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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가요에 일제 찬양 가사 써 선전한 시인 윤해영

조회수 2018. 7. 18. 18: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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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는 한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이었다.
용정 비암산에 세워진 일송정 기념비. 그러나 가곡 ‘선구자’에 얽힌 진실은 좀 복잡하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윤해영 작사·조두남 작곡 ‘선구자’ 전문

가곡 ‘선구자’는 한때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으로 뽑힌 노래다. 해방 전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윤해영(1909~?)의 시에 조두남(1912~1984)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북간도 룽징(龍井)을 배경으로 망명 지사들의 삶과 꿈을 장중한 곡조로 형상화했다.


일송정(一松亭), 해란강(海蘭江)과 비암산(琵岩山), 용주사와 용문교, 용두레 우물… 이들은 모두 만주국 젠다오 성(間島省) 룽징의 자연과 지명들이다. 조국을 떠난 망명 지사들의 고단한 삶이 짧은 시 속에 함축돼 있으니 마디마다 식민지 시대의 풍경을 떠올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 노래가 1960년대 이후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이유다.  


70~8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 때 즐겨 불린 것은 이 노랫말에 깃들어 있는 식민지 시대 독립투사의 삶이 전해주는 비장미 덕분이기도 했다. 1963년 12월 3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송년음악회에서 불린 이래 기독교 중앙방송(CBS)의 시그널 음악으로 7년간 방송된 것도 1991년 룽징의 일송정에 시비가 건립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이 노래의 노랫말을 지은 윤해영은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가 소식이 끊겼다. 이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자 작곡가 조두남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이 노래에 극적 서사를 더했다.  


1932년 북간도 룽징(龍井)의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동포 청년이 은밀히 찾아와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는 밀사라고 하면서 시 한 편을 건네줬으며 한참 뒤에 자신이 곡을 붙이게 됐다. 그 뒤 청년은 독립운동 전선에서 희생됐는지 소식을 모른다. 


1909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난 윤해영이 유랑극단에서 일하던 작곡가 조두남과 교류한 것은 사실이었다. 윤해영은 만주국 룽징에서 살다 1940년대 초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으로 옮겨 1946년 6월까지 거주했다. 1940년 무렵 부인과 함께 닝안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시도 썼다고 전해진다.  

윤해영, 국민가요로 일제에 부역하다 

생산 증진에 관한 만주국의 포스터

교사를 그만둔 뒤 윤해영은 닝안현 협화회(協和會) 홍보과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다. 만주국 협화회는 1932년 7월 일본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 아래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설립된 조직이었다.


명분은 거창했지만,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실천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 교화적, 정치적 실천단체’를 표방한 협화회는 전국적인 민중 통제 조직이었다. 협화회는 각지에 분회를 조직해 만주국 지배체제 안으로 민중을 끌어들이면서 항일 민중운동에 대한 내부교란과 파괴 공작, 선전·선무공작, 전시동원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닝안현에 거주하던 시기에 윤해영은 조두남과 교류하면서 노랫말을 썼다. 일제 강점기에 그가 쓴 시와 가사는 20여 수라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만주 아리랑’(<재만 조선인 통신>, 1936. 01 01.), ‘오랑캐 고개’(<만주시인집>, 1939.4.), ‘해란강’(<만주시인집>, 1939.5.), ‘아리랑 만주’(<만선일보』 1941.1.1.), ‘발해 고지(古址)’(<만주시인집>, 1942), ‘사계’(<만주시인집>, 1942), ‘척토기(拓土記)’·’낙토(樂土) 만주’(<반도 사화와 낙토 만주>, 1943), ‘용정의 노래’(1944) 등 9편이다.  


이 가운데 ‘만주 아리랑’, ‘오랑캐 고개’, ‘아리랑 만주’, ‘낙토 만주’, ‘척토기’ 등이 친일시로 꼽힌다. 이들 노래는 만주국의 건국 정신인 오족(五族: 조선·중국·만주·몽고·일본)협화를 바탕으로 조선인이 앞장서서 낙토 만주를 건설하자는 내용이었다.  


