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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장래 희망이 '한량'인 이유

'일만 하는 인간'이 되길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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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閑良) : 할냥 혹은 활량(弓~)은 원래 한국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을 뜻하는 말이나, 보통 “일정한 직사 없이 놀고먹는 양반 계층”으로 넓게 쓰였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근대 이후에는 “돈을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한량의 재해석: 무능력자에서 욜로족으로

우리 사회에서 한량의 의미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먹고 노는 일종의 비생산적 인구를 한량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요즘 청년 세대들은 ‘한량’을 재해석한다.


노동가치가 매우 중요했던 과거엔 일(노동) 하지 않는 인간이 곧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됐지만, 21세기에는 다르다. 지금 청년세대는 오히려 적당히 돈을 벌거나, 돈을 벌어두고서 개인이 원하는 삶을 사는 의미로 한량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욜로(YOLO)족과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주위에 꿈이 뭐냐고 물어봐도, 큰 꿈을 가진 사람은 그리 몇 없다. 노는 게 꿈인 사람은 있어도...

출처무한도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 사유하는 인간이라는 정의는 17~18 세기 계몽주의의 토대이다. 19세기 자본주의/제국주의 시대에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 작업하는 인간), 즉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상을 바탕으로 일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의 미덕이 중시되었다. (아마 19세기에 한량이나 욜로족들은 천인공노할 아주 나쁜 족속들로 치부되지 않았을까. 좀 놀면 어때서.)


20세기의 인간상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다. 1938년 네덜란드 문화사회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을 주장했다. 핵심은 놀이가 노동을 위한 휴식이나 재충전의 수단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로 인간의 원초적 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놀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경쟁하는 행위라 주장이다. (내가 말하면서도 어렵다고 느낀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에 따르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놀이"에 운명과 목숨을 걸며, 놀이를 통해 명예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가 곧 문명을 만들었다고 한다. 간단히 이해를 돕자면 놀이는 곧 문화고, 문화는 곧 생활에 스며든다. 그래서 문화(놀이)가 시대를 만들고 문명을 만든다.

놀이를 다루지만 놀이처럼 볼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논다고 욕먹을때 이 책을 인용해봅시다!

인간의 놀이 = 문화의 원천

예를 들어 피라미드는 왜 만들었을까? 그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굳이 그 시대에, 그런 건축물이 인류에 필요했을까? 헌데 그 시절의 놀이가 명예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피라미드 건설도 일종의 놀이였을 것이다. 물론 계급이 아주 높은 왕이나 왕족의 놀이쯤 되겠다.


청자는 왜 만들었을까? 음식을 담는 그릇이 그냥 흰색이면 될 것을 굳이 코발트색을 입혀 청자를 만들어 낸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어쩌면 간단할지도 모른다. 예쁘니까. 도자기를 만들다가 이것저것 섞어보니 예뻤을지도 모른다. 결국 놀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하위징아는 인간의 문화가 놀이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했다. 경기(스포츠), 종교, 법률, 전쟁,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가 인간의 놀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이러한 행위에는 "자유로움" "일탈성(실제로부터 벗어난 것)" "시간과 공간의 제약", "절대적 질서의 존재"가 있다고 했다. 


놀이라는 것이 곧 인간의 삶의 요소와 일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지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전쟁이란 행위로 놀이는 진보가 아닌 퇴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현대사회는 어떨까. 과거 신분적 특권이었던 놀이가 이제는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놀이는 고작해야 퇴근 후 자유시간이다. 이러한 행위는 노동의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수단, 작업하는 인간(Homo Faber)을 잠시 망각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각박하고 여유롭지 않은, 재미와 자유가 없는 현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틀에 박힌 인생을 사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그간 놀이, 휴식, 유희라 생각했던 것이 진정한 것인지 잠시 생각게 한다.

만인의 마음속에 담긴말을 시원스레 하는 모습! 괜히 '대통령' 대우 받으신게 아닙니다.

출처뽀롱뽀롱 뽀로로 1기 오프닝 中

'호모 루덴스'를 원하는 청년세대

기성세대는 청년에게 끊임없이 경쟁과 치열함을 강요해왔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방식이 성공의 매뉴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의 토양이 변화한 지금 그들의 방식은 청년들에게 딱 맞는 옷은 아니다.


기성 세대가 생각하는 성공 척도 조직의 중역이 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라면, 이제 청년들의 성공 척도는 적당히 벌어 적당히 놀 줄 아는 ‘한량’인 것이다. 즉, 청년들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모 루덴스는 호모 사피언스나 호모 파베르와 같이 인간을 이성적이고 기계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놀이 행위를 통한 인간의 감정적인 특징을 강조하며 인간의 비합리성과 비생산적 행위를 설명한다. 


어쩌면 시대의 문화는 비합리성과 비생산적 행위라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청년들의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한량이 되겠다고 하는 비이성적인 생각이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포문일지 누가 알 수 있을까.


호모 루덴스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우리는 ‘유희’라는 인간의 본질을 진정으로 추구해야하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치열해지고 각박해지는 시대, ‘한량’의 꿈을 눈살 찌푸리게만 볼 것이 아니라 숨은 의미를 되짚어 볼 때다. 한량이 표면적으로 먹고 노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들의 유희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철학적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 외부 필진 서울청년정책LAB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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