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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술대학 설립자의 비루한 친일 행적

조회수 2018. 8. 30. 13:3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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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사의 거목, 유치진의 지난날은 비루했다.
<대추나무>의 대본과 공연 포스터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정작 대학 시절에 희곡 공부는 전혀 하지 못했다.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을 처음으로 공부하게 된 게 고교에 임용돼 국정 국어 교과서를 가르치면서다. 1980년대 제4차 교육과정의 『고교 국어 1』에는 두 번째 소단원에 그의 희곡 「조국」(1막 2장)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국」은 3·1운동을 배경으로 시위에 참여하려는 아들과 이를 말리는 홀어머니와의 갈등을 통해 독립투쟁의 당위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이 3·1 만세시위에 참여하려다가 홀어머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접자 ‘반역자’라며 매도된다. 그러나 시위가 고조돼 만세의 물결이 다가오자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갈등과 해소 방식이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아이들이 좀 멋쩍어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연극이 본질에서 다소 신파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감정에 따른 성격의 급변이 쉬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통 사실주의 극작가’ 알려진 유치진

해방 뒤 은둔생활을 하던 유치진은 1947년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재기했다. 그러나 교사용 지도서는 물론이고 어떤 참고서도 그런 속사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문학 교육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문학 시간에 유치진이 농촌과 식민지 현실을 탁월하게 묘파한 정통 사실주의(리얼리즘) 극작가라고만 배울 뿐이다.


우리나라 근대극 운동의 선구자이며 사실주의 희곡의 기초를 닦은 동랑 유치진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교육이나 삶에서 연극이 그만큼 가깝지 못하다는 방증이 될지 모른다. 학교 교육에서 유치진을 배우는데도 그를 기억하는 건 쉽지 않다. 굳이 극장을 찾지 않는 한평생 연극 한 편 보기 힘든 게 우리 형편이 아니던가. 


'낯선’ 유치진을 설명하는 데는 청마 유치환(1908~1967)의 형이라고 소개하는 게 빠르다. 그도 저도 안 되면 잘 나가는 코미디언, 가수, 작가를 배출한 서울예술대학의 설립자라고 하면 알아듣기가 한결 쉬울지도 모른다.


동랑 유치진은 1905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나와 체신원(우체국에서 일하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일본에 유학, 1931년 도쿄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가 연극계에 몸을 담게 된 것은 1931년 극예술연구회 창립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다. 


극예술연구회(약칭 극연)는 유치진이 서항석(1900~1985), 함대훈(1907~1949), 김진섭 등 외국 문학을 전공한 동경 유학생들과 함께 결성한 신극 운동 단체다. 처음에는 계몽에 힘쓰다가 뒤에는 실험 무대를 통해 번역극 공연 등으로 신파극을 극복하고 신극 정착에 이바지했다.

유치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소> 공연. 이 작품은 식민지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했다.

유치진은 극연 동인으로 고골리의 「검찰관」에 출연하는 것을 시작으로 희곡 창작과 연기·연출·평론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다. 창작 희곡으로 제2회 공연작 「토막(土幕)」(『문예월간』, 1931.12.~1932.1.), 제5회 공연작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조선중앙일보, 1933.11.)이 있다. 모두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밖에도 「빈민가」(1935), 「소」(1935) 등 1930년대 초중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해 카프와 같은 경향파적 특성을 보였다. 이 때문에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문인들로부터 ‘동반자 작가’(1930년대 전후에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동조한 작가들의 총칭)로 불리기도 했다. 


「빈민가」는 1934년 극작과 연출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들로 이뤄진 삼일극장에 제공해 공연한 작품이었다. 「소」는 주영섭(1912~?)과 이해랑 등이 주도한 동경학생예술좌의 창립을 후원해 초연한 작품이다. 


