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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잊혀진 의병들

조회수 2018. 8. 31. 10: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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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의 손영각, 입암전투에서 순국하다.

1907년, 의병장 손영각 입암전투에서 순국하다

출처: 두피디아
▲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죽장중고에 세워져 있는 산남의진 발상기념비

1907년 9월 1일(음력, 양력 10월 7일) 산남의진과 일본군과의 경북 포항시 죽장면 입암전투에서 손영각(孫永珏, 1855~1907) 참모장이 전사·순국했다. 향년 52세.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1962 독립장), 중군장 이한구(1963 독립장), 좌영장 권규섭(1991 애국장) 등 산남의진의 주력이 모두 전사했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조직된 항일 의병 부대다.


이 무렵 산남의진의 본진 지휘부(장영도소)는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에 정예 의병 1백여 명과 함께 포진하고 있었다. 이를 탐지한 일본군은 입암리 후원의 험준한 암석을 거점으로 야음을 틈타 침공해 들어왔다. 때마침 임무를 마치고 귀진한 이세기(1991 애국장)·우재룡(1963 독립장)·김일언(2010 애족장) 부장 등이 거느리는 의병들은 장영도소의 의병들과 더불어 일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포위했다고 생각한 것은 착시였을까. 유리한 지점에 매복하던 적의 주력은 맹공을 가해왔고 음력 초하루 칠흑 같은 밤에 의병은 결사적인 항전을 전개했으나 끝내 참패했다. 일제 군경은 의병의 거점이 됐던 입암 마을에 들어가 가옥 수십 채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등 이 일대를 초토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고종이 중추원 의관 정환직에게 밀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권했다. 정환직(1843~1907)은 관직에서 물러나 왕산 허위의 주선으로 군자금 2만 냥을 구해 중국인 왕심정을 상해로 보내어 신식무기를 사들이게 했다. 

▲ 경북 포항시 죽장면 입압리 전경. 여기서 1907년 산남의진의 참모장 손영각 등 여러 명의 장수가 전사했다.

이 무기를 석 달 후까지 강릉으로 옮기기로 하며 아들 용기는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규합, 강릉으로 북상하도록 하되 대구, 대전을 거치면 반드시 왜병들의 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므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고종 밀지로 의병 일으킨 산남의진

귀향한 정용기(1862~1907)는 오랜 친구인 포항 사람 손영각, 이한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권세가 등의 노래를 만들어 유포하는 한편, 통유문과 격려문을 지어 의병운동의 확산을 꾀했다. 영천·신녕·흥해·청하·기계·죽장·영덕·영해 등지에 소모장(의병을 모집하는 직책)을 파견, 의병 규합에 힘썼다.


의병들의 총 병력은 2천 명이 넘었다. 1906년 3월 마침내 각 고을의 포수와 민병들로 구성된 산남의진을 구성했다. 산남의진은 삼남 창의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1990 애국장), 도총장 이종곤, 선봉장 홍구섭, 후봉장 서종락(1990 애국장), 좌영장 이경구, 우영장 김태언 등으로 편제했다. 


3월 5일 2천여 병력으로 의진은 깃발을 높이 들고 행군을 시작했다. 영천에서 출발해 동해 쪽의 여러 고을을 쳤다. 의진은 이때 영해 일대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던 신돌석(申乭石, 1878~1908) 의진과 연합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동지방으로 진출해 장차 서울을 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4월 28일, 청하로 진격하던 중 신광면 우각리 앞에서 경주 관군 참령 신석호의 글을 받았다. ‘경성에서 어떤 고관이 잡혔다고 하는데 그가 혹시 정환직 공이 아닌가’하는 내용의 글이었으니 이는 진위대(지방군)의 간계였다.  


정용기는 상대가 적 일본군 아닌 우리 군대인 데다가 자식의 도리로 부친의 안위를 염려해 면담하기로 했다. 의진을 중군장 이한구에게 맡기고 경주로 들어간 정용기는 대구부로 압송돼 감옥에 갇혔다. 


중군장 이한구가 지휘하게 된 의진은 청하와 경주 등지의 공격을 시도하고 청송·진보 등지로 전전했지만, 일은 여의하게 되지 않았다. 청하 덕성리에서는 의외에 적군과 만나서 고전 끝에 겨우 적을 격퇴하기도 했다. 이때, 서로 호응하던 신돌석 의진 역시 적의 견제로 길이 막혔고, 적은 1개 대대의 병력을 청송부에 두고 의병에 대처하니 의진은 그 형세를 유지하기조차 어렵게 됐다.  


