선 동포여.

- 「전진하자 일장기와 함께」, 3월호 『동양지광』(1942년 3월호) 

『신시대』 1943년 8월호에 발표한 「최후의 가보」도 네거리소설 형식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최초로 자살돌격을 한 ‘아투 섬(Attu Island) 옥쇄’의 비보를 전해 듣고 집안의 놋그릇은 물론 가보인 놋 촛대까지 헌납한다는 내용이었다. 


침략전쟁과 식민 정책에 적극 봉사하는 ‘국민문학’과 언어·문화에 대한 이석훈의 생각은 여느 친일 부역 문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일본 문학을 찬양하며 편협한 조선 문학을 뛰어넘어야 하고 국민문학은 ‘국어’로 표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민족으로 하여금 일본을 참다운 맹주로 우러러보게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일시적인 선무공작에 머물지 말고 사상적으로 깊이 먹어 들어갈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

- 「사상전과 선전전」, 경성일보(1942.9.19.)

국민문학 주장, 작가는 ‘국어(일본어)’로 글 써야

(일본 전통시가집인 만요슈萬葉集와 일본 전통극인 노能 그리고 전통 시가양식인 단카短歌와 하이쿠俳句 등을 언급하면서) “진정으로 일본적인 문학이라는 것은 하찮은 것이 없으며, 수다스러움 없이 간명(簡明) 직절(直截)하며 또한 풍부한 내용을 가질 만큼 뛰어난 문학”이라고 하고, “일본적인 모럴은 어떤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만인지상 한 분으로 귀일하여 받드는 것이다, 대의에 순절(狗節)하는 정신.

- 「국민문학의 여러 문제」, 『녹기』(1942년 4월호)
편협한 조선적인 것, 서구적인 것을 지양한다는 각도에서 새로운 술은 새로운 그릇에 담아야만 한다고 말했는데 그 새로운 그릇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표현양식, 스타일의 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문학은 국어로 라는 그 표현어를 가리키는 것.

- 「새로운 것에 대하여」, 『동양지광』(1942년 6월호)

그는 작가의 표현수단인 언어과 관련해, 「국어문제회담」(『국민문학』 1943년 1월호)을 통해 작가는 하루바삐 ‘표준어로서의 일본어’를 쓸 것이며 학교에서도 어릴 때부터 명문을 가르쳐 ‘참답게 아름답고 향내 높은 일본어’를 익히라고 주장함으로써 모국어 포기를 선동했다.


이석훈은 또 징병제에 적극적으로 부응할 것을 선동하고 지원병제를 선전했다. 그에 따르면 징병이나 지원병으로 출정하게 되면 ‘반도의 건아’가 되고 그 어머니는 경건한 ‘니뽄(일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징병도 국어 상용(常用)도 일본에 철저하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실천.  
징병제는 내선관계에 가장 중대한 약속을 하는 것이며, 드디어 양 민족의 운명이 좋게 접하는 것이다. 장차 많은 동포가 천황폐하를 위하여 피를 홀리며 생명을 바치는 경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조국이라는 것을 뜨거운 핏줄 속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 「징병·국어·일본정신」, 『조광』(1942년 7월호)

▲ 월간지 <방송지우>

「하늘의 영웅」(『야담』 1942년 12월호)에서 그는 ‘반도’ 출신의 전투기 조종사 단잔 소위를 들어 지원병제를 선전했다. 그의 침착하고 과감한 활동이 ‘총후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줘 수많은 소년들이 ‘반도 건아’로서 ‘공중의 용사’를 지원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방송지우』 1944년 4월호에 발표한 「새 시대의 모성」에서는 아들이 출정하게 됨으로써 그 어머니가 천민에서 한층 지위가 높아졌다며 징병제를 미화했다. 어머니는 매일 신사참배를 하며 아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진중·청결·경건한 ‘니뽄’의 어머니가 됐다는 식이었다. 

단편  주인공은 ‘이성 상실한 친일파의 자화상’

1945년 3월, 이석훈은 두 번째 ‘국어 창작집’ 『요모기섬 이야기』(보문사)를 펴낸다. 장편인 표제작과 여러 편의 단편과 희곡 두 편을 묶은 이 창작집은 이석훈 표 친일부역의 결정판이면서 패색이 짙어지는 일제를 바라보는 그의 부역문인들의 심리적 혼란을 일정하게 드러낸다.


여기 실린 단편소설「선령」(『국민문학』 1944년 3월호)은 「고요한 폭풍」(1941) 이후의 박태민의 정신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박은 우연히 만난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그런 단체에 왜 몸을 팔았냐’는 힐난을 당하면서 심한 고독감과 혼란을 느낀다. 그는 단체 활동을 하면서 자기혐오의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어느 날 한 시인이 그의 연재소설에 대해 시비를 걸고 “아부하는 꼴이란 볼 만하더군!”하고 냉소하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먹을 휘둘러 그를 때려뉜다. 착잡한 심리 상태가 민족적 양심을 지적한 시인에 대한 폭행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는 권고받은 문학대회에 출석하는 대신 만주로 떠난다. 

▲ 1947년 이석훈이 펴낸 <황혼의 노래> 재판. 조선출판사 간

임종국은 이 작품의 주인공 박이 ‘이미 이성을 상실해 버린 친일파들의 자화상’이라고 지적한다. 짙어지는 ‘패전의 음영’에 신경은 날카로워졌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자기혐오’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팔던 이들 부역문인들의 본능적 자기 방어 본능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박태민처럼 이석훈은 1945년 만주로 도피한다. 그는 중국 창춘에서 전쟁참여를 선전하는 집필 행위와 단체 활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아 9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얼마간 칩거하면서 번역 생활을 하다가 『백민』 1947년 1월호에 처음으로 실명을 쓴 산문 「고백」을 발표했다. 

황군 찬양하던 작가, 대한민국 해군 장교로 복무

그는 여기서 친일경력을 말하며 이해를 구하기도 하고, “조선의 문화인들은 관용적이지 못하니 좀 더 너그러워지라”는 식으로 불평도 했다. 해방이 가져다 준 상황 변화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1947년 『순국혁명가열전』(조선출판사), 『문학감상독본』(편저, 백민문화사), 「황혼의 노래』(재판, 조선출판사)를 발간했다. 


1948년 해안경비대가 창설될 무렵 이석훈은 해군 정훈장교(중위)로 입대했다. 1949년 국방부 정훈국을 거쳐 해군본부 소령으로 진급해 초대 정훈감 서리를 지내다 1950년 초에 해군에서 전역했다. 황군과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던 작가는 해방 조국의 군인으로 간단히 변신한 셈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7월, 그는 인민군에게 체포돼 서울 중구 소재 정치보위부에 수감됐다. 같은 달 하순께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으나 그 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바야흐로 한국문학사에서 잊힌 이름이 됐다. 

<참고자료>


- 임종국 저, 이건제 교주, 『친일문학론』, 민족문제연구소, 2013

- 『친일인명사전』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외부 필진 님의 낮달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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