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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루지 못한 마틴 루터 킹의 50년 전 꿈

조회수 2018. 8. 27. 14: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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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1963년 오늘 - 마틴 루터 킹, ‘자유와 민주주의를 함께 나누는 꿈’을 이야기하다.

▲ 1963년 워싱턴 행진은 25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해 워싱턴기념관까지 1.6km를 함께 걸으며 이루어졌다.

1963년 8월 28일 수요일, 햇살은 뜨거웠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일자리와 자유’를 요구하며 링컨 기념관까지 행진해 온 25만 시민의 환호 속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워싱턴 기념관 2층 발코니에서 연설하고 있는 킹 목사. 그때 그는 서른네 살의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였다.

이날 킹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유대인이든,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모두 손을 잡고, "자유가 왔다"는 흑인영가를 부를 수 있는 날을 만들자고 역설했다.


흑백 평등과 공존 요구한 명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중에서

그의 연설은 흑인과 백인의 평등과 공존에 대한 요구였다. 그것은 1955년, 로자 파크스(Rosa Parks, 1913~2005)의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버스 보이콧 운동에 동참하면서 시작한 킹의 흑인 민권운동의 클라이막스라고 해도 좋은 것이었다. [관련 글 : 로자 파크스, 행동과 참여]


지난 수백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미국의 인종 평등을 이끈 그의 연설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1863), 존 F. 케네디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1963)와 함께 미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연설로 손꼽힌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29년 미국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침례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살에 남부 지역에서 흑인이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학 중 하나인 애틀랜타의 무어하우스 대학(Morehouse College)에 들어갔다.


1948년 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크로저 신학대학에서 공부했는데 이때, 그는 인도의 무저항주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의 철학에 심취했다. 그가 비폭력 시위를 원칙으로 삼은 건 간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55년 로자 파크스와 함께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운동' 주도 


1955년 보스턴칼리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킹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가(街) 침례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가 주도한 버스 승차거부 운동에 동참하면서 이 운동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관련 글:로자 파크스, 미 의회에 기념되는 최초의 아프리카계 여성]

▲ 킹 목사는 로자 파크스와 함께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투쟁(1955)을 함께했다.

그는 두 번 체포되었고 끊임없는 살해 위협을 받았지만 흑인들은 382일 동안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가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다. 이듬해 미국 연방 대법원이 몽고메리 버스 시스템의 인종차별(인종 분리법) 제도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버스승차 거부 운동은 몽고메리라는 지역적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몽고메리에서조차 실질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차별을 없애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것은 적지 않은 승리였다. 킹은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투쟁 활동에 대한 보고서 형식의 책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The great march to freedom)』(1958)을 남겼다.

▲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1958)

이후 미국 남부에서는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평화 시위가 이어졌다. 몽고메리 투쟁의 경험을 통해서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은 킹은 1957년,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CLC: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59년에 킹과 SCLC는 인도를 방문해 간디의 후계자인 네루 총리를 만나면서 간디 사상의 핵심인 사티아그라하(진실에 대한 헌신)에 대해 알게 된다. 이후, 킹은 비폭력 저항이야말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피압박 민중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민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활동가들은 자주 구타를 당하거나 체포되었고, 때로 숨지는 일도 있었다. 1963년 봄, 앨라배마주 버밍햄(Birmingham)에서 킹이 주도한 간이식당과 고용 관행에서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선 경찰이 시위대에게 경찰견을 풀고, 소화 호스로 물을 뿌리는 등 충격적인 진압 행위를 벌였다. 

▲버밍햄에서 경찰은 시위대에 경찰견을 풀고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대는 등 과격하게 대응해 큰 충격을 주었다.
▲버밍햄에서 경찰은 시위대에 경찰견을 풀고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대는 등 과격하게 대응해 큰 충격을 주었다.

킹은 학생 수백 명을 포함한 지지자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버밍햄의 흑인 성직자들은 아무도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고 흑인들이 이 운동을 지지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일부 백인 성직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버밍햄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자, 평화적 개혁을 위해 다양한 세력이 결집했다. 킹은 인권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세계에 미국 내 인종 문제의 심각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1963년 8월 28일 워싱턴D.C.에서 역사적인 평화행진을 주도하기로 했다. 

▲ 워싱턴 행진은 백인 5만을 포함, 모두 25만 명이 워싱턴기념탑 광장에 모여서 시작되었다.

5분의 1이 백인인 25만여 시민들은 워싱턴기념탑 광장에 모였고, 오전 11시 15분에 1.6km 앞의 링컨 기념관을 향해 참가자들은 대행진을 시작했다. 참가자들 손에는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 철폐’, ‘선거법을 달라’, ‘일과 자유를 달라’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일과 자유"를 외친 25만 시민의 워싱턴 대행진

집회에 참여한 이들은 거의 모든 사회 계층의 인사들을 망라했다. 월터 로이터(Walter Reuther) 같은 노동운동가, 성직자,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 (James Baldwin), 시드니 포이티어(Sidney Poitier)와 말런 브랜도(Marlon Brando),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 같은 배우들, 조앤 바에즈(Joan Baez)와 밥 딜런(Bob Dylan) 같은 가수) 등이었다.

▲ 워싱턴 행진에는 시드니 포이티어와 말런 브랜도, 찰턴 헤스턴 같은 배우들도 참여해 뜻을 같이했다.
▲ 워싱턴 행진에는 밥 딜런과 조앤 바에즈 같은 가수들도 참여했다. 광장에서 노래하고 있는 조앤 바에즈.