극예술연구회 제8회 공연 예정작이었던 「소」는 여러 차례 검열을 거친 끝에 「풍년기」로 제목을 바꿔 1937년 2월에 공연됐다. 이 시기에 일제의 작품검열은 가혹했다. 이미 6회 공연(1935) 때 존 골즈워디(John Galsworthy) 작 「은연상」이 검열에 저촉돼 공연이 좌절된 데 이어 「소」도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소」 대신 선정된 심재순 작 「줄행랑에 사는 사람들」, 한태천 작 「토성낭」, 오케이시(O'Casey) 작「쥬노와 공작(孔雀)」 등도 모두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검열뿐 아니라 연극인에 대한 일경의 소환도 잦았고 더불어 심문, 투옥도 심심찮아 극단은 일종의 사상단체로 지목받고 있었다.

극연, 일제 작품검열로 시련 끝 해산

1935년을 전후하면서 극연의 위상과 창작 경향도 크게 바뀌었다. 극연에서 활동하던 연출가 홍해성이 동양극장 전속으로 옮겨가면서 유치진이 극연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됐다. 「소」 사건 이후 작품 경향도 현실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리얼리즘에서 현실을 우회하는 낭만주의와 역사주의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제12회 공연작은 유치진이 각색·연출한 「춘향전」(조선일보, 1936.2.~4.)이었는데 대성공을 거둬 이후 극연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 무렵 극연은 생활 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운 실천부원 11명이 탈퇴하면서 내분을 겪는다. 이 일로 극단은 더욱 대중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됐으며 유치진의 지도력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937년 제15회 공연작으로 유치진은 「풍년기」(「소」의 개제·개작)를 연출했다. 1937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마의태자」는 1941년 「마의태자와 낙랑공주」로 제목이 바뀌어 극단 고협(1939년 3월, 고려영화협회가 설립했던 신극 단체)에서 공연됐다.


1938년 3월 극예술연구회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극단 이름을 극연좌로 바꾸어야 했다. 이른바 ‘해외문학파’ 동인들이 탈퇴하고 유치진과 서항석 중심으로 운영진이 꾸려졌다. 같은 해 12월 극단운영에 불만을 품은 이서향(1914~1969) 등 몇 명의 젊은 연극인이 지도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의 탈퇴와 제명 이후 유치진과 서항석만 남은 극연좌는 와해 직전 상태에 놓였다. 이후 1939년 제23회에는 앤더슨 작 「목격자」(제19회 공연작), 제24~25회에는 「춘향전」을 각각 재공연하며 명맥을 잇던 극연좌는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극연좌 해산 뒤 유치진은 2년여 세월 동안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극단 고협에 협력했다. 고협에서 그는 1940년 3월과 4월에 성공작 「춘향전」과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마의태자와 낙랑공주」를 나옹 연출로 각 무대에 올렸다. 


한편, 유치진은 1931년 동아일보에 평론 「연극영화전을 개최하면서」(6.19.~21.)를 발표한 이래 1939년 말까지 70여 편에 달하는 연극 비평과 희곡 비평 시론(時論), 1년간의 연극계 결산, 희곡 창작법과 영화에 대한 제언 등을 발표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국가총동원법안을 만들어 ‘국민정신총동원’의 표어를 내걸고서 이른바 ‘신체제운동’을 전개했다. 연극의 경우 ‘국민연극’이라는 국책극을 강요하고 그 추진 주체로 1940년 12월 22일에 조선연극협회 만들었다. 국책 연극을 시행하려면 우선 연극인들을 하나로 묶는 조직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조선연극협회 이사 돼 친일로

국책극 <북진대> 팸플릿

유치진의 친일활동은 자신이 창단한 어용 극단 ‘현대극장’을 통해 활발하게 이뤄졌다. 현대극장은 1941년 3월 부민관 소강당에서 총독부와 총력연맹, 매일신보사 등 유력 기관의 문화예술 관계자들과 연극인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창단됐다.


현대극장에서 창립공연으로 선을 보인 작품은 ‘선만일여’를 주제로 창작한 「흑룡강」이었다. 선만일여는 ‘조선과 만주는 하나’라는 뜻으로 1936년 일제가 민족 말살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내세운 구호였다.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의 만주판인 셈이었다. 


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로 이루어진 「흑룡강」은 1941년 6월 6일부터 사흘간 부민관에서 민관 지도층의 지대한 관심 속에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의 주제는 만주사변(1931)에서 만주국 건국(1932)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 속에서도 만주 건국을 향한 이상을 실현한다는 것으로 민족 상극보다 민족 협화로 발전하는 대동아 건설의 일단을 구상화한 것이었다. 


