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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조지 오웰이 내전 난 스페인으로 달려간 까닭

조회수 2018. 7. 17. 14: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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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인 이들은 전쟁의 참상을 낱낱이 기록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병사가 총에 맞는 순간을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의 렌즈가 포착했다.

‘반파시즘 연합전선’ 스페인 내전 발발하다

1936년 7월 17일 프랑코 장군이 지휘하는 모로코 주둔군이 스페인 제2공화국의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하는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파시즘과 반파시즘이 격돌한 스페인 내전(The Battle for Spain)이 시작됐다.


스페인 내전은 특정 국가 안에서 발생한 내전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정치 사회적 모든 이념이 집중돼 혼전을 일으킨 전쟁이었다. 유럽 각국과 정치 세력은 저마다의 이해를 기초로 반란군과 공화파를 각각 지지했으므로 내전은 마치 국제 대리전의 성격처럼 진행됐다.

1931년, 왕정 63년 만에 제2공화국 출범

스페인 내전은 오랫동안 이어진 국내 정치적 혼란과 함께 국제 정치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그것은 멀리는 19세기 이래의 스페인의 역사, 왕정과 공화정에 대한 계층별 지지와도 이어져 있었다.


왕정체제의 스페인은 정치적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면서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경제정책의 실패로 막대한 재정을 낭비했다. 이에 경제적 빈곤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지면서 군중들은 스페인 왕정의 부패와 독재정권 타도를 요구했다. 


1931년 4월 12일 지방선거에서 왕정을 반대하고 공화정을 지지했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했다. 공화파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농지개혁 등의 정책을 내걸고 중산계급·노동자·농민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선거 결과 왕정을 이끌었던 국왕 알폰소 13세가 권좌에서 물러나 스페인을 떠나게 됐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됐다. 그것은 1868년 제1공화국이 들어섰다가 다시 왕정으로 돌아간 뒤 무려 63년 만이었다. 


알칼라 사모라(Alcalá-Zamora)가 총리로 취임해 스페인은 근대적 정치체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왕정을 지지하는 세력과 군부 그리고 교회의 반발이 깊어지면서 갈등은 내연하고 있었다. 


공화파 스페인 정부는 학교에서 종교수업을 폐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회와 정치를 분리했고 군제를 개편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폐쇄했다. 그러나 이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서 오히려 교회 성직자들과 군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금융가의 파산 등 세계불황의 여파로 스페인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주력산업인 농업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정부를 지지했던 농민과 노동자의 파업이 이어졌다. 공화국 내부에서는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갈등이 증폭됐다. 

1936년, 스페인 공화파 ‘인민전선’ 형성

러시아의 영향으로 볼셰비키화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총파업을 주도하며 정국을 사회주의 강경 노선으로 이끌었다. 1936년 스페인 사회주의자들은 연합해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형성했으며 그해 총선에서 승리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한편, 왕당파(알폰스주의자)와 군부 중심의 보수세력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점차 정치적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면서 정국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은 군부세력은 왕당파와 우익 보수세력과 교회, 대지주와 대자본의 지지를 얻었으며 군사적 행동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1936년 7월 13일 우익 정치지도자였던 칼보 소텔로(Calvo-Sotelo)가 공화파 경찰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 진영(Nationalists)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36년 7월 17일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은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인민전선은 스페인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땅을 소유한 교회의 재산몰수, 예수회 추방 등의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스페인의 특권계급인 군벌, 로마 가톨릭교회, 지주, 마름 등이 군사반란에 가담한 것은 이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프랑코 군 지역에서는 공화국 반대세력이 크게 확산했고 교회도 프랑코 군을 ‘신 십자군’으로 지지했다. 공화국 측에서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결성된 시민군이 방위의 주력이 됐다. 9월 4일 사회주의자 등 좌파세력이 연합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사회당 좌파의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Francisco Largo Caballero 1869~1946)가 수상이 됐다.

히틀러와 만난 프랑코. 반란군은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으로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독일·이탈리아·포르투갈은 프랑코 군을 원조했고 파시즘이 못마땅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불간섭을 표방했지만, 공화국에 물자로 지원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항해 소련은 병기를,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국제의용군을 지원해 스페인 공화국(정부군)을 도왔다.