그러나 이날의 주인공은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의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서른네 살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였다. 킹은 애당초 차별 사회에서 자유를 실현하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들의 고통을 표현할 짧고도 다소 공식적인 발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막 연설을 끝내려 했을 때 복음성가 가수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이 “당신의 꿈을 말해줘요, 마틴, 그들에게 당신의 꿈을 말해줘요!”라고 소리쳤다. 청중의 함성에 고무된 킹은 그의 과거 발언 중 일부를 끌어냈다. 그는 인종과 피부색과 배경이 다른 모든 국민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함께 나누는 꿈을 이야기했다. 

인종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 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쉬운 말로 호소한 그의 연설은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은 이듬해에 민권법이 제정됨으로써 인권운동의 위대한 승리로 이어졌다.  

▲ 린든 존슨 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 한 마틴 루서 킹 목사.(1963.7.22.)

1964년 민권법 제정, 킹은 노벨평화상 수상

1964년, 드디어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에 서명했다. 이 법은 공공장소에서의 인종 분리나 인종, 피부색, 종교, 성, 또는 민족을 이유로 고용에서 차별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그 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맬컴 엑스(Malcolm X, 1925~1965) 등은 킹의 운동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비판했다. 흑인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엑스를 지지하며 킹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다.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 인권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킹은 맬컴 엑스 등의 활동이 극단적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 양심을 죽이느니 차라리 앨라배마의 고속도로에서 죽겠다”며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협박이나 일부 백인 지도자들의 타협 주장 역시 거절하였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비폭력 투쟁으로 수백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미국의 인종 평등을 공론화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그것은 제한적인 승리에 그쳤다.

흑인 인권운동 내부에서 그의 비폭력 투쟁 전술에 반대하는 조짐은 1965년 3월, 몽고메리의 이웃 도시인 앨라배마주 셀마(Selma)에서 벌인 시위 도중에 드러났다. [관련 글 : 1965년 ‘피의 일요일’,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끝나지 않았다]

당시 셀마에서 주 청사 소재지인 몽고메리까지의 행진이 계획되었으나, 시위대는 경찰봉과 최루 가스를 사용한 주 경찰에 의해 해산당했다. 연방법원의 시위금지 명령과, 행진 취소를 요구하는 연방정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킹은 자신이 주도하는 2차 행진을 결행했다.

▲ 킹은 법원의 시위금지 명령과 정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셀마에서 몽고메리로의 2차행진을 결행하였다.

킹은 흑인과 백인으로 이루어진 1500명의 시위대 선두에 서서 셀마 외곽의 페터스 다리를 건너 주 경찰의 바리케이드 앞까지 행진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따르던 사람들을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하고, 애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시위대를 해산해 버렸다.


킹의 이러한 결정 이후, 전부터 그가 너무 조심스럽다고 비난하던 젊은 과격파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 실질적 성과에 목말라하던 이들이 호전적인 성향을 보이며 북부 대도시 슬럼가를 중심으로 뭉쳤다. 킹의 종교적 비폭력 철학은 의심받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에 동참, 멤피스에서 피살


결국, 일리노이주와 미시시피주에서 킹의 명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그를 비판하는 이들로부터 조롱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킹은 베트남 전쟁 반대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이들을 희생시키고 베트남 국민을 학살하는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해서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 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킹은 노동기본권인 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으로써 자본가와 투쟁하는 계급투쟁, 곧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1968년 4월, 청소노동자 파업에 동조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로 간 킹은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빈곤을 종식하고, 주님의 모든 자녀가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자신이 지닌 엄청난 자원을 쓰지 않는다면, 미국도 역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노동자로서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적절한 임금을 받고 싶다면 투쟁해야 합니다.” 

4월 4일, 동료들과 함께 묵고 있던 모텔의 발코니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미리 잠입해 있던 테네시 출신의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1928~1998)가 쏜 권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향년 39세. 그로써 빈민들과 함께 워싱턴D.C까지 행진하려던 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통령 린든 B.존슨은 킹 목사의 장례를 국장으로 선포하였다. 제임스 얼 레이는 영국으로 도망쳤으나 런던에서 체포되어 다시 테네시주 멤피스로 송환되었다. 레이는 1969년 징역 99년형을 최종 선고받은 뒤 1998년 감옥에서 죽었다. 


그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많은 지지자를 획득했고, 흑인도 인간이라는 시각을 확산했다. 미국에서는 1986년부터 킹을 기려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정하고 연방정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장례는 4월 8일 애틀란타에서 존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졌다.

매년 1월 세번째 월요일 '킹의 날' 연방정부 공휴일로 지정

마틴 루서 킹은 흑인 자유 운동에서 단순한 항의운동을 강력한 개혁 운동으로, 지역적 분쟁을 전국적 범위의 도덕적 쟁점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흑인 대중을 일깨우고 그들이 행동하게 하는 데 성공한 그는 또다시 백인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연방정부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게 만드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남부의 인종차별법을 철폐시켰던 그의 전술은 다른 지역의 복잡한 인종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흑백 인종차별과 인종 간 갈등은 미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며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1863년)으로부터 한 세기 반(155년)이 지났다. 그러나 현실은 그날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여전히 회의적이다. 노예해방선언의 내용이 가리키는 자유와 오늘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일상에서 겪는 자유는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



“1863년 1월 1일부터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특정 지역에서 노예로 예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킬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링컨, <노예해방선언>(1863년) 중에서

*외부 필진 <낮달>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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