재만 조선인 통신에 발표한 ‘만주 아리랑’은 만주를 풍요와 희망이 넘치는 신천지로 묘사하는 작품이다. 만주를 ‘희망의 신천지’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어진 작품 ‘아리랑 만주’나 ‘낙토 만주’ 등의 노래에서 되풀이된다.

젖줄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비었던 곡간에 오곡이 차고

잎담배 주머니에 쇳소리 나네.


보아라 동방에 이 밤에 새면

격양가 부르며 만사람 살리.


- ‘만주 아리랑’


재만 조선인 통신은 펑텐(奉天) 지역 조선인들의 사상을 통제하고자 펑텐 육군특무기관이 중심이 돼 조직한 친일단체인 흥아협회(興亞協會)의 기관지였다. 친일단체의 기관지에 발표한 시가 일제가 세운 괴뢰정부(만주국)의 본거지를 찬양한 것이었다. 

만주국 건국 5주년 기념 우표

1938년 4월 룽징에서 창작해 이듬해 <만주시인집>에 발표한 ‘오랑캐 고개’는 몽골의 건국신화에도 나오는, 과거 조선인들에게는 ‘한숨의 관문’이었고 밀수꾼들에게는 ‘공포의 관문’이었던 오랑캐 고개를 노래한 작품이다.


만주국 건국 이후에 그 오랑캐 고개에 오족협화를 상징하는 만주국기인 오색기가 나부끼고 젊은 일꾼들의 노랫소리가 울린다. 또, 두만강 나루터엔 다리가 놓이고 남쪽으로 넓은 길이 이어져서 “한숨도 공포도 다 흘러간 뒤 / 다만 희망의 기쁜 노래 부르며 부르며” 넘어가는 곳이 됐다는 내용이다.


‘아리랑 만주’는 <만선일보(滿鮮日報)> 신춘문예 당선 민요 1등으로 뽑힌 작품으로 만주 땅에 새로운 낙토를 개척해 풍년을 이루리라는 희망을 노래했다. 이 노래의 전제는 만주 땅이 새로운 유토피아, 낙토(樂土)이고, 조선인들은 개척자라는 것이었다.

만주는 낙토, 조선인은 개척자로 미화

흥안령(興安嶺) 마루에 서운(瑞雲)이 핀다.

사천만 오족의 새로운 낙토

얼럴럴 상사야 우리는 척사(拓士).

아리랑 만주가 이 땅이라네.


송화강 천 리에 얼음이 풀려

기름진 대지에 새봄이 온다.

얼럴럴 상사야 밭들야 갈자.

아리랑 만주가 이 땅이라네.


기곡제(祈穀祭) 북소리 가을도 깊어

기러기 환고향(還故鄕) 님 소식 가네.

얼럴럴 상사야 풍년이로다.

아리랑 만주가 이 땅이라네.


- ‘아리랑 만주’(<만선일보> 1941.01.01.)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 특별 출간한 <반도 사화와 낙토 만주>에 실린 ‘낙토 만주’에서는 조선인을 만주국의 터를 닦는 개척자이자 선구자로 묘사한다. 제국주의에 포섭돼 식민지 개척의 첨병 역할을 하는 재만 조선인을 미화하는 것이다.

오색기 너울너울 낙토 만주 부른다. 

백만의 척사(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 

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중략)


끝없는 지평선에 오곡금파 금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흥겨워. 

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

한 천년 세월 후에 천야만야 빛나리. 


- ‘낙토 만주’

저들의 만주 개척을 찬양하는 ‘낙토 만주’는 만주국 당국자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작품이었다. 만주국은 이 작품을 노래로 만들어 각지 흥농합작사를 통해 가창대가 마을을 순회하면서 보급하게 했다.


같은 책에 실린 ‘척토기’도 만주 개척을 다룬 작품이다. 이 연시조 형식의 작품은 이상향 실현을 꿈꾸는 내용인데 여기서도 조선인은 만주 개척의 주역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나이는 성을 쌓고 부녀들은 흙을 날라

창세기 신화처럼 새 부락은 이뤄졌다.