「흑룡강」 공연에는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들, 철도국, 전매국, 은행과 회사 등의 단체관람이 이뤄지면서 1만여 명의 관객이 동원됐다. 이는 매일신보사의 후원과 1940년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조직한 친일 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총력연맹)의 지원 덕분이었다. 이는 또 현대극장의 신체제 연극이 당시 정관계의 주목거리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현대극장은 「흑룡강」을 1941년 8월 인천 낙우관에서 재공연했고 1941년 10월 만주 건국 10주년 기념공연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재공연했다. 이후 현대극장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북선과 서선, 남선 일대로 장기 순회공연을 떠났는데 주요 공연작은 유치진이 창작하거나 연출한 작품이었다. 


한편, 유치진은 매일신보에 평론 「국민연극의 구체화 문제-‘흑룡강’ 상연에 제하야」(1941.6.5.)와 경성일보에 일본어 수필 「극단 전환의 시기」(1941.8.24.)를 각각 발표했다. 이는 일제의 전시체제에 부응하면서 자신의 친일 작품이 국민연극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1942년 현대극장은 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의 「북진대」를 초연했다. 4월 4일부터 4일간 부민관에서 상연된 「북진대」는 경성 대화숙에서 주최하고 매일신보사가 대대적으로 후원에 나섰다. 공연을 주최한 경성 대화숙은 1941년 1월 사상범의 보호관찰, 집단적 수용, 조선인의 황민화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파시즘 단체였다. 


「북진대」는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이용구(1868~1912)의 일진회가 일본을 도와 전쟁 승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북진대」는 일진회의 친일 행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이용구를 비롯한 친일인사들의 매국 행위를 긍정적으로 부각했다.

일제의 지원 속 여러 편의 연극 공연

작품에는 과거 일진회가 일본에 협력해 러시아를 물리쳤듯이 태평양전쟁에서도 조선인이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자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북진대」는 1942년 4월 남부 지방으로 순회공연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10월 신부좌(해방 후 동화극장)에서 재공연됐다.


「북진대」의 다음 작품은 조선 농민들의 만주 이주를 통한 분촌 운동을 그린 「대추나무」였다. 이연극은 서항석의 연출로 1942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됐다. 「대추나무」는 조선연극협회를 이은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조선총독부와 매일신보사 등의 후원을 받아 개최한 제1회 연극경연대회 출품작이었다. 


우람한 대추나무를 사이에 둔 두 집안의 소유권 갈등과 두 남녀의 엇갈린 애정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일제가 시행하는 만주 이주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대추나무」는 대추나무 분쟁을 겪은 뒤 ‘비좁고 낙후된’ 조선을 떠나겠다는 주인공의 이주 결정을 통해 만주 이주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는 목적극, 국책극으로 이른바 국민연극이었다. 


노골적으로 일제의 정책을 선전·선동한 이 작품으로 유치진은 연극경연대회 개인상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총독부 정보과장상)을 받았다. 이후 「대추나무」는 1943년 12월 제일극장, 1944년 5월 부민관, 그리고 1945년 4월 약초 국민극장에서도 재공연됐는데 매년 한 차례씩 반드시 공연될 정도로 현대극장의 주요 상연목록이었다. 

출처: 위키백과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으로 1940년대 대중극의 중심지였던 동양극장

광복 뒤 1957년, 유치진은 대학생 연극경연대회 공식 공연작품으로 「왜 싸워?」를 써서 『자유문학』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친일 국책극 「대추나무」를 개제, 개작한 작품이었다. 이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김광섭·모윤숙·이무영 등이 이를 문제 삼고 나섰다. 유치진은 이에 대해 「동랑 자서전』에서 이렇게 강변했다.