선유사(병란이 났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백성을 훈유하던 임시 벼슬)의 감언이설에 민중들도 의병을 멀리하려는 상황이었고 수감 중인 대장 정용기에게 화가 미칠까를 저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의진은 7월 하순 무렵에 후일을 도모하자며 일단 군사들을 해산시키니 이로써 산남의진의 제1차 활동은 중지됐다. 

▲ 충효재 마당에 있는 고종황제의 밀지비
▲ 산남의진을 이끈 부자 의병장 정환직-정용기의 집터에 세운 충효재. 영천시 자양면에 있다.
▲ 영천문화원 앞에 세워진 대장정공 양세 순국 기념 ‘산남의진비’

그해 8월에 정환직이 손을 써 정용기는 풀려났으나 병석에 눕고 말았다. 산남의진이 깃발을 다시 세운 것은 1907년 4월부터였다. 부산·대구에서는 김현극·유화실이 화약을, 청송에서는 군수품이 운반됐으며 안동에서 김석정, 동해지구에서 임중호, 의성에서 박태종, 경주서 홍귀섭, 신녕에서 권규섭 등이 각기 의병을 거느리고 모였다.

예순넷 정환직이 의진을 이어받다

1907년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진용을 재정비하고 음력 7월 12일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두 번 청하를 공격해 일본 헌병을 죽이고 헌병 분파소를 불태웠다. 이때 정용기의 고향인 자양 땅에 일본군이 들어왔으므로 진을 옮겨 이들과 싸워 무찔렀다.


그날 정환직이 귀향해 장차 북상할 계획을 의논했다. 8월 15일 전군을 영천의 운주산 아래 집합시켜 북으로 진격할 일을 의논했으나 다수가 아직은 무기와 탄약도 부족하며 또 겨울을 앞두고 옷도 허술하니 준비 시간을 더 갖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의진은 병사들에게 10일간의 휴가 겸 준비할 기회를 주고 본진 100여 명만을 거느리고 죽장면 매현리에 주둔했다. 이틀 동안의 입암전투가 벌어진 것은 바로 9월 1일 밤이었다. 대장과 참모장, 중군장과 좌영장까지 전사했으니 참담한 패배였다.  


입암전투에서 아들 용기 이하 장수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환직은 급히 하향했다. 그는 살아남은 이세기·우재룡과 더불어 전사자의 장례를 치른 후 의병대장으로 추대됐다. 이후 정환직은 전열을 가다듬어 포항과 경주, 영천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다.  


9월 말께 흥해·신녕·의흥에서 일본 군경과 접전해 총기 500여 자루를 노획했고 10월에는 흥해와 영덕을 공격해 일본 헌병을 내쫓고 분파소를 소각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겨울이 되자 탄약과 식량이 떨어져 의병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됐다. 


이에 일단 의진을 해산한 뒤 청하의 촌락에 은거하던 정환직은 1907년 12월 영천 일본군 수비대의 급습을 받고 체포돼 청하에서 대구로 압송됐다. 대구에서 다시 영천으로 압송된 정환직은 1907년 12월 11일 그곳 남교에서 총살되니 이때 그의 나이 예순넷이었다. 

▲ 산남의진이 제4차 의진을 결성한 영천 보현산의 거동사 대웅전. 국가보훈처 지정 보훈시설이다.

그 뒤 산남의진의 유장들은 남은 병사 700여 명을 모아 최세윤(1968 독립장)을 대장에 추대해 운문산, 청송·흥해 등 각처에서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력이 하루가 다르게 증강되는 현실에서 의병의 전략도 한계에 이르렀다. 

1909년 산남의진 명을 다하다

1909년 대장 최세윤을 비롯한 많은 지휘관과 군병들이 하나둘 체포되거나 전사하게 되면서 남은 병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경상북도에서 창의해 4년여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수행해 온 산남의진은 마침내 그 운명을 다하고 스러진 것이었다.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공적에 가려 있던 손영각 선생에게는 1980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산남의진에서 싸웠던 의병들 가운데 그 이름을 남긴 이는 449위가 고작이다. 한때 3천을 헤아렸다는 그 의로운 이들의 흔적은 입암이나 동해안 어느 골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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