아들딸 대대손손이 이 땅 위에 사오리.


- ‘척토기’ 중에서

1944년 1월 닝안현 닝안극장에서 열린 ‘윤해영 작사·조두남 작곡 신작 가요 발표회’에서 ‘목단강의 노래’, ‘아리랑 만주’, ‘룡정의 노래’가 연주됐다. ‘룡정의 노래’는 뒷날 한국에서 제목과 가사가 고쳐져 ‘선구자’로 불린 노래다.


‘선구자’ 2절에서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는 원래 “눈물 젖은 보따리”였고 3절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도 원곡에선 “흘러온 신세”였다. 이국에서의 고달픈 삶을 다룬 ‘룡정의 노래’가 독립의 꿈을 비장하게 노래한 ‘선구자’로 바꾼 것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작곡가 조두남이었다. 

조두남, ‘룡정의 노래’를 ‘선구자’로 분식

1943년부터 징병제를 찬양하고 낙토 만주와 오족협화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군가풍 국민가요를 만들어 보급했던 조두남이 작사, 작곡의 경위를 왜곡한 것이었다. 윤해영, 조두남과 함께 활동했던 재만(在滿) 음악인 김종화의 증언으로 진실이 밝혀진 것이다.


‘룡정의 노래’는 1944년 1월 윤해영이 작사한 가사에 조두남이 곡을 붙여 발표한 것으로 선구자와 가사 내용은 물론 창작 시기와 동기도 조두남의 주장과는 달랐다. 조두남은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경위를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교묘하게 감추려 했는지도 모른다. 


1945년 닝안에서 해방을 맞은 윤해영은 만주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변화된 시대 상황에 즉각 적응했다. 그는 닝안의 인민민주대동맹 선전문화부에서 발행하는 잡지 <효종(曉鐘)>을 주관하는 한편, 신안촌의 조선인 문화공작단의 지도와 감독을 맡았다. 해방 이전에 일제의 오족협화에 복무하던 윤해영은 어느덧 사회주의에 복무하는 인민 예술가로 변신해 있었다.  

출처: 통일뉴스
간도 용정의 용두레 우물. ‘선구자’에도 등장하는 용정을 상징하는 곳이다.

작품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 목단강민주동맹의 기관지인 인민신보(人民新報)와 잡지 <건설>, <효종> 등에 ‘동북인민행진곡’(김종화 작곡), ‘동북인민자위군 송가’(김종화 작곡), ‘조선인부대의 노래’(작곡자 미상). ‘해 저문 마을’(김종화 작곡)을 작사했으며 시조 ‘해림음(海林吟)’과 산문 ‘아주까리 등불’·’동북자치 순사자의 영령을 추도함’ 등 30여 편을 썼다.


‘동북인민행진곡’은 1945년 11월 고려악극단의 첫 창작극 공연에서 ‘동북인민자위군 송가’와 ‘조선인부대의 노래’는 같은 해 12월 고려극단의 두 번째 공연에서 신곡으로 발표됐다. 윤해영은 중국 내 친일파 처단이 격렬해지자 1946년 7월 닝안을 떠나 북한으로 이주했다.  


북한에서 토지개혁정책을 찬양하는 노래인 ‘분여(分與) 받은 땅’을 비롯한 북한을 찬양하는 몇몇 노래의 가사를 썼다는 소식을 끝으로 그는 종적이 끊기었다. 북한에서는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 불가능했던가 그는 1956년 또는 1957년 무렵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해영은 국내 문단에 널리 알려진 시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가 정책적으로 점령해 지배하고 있는 만주에서 그들의 오족협화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룡정의 노래’를 ‘선구자’로 바꾼 이는 조두남이었다. 그러나 기실 윤해영에게 ‘선구자’란 일제의 의도대로 ‘낙토 만주’를 건설하는 개척자, 즉 일제의 침략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친일 부역자를 이르는 것이었다. 만주에서 장군멍군으로 일제에 협력해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두 사람도 자신들의 친일 부역 사실을 최소한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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