「대추나무」는 이렇게 일제의 강압하에서 쓴 작품이지만, 그 무렵에 쓴 「흑룡강」, 「북진대」와는 달리 일제에 아첨하는 구석이 없다. 물론 그중에는 간도로 떠나는 대목이 있어 당시 일제가 권장하는 북진(北進)과 부합한 점이 있지마는. 내가 그들의 북진정책에 영합하려고 간도행을 넣은 것은 아니었다. (…) 일제의 작품상까지 받은 작품이었다 해도 「대추나무」만은 이 민족의 한사람인 나더러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치진의 친일 부역은 연극으로만 이뤄진 것만도 아니었다. 그는 현대극장 대표로서 각종 지면에 발표한 글을 통해서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는 감상 「축 싱가포르함락」(매일신보, 1942.2.19.), 일본어 평론 「반도의 징병제와 문화인-우선 상무정신」(경성일보 석간, 1940.5.30.), 수필 「북진대 여화」(국민문학, 1942.6.)를 각각 발표했다.


그는 또 일제의 만주 개척에 큰 관심을 보여 일문보고서 「개척지 견학-통화에서」를 경성일보 석간(1942.6.18.)에, 평론 「개척과 희망-만주개척지를 보고서」를 매일신보(1942.7.30.)에, 그리고 대담 「만주 개척민 시찰보고」를 잡지 『녹기』(1942.8.)에 연달아 기고했다. 그가 만든 「북진대」나 「대추나무」 같은 국책극이 흉내만 낸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유치진은 1943년 8월 도쿄에서 열린 제2회 대동아결전 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다. 또 좌담회 「농촌문화를 위해서-이동극단 이동영사대의 활동을 중심으로」(『국민문학』 1943년 5월호)에 참석하고 평론 「결전 문학의 확립-싸우는 국민의 자세」(『국민문학』 1943년 6월호)를 발표했다.

다행히 일선의 황군(皇軍)이 굳게 전선을 지키고 있는 덕택으로 우리는 적의 위협을 직접 받지 않고, 일상생활에 다소의 부자유를 느끼면서도 너무나 안이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마음은 때때로 해이해져, 우리나라가 지금 정전의 와중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기도 한다. 세계의 지도는 지금 색깔이 바뀌고 있는 중이다.


- 「결전 문학의 확립-싸우는 국민의 자세」 중에서

친일 부역의 절정 ‘이동연극 보국대’

1944년 1월 1일 부민관에서 조천석 작 「무장선 셔먼호」를 현대극장과 약초극장(해방 후 수도극장) 산하 약초가극단의 합동 공연으로 상연했다. 유치진 연출의 이 작품은 평양에 쳐들어온 미 해군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신미양요)을 극화한 것으로 일제가 강요한 배미영정책에 근거한 작품이었다.


또 현대극장은 자체 인력으로 이동연극 보국대를 조직해 산간벽지에 파견했다. 1944년 4월 경성에서 선보인 작품을 가지고 평남 신창탄광에 있는 조선무연탄주식회사 내 각 탄광을 순회 공연했으니 그야말로 ‘보국’을 한 셈이었다.

국립극단이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세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 유치진의 <토막> 공연(2015.10.)

같은 해 유치진은 조선문인보국회 ‘소설 희곡부’ 회장으로 선임됐다. 문인보국회는 조선문인협회를 비롯한 여러 문학 관련 단체를 통합한 거대 조직으로서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문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외곽단체였다. 막 불혹으로 접어들던 유치진으로선 이 통합조직의 소설 희곡부 수장이 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을 것이었다.


그러나 무적 황군의 승리는 진작에 끝나 있었다. 유치진은 1945년 8월 13일부터 시작한 현대극장의 「산비둘기」 공연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자신의 친일 부역 행위가 걸렸던 것일까. 유치진은 1947년 2월경까지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은둔하던 유치진을 불러낸 것은 당시 좌익 연극인이 연극계를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현실 상황에 대응하면서 재기를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2월 그는 3·1운동을 소재로 한 단막극 「조국」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해방 후에 펴낸 희곡집 『소』

미군정이 좌익 연극을 탄압하는 상황 속에 그는 우익 연극계의 선봉이 됐고 같은 해 5월 극예술협회 창립공연작으로 외세 의존성을 떨쳐야 한다는 주제 의식을 담은 작품 「자명고』(5막)를 발표했다. 정세의 변화에 그는 기민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은하수」(3막), 「흔들리는 지축」(1막)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소』, 『역사극집』, 『흔들리는 지축』 등의 희곡집을 펴냈다. 우익 연극인들이 미군정의 지원 아래 한국무대 예술원을 결성할 때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연극계 전면에 다시 나섰다. 

