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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만 있고 여자인 나는 없는 삶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해 나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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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영화 <B급 며느리>

영화 <B급 며느리>가 페미니즘 영화인지 묻는다면 단호히 아니라고 답하겠다. 물론, 주인공인 진영은 투쟁하는 며느리이고 그녀의 행보는 그 자체로 페미니즘적이다. 많은 관객은 그녀에게 공감하며 통쾌해했고 언론은 영화가 고부갈등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다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놓친 부분이 있다. 바로 고부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 주체가 왜 여전히 며느리로 등장하는지 고민하지 않은 점이다.

여자는 어째서 홀로 싸워야 하는가

출처영화 <B급 며느리>

싸움은 큰 에너지 소모를 동반한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남편인 호빈도 걱정할 일 없는 집안의 대소사로 인해 진영은 시댁과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갈등은 연애 시절, 진영을 임신해야 할 몸으로 간주한 시댁의 통제에서부터 시작됐다. 산후조리원에서도 계속되는 시어머니의 전화 세례에 진영은 출산 후 건강관리도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다.


고부갈등의 원인이 여성의 역할을 재생산 노동으로 제한하는 가부장적 사고에 있음을 고려하면 문제를 해결할 책임은 시댁의 일원인 남편에게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영화는 갈등 상황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호빈의 제스처는 불만을 호소하는 진영에게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서 얻는 게 뭐냐. 어머니한테 말고"라는 대꾸가 유일하다.


고부갈등으로 고통받는 며느리와 어찌할 줄 모르는 남편. 막장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이 같은 포지션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부장제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 간의 갈등으로 치환시킨다. 여성의 어려움만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는 이야기를 확장시키기 어렵다. 결국, 영화는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역할을 오직 아내, 며느리의 몫으로만 남겨둔다.


진영은 시어머니(경숙)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경숙은 며느리가 참석해야 하는 집안 대소사를 말할 때 남편과 아들, 손자의 생일은 언급해도 끝내 자신의 생일은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과연 누가 경숙을 영화 내내 화가 난 시어머니로 만든 걸까. 결혼 초반까지 시어머니가 재밌다고 말하던 진영은 어쩌다 그녀와 갈등하게 됐을까.


영화는 갈등의 본질을 뒤로한 채 남편을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처럼 표현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가 몇 번이고 서울과 대전, 아내와 엄마 사이를 오간 건 온전히 자신의 탓이다. 남편의 처신을 다룬 책이 없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 남편의 역할을 다룬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삭제된 ‘사람 김진영’

출처영화 <B급 며느리>

제목과 주인공만 며느리일 뿐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맡은 진영의 노고는 한 번도 다뤄지지 않는다. 이는 경숙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호빈의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가 호빈을 한 달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고도 실업급여 신청을 하는 가장으로 그릴 때 진영은 부모에게 손 벌리기 싫어하는 아내로 그려진다. 그녀 모르게 부모에게 돈을 빌렸다는 호빈의 내레이션이 덧입혀지면서 진영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여자’가 된다. 이처럼 남성의 일만 노동으로 셈하는 연출은 잘못된 성 역할을 견고히 할 뿐만 아니라 진영 씨를 이상한 며느리이자 철없는 아내로 대상화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진영의 주위는 남편과 아이, 시댁 식구들로 한정된다. "이 결혼 생활에 뛰어들기 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했던 사람이었는지. 그게 너무 나는 막 억울하고….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해 나는 정말.” 극 중 인터뷰에서 진영이 눈물을 쏟아내며 이토록 처절한 고백을 이어간 까닭은 자신이 오직 육아와 시댁과의 문제에만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이기 전에 딸로, 김진영 본인으로 존재했던 여성의 삶은 지금껏 고부갈등 이야기에서 거론되지 않던 종류였다. 사법고시 1차에도 합격했던 진영이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결혼하게 되자 본가에는 "진영 언니처럼 되면 안 된다"라는 말이 지령처럼 남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가족과의 관계를 비롯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고민할 여력이 없다. 여기에 여성의 삶을 남편과 시어머니의 관계로만 풀어내려는 감독의 빈약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덧대지면서 관객에게는 사람 김진은 지워지고 며느리 김진영만 남게 된다.

여자에게는 B급이라는 평가만이 남았다

출처영화 <B급 며느리>

영화는 진영이 스스로 시댁을 방문하면서 끝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을 때 비로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끝냈으면 좋으련만. 뒤이어 상영되는 에필로그는 영화의 전반적인 얘기를 조롱하고 만다. 에필로그 속 호빈과 경숙은 시어머니 보다 먼저 전화를 거는 둘째 며느리와 진영을 저울질한다. "(호빈) 지가 해? 아 근본이 다르구만 진영이랑", "(경숙) 얘는 A급이야 B급이 아니야. 진영이도 인제 A급 되겠지."


결국, <B급 며느리>에서 B급이란 가부장제가 여성을 평가하는 등급에 지나지 않았다. 1시간 20분 동안 고부갈등을 얘기했지만, 단 몇십 초짜리 에필로그로 영화가 가부장적 사고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증명한 꼴이었다.


'나의 불행을 팔아먹기로 했다. 나를 갈아 넣으면 멋진 다큐 하나 나오겠지?' 호빈의 입장에서 서술된 영화 줄거리다. 전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후자는 실패다. <B급 며느리>는 결코 멋진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고부갈등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은 결과물로, 이를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으로만 보는 오늘날 사회적 시선의 연장선일 뿐이다. 같은 주제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여성 감독이 찍었다면 어땠을까. 마지막까지 '만약 진영 씨가 영화를 만들었다면…'이라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 외부 필진 고함20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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