특권계급의 반란, 스페인 내전 시작

쿠데타의 징후를 포착했으나 이를 사전 차단하지는 못한 공화국 군대는 초동 진압에 실패함으로써 반란군에게 군사적 우위를 내어줘야 했다. 공화국군은 의기는 높았으나 결속력이 떨어졌다. 지역별로 독자적인 전투를 벌이다 괴멸하거나 전투 도중에도 혁명노선에 대한 견해차로 인민전선 내부에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폭격 나흘 후인 1937년 5월 1일 게르니카에 진주한 프랑코 군 병사들이 폭격의 잔해와 시신을 치우고 있다.

무엇보다도 군부의 지도력이 취약했다. 내전 발발 당시 정규군 고급장교의 60% 이상이 쿠데타군에 가담하면서 병력과 장비, 물자를 운용해 전쟁을 끌고 갈 지도력의 공백도 컸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수송기를 지원받은 프랑코의 정예병력이 본토에 상륙하면서 급속 진격하자 반란군이 지배하던 영토가 하나로 이어지게 됐다.


반면, 공화 정부군은 혼란에 빠져서 한때 수도인 마드리드의 일부 지역까지 반란군에게 내줬다. 그러나 소련에서 들여온 전차 등의 무기와 해외에서 몰려온 국제 여단의 분투로 간신히 프랑코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스페인 공화국의 정부는 마비 상태였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으로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는 군사반란만큼이나 무장한 노동자 군대를 두렵게 느꼈기 때문에 반란군의 손에 희생당하는 그들을 방관하였다. 항구에는 정부의 군함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결과 반란군은 스페인 전역을 점령하였고 결과적으로 정부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내전이 서서히 고착화되면서 반란군의 프랑코가 점차 내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프랑코는 1937년 교권 정치 부활을 주장하는 카를로스 당과 협동 국가를 내세우는 팔랑헤(Phalange) 당을 통합해 전선 배후의 지배를 확립했다.


1939년 1월 26일 프랑코 군은 바르셀로나를 점령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곧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다. 3월 23일에는 마드리드에서 프랑코 군과의 화평을 요구하는 반공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28일 프랑코 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써 내전은 끝나고 프랑코 체제가 성립하게 됐다.

국제 여단에 지원해 프랑코 군과 싸운 병사들 가운데 유명 지식인도 끼어 있었다.
오직 반파시즘으로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 내전으로 달려온 지원병들. 53개 국가 3만 명에 이르렀다.

내전은 마침내 프랑코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의 ‘민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모여든 의용병의 존재는 이 전쟁이 반파시즘 연합전선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아나키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극좌파,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념을 가진 이들은 국제 여단이라 불리는 파시즘 저지의 첨병이었다.

제2차 대전 부른 공화파의 패배

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0,000명의 국제 여단은 내전 동안 헌신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파시스트 군대를 저지해냈다. 미국인 의용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으로 캐나다 의용군은 매켄지-파피뉴 여단으로 불렸다.


당시 국제 여단의 자원병으로 참여한 이 가운데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와 조지 오웰 같은 지식인도 상당수 있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무정부주의 조직의 민병대 소속으로 참전했고 귀국 후 그 경험을 <카탈루냐 찬가>에 남겼다. 


헤밍웨이는 미국의 50개 주요 일간지 발행사들로 구성된 북미신문연맹의 종군기자 자격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면서 파시스트에 반대해 게릴라로도 활동했다. 그의 장편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파리의 일간지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작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는 그 전쟁의 상처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내전은 전쟁이 아니라 병(病)이다. 적(敵)이 내 안에 있고, 사람들은 거의 자기 자신과 싸운다.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를 쓴 소설가

국제 여단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프랑코의 승리로 끝난 스페인 내전에 대한 카뮈의 지적은 씁쓸하고 아프다.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용기를 내도 용기에 대한 급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로 스페인에서.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이방인>을 쓴 소설가

50만 명 이상이 죽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반대세력에 무자비한 숙청과 보복을 벌였다. 총통이 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38년간 독재자로 군림했고 그가 죽은 뒤 스페인은 왕정으로 되돌아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스페인이 군사독재정권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걸린 시간은 수십 년이었다.


스페인 내전은 ‘러시아 혁명’, ‘제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20세기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규정된다. 스페인 내전으로 대두된 파시즘의 위협을 간과했던 인류는 곧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치러야 했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명백한 징후였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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