우익 연극계 선봉해 꽃길만 걸어

이후 그는 남한 정부 안에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대한에서 연극을 가르치고 「용사의 집」과 「애국자」(이상 1949)와 같은 우익 연극을 연출했으며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1948년에는 「별」(5막)을 발표한 것 외에는 주로 논문을 쓰고 평론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남한 연극계의 주도권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새 문화정책에 대한 요망」, 「문화인의 건국에의 관심」 등을 발표하면서 남한 정부 내의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런 가운데 한국연극학회 회장과 서울시 문화위원으로 피선됐다. 


1950년 초대 국립극장장에 피선됐고 한국전쟁 뒤에는 「처용의 노래」(4막), 「나도 인간이 되련다」(4막) 등 반공과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역사물을 주로 발표했다. 1955년에는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1막), 「자매」(5막), 「사육신」(4막)을 발표했으며 서울시 문화상과 예술원 예술상을 수상했다. 


1958년에는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위원장에, 다음해 헬싱키에서 열린 국제극예술협회에서는 부의장에 선출됐다. 1961년에는 전국 극장단체협의회장과 문교부 대학교수 자격심사위원에 위촉됐다. 도쿄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에서는 국제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62년에는 드라마센터를 건립해 한국연극연구소와 연극학교, 연극아카데미 등의 부설기관을 만들었다. 드라마센터 개관 기념공연으로 「햄릿」과 「포기와 베스」를 각각 연출했다. 같은 해에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과 예술원 부회장에 피선됐다. 이때 그는 57세였다.

1962년 4월 12일 개관한 남산예술센터의 드라마센터. 이를 기반으로 유치진의 연극활동은 폭을 넓혀갔다.

1964년 극단 드라마센터를 창설한 이후 드라마센터와 서울연극학교 운영에 전력했고 3·1연극상(1967년) 등을 받았다. 1973년 서울연극학교를 폐교하고 서울예술전문학교로 인가받았는데 이 학교가 서울예술전문대학을 거쳐 오늘의 서울예술대학교로 발전했다. 


유치진은 1974년 2월 10일 지병인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향년 69세. 1963년 5월 문교부가 주는 문예상, 1967년 3·1연극상을 수상했다. 


1991년 문화부가 유치진을 ‘4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했지만, 경남 충무시(현재 통영시)의 문화 예술인들이 유치진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는 바람에 김정호로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친일 부역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난 뒤에야 부역 행위가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치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연극’ 부문에 수록됐고 모두 12편의 친일 저작물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2000년대에 친일부역 재조명

일제 총독부의 관리들에게도 연극인들이 ‘적당히 부려 먹을 수 있는 광대’쯤으로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연극을 통해서 식민지 지배 논리,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동하고 총동원 정책을 전파하는 일의 효율성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드라마센터에 있는 유치진 흉상

식민지 시기 말기에 적지 않은 연극인들이 일제에 부역함으로써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유치진과 함께 활동한 연극인 가운데 극예술연구회 동인이었던 서항석과 함대훈을 비롯해 극작가 이서향, 함세덕(「동승」의 작가), 유치진의 작품을 주로 연출했던 주영섭 등이 그들이다. 주영섭은 그의 형 주요한과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2018년 서울예대 학생과 교수들이 입학 전형료와 특성화 사업비 등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유치진의 아들인 유덕형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서는 일이 있었다. 유치진 일가가 법인 이사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세습구조도 비판받았다. 


학교 측이 개교기념일 무렵이면 교직원들에게 설립자 유치진의 묘소를 참배하라고 요구한 것도 알려졌다. 이에 학생들은 ‘세습 철폐’, ‘교내 유치진 동상 철거’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를 행진하기도 했다. 죽어서야 비로소 살아생전의 영예로 감춰졌던 삶과 문학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셈인데 그게 이 나라가 역사를 성찰하는 방식이라는 점은 씁쓸하기만 하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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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ziksir.com/ziksir/view/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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