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재기해" 구호를 바라보는 첨예한 시선

조회수 2018. 7. 12.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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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륜? 아니면 충분히 외칠 수 있는 구호?
출처: 한겨레

지난 7월 7일 혜화역 집회 이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논쟁들 속에서 든 생각난 건 하나의 ‘긴 질문’이었다.


논쟁 구도를 거칠게 정리해보자. 웜(워마드) 계열과 안티 페미를 제외하고 그 중간에 끼인 이들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재기해”, “태일해” 같은 언어들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며 비록 분노와 맥락은 이해하지만, 도가 지나치다고 비판하는 입장이다. 이에 대비해 도가 지나친 건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맥락과 감정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 두 입장은 웜과 안티 페미 ‘중간’에 서서 중요한 두 전제(맥락의 이해가 중요하다, 그리고 방식은 문제가 있다)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두 전제 중 어디에 방점을 찍는가가 다르며 나는 이 점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늘 헷갈린다. 저 두 전제는 어느 정도 상충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각기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긴 질문이라 표현한 이유 역시, 나 스스로가 두 모순된 전제 사이의 흔들림 속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맥락을 봐야 한다는 주장에 심히 공감한다. 외견상 드러나는 폭력적이고 거친 모습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건 일종의 인식적 폭력이다. 가령 궁중족발 사장님이 살인미수라는 폭력을 저지른 것을 모두가 안다. 하지만 다수가 그를 비난하기보단 오히려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데 이는 맥락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특히, 역사 속에서 대중운동은 늘 정제되지 않은 언어와 행동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런 외양을 걷어내고 맥락을 바라보면 그들의 정서와 경험에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2015년에 태어난 ‘메갈리아’라는 이름과 그 후 여성들의 분출에 대한 섣부른 비난은 분명 경계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적어도 2016년의 강남역 이후 2년이 지났다. 이 2년간의 시간 동안 워마드나 터프(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의 흐름은 훨씬 단단해지고 그 외연이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계속 논쟁이 불거졌다. 게이와 트랜스에 대한 입장에서부터 현재의 예민 난민에 이르기까지. 이 난민 이슈에서는 동세대 여성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고 있으며 5월에 시작된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집회는 이제 6만 명이 모였다. 이 흐름이 조직된 동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도 장관과 대통령이 화답할 정도로.


물론, 여전히 정당한 주장과 부당한 흠결을 구분하지 않는 안티 페미니즘이 강고하다. 아니, 여성들이 강해진 만큼 더 거세졌다. 이것은 일단 반사적으로 웜 조류의 목소리를 방어하도록 만든다. 이를 ‘제1의 전선’이라고 해보자. 이 전선에서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나는 청년세대 남성들에 대해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이건 차치하고.) 하지만 웜, 터프의 주장과 행동이 문제적인 경우가 많아 제1의 전선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특히, 안티 페미로부터는 공격의 빌미가 돼 운동의 윤리적 정당성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웜 계열과도 논쟁이 필요해지는데 이것을 ‘제2의 전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잠시 딴 얘기를 하나 해보고 싶다. 이름도 기억 못 하고 딱 한 번 들어간 청강 수업에서 마주친 사람에 대한 얘기다. 아마 발달 장애가 있는 분이라 알고 있다. 대화도 해본 적 없지만, 워낙 얘기는 여러 번 들었다. 이따금 학교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가 만난 지인들과의 수다가 시작 중에 그에 대한 얘기가 몇 번 흘러나왔다.


그는 강의 시간에 계속 교수에게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의 내용은 대부분 강의 맥락과 동떨어진 얘기다. 그에 답변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강의 진도는 안 나간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여러 학생이 뒤에서 짜증 내거나 혹은 숙덕거리면서 비웃곤 했다. 심지어 어떤 교수는 그를 비하하는 식으로 농담하면서 그의 질문을 적당히 넘겨버리곤 했다. 그는 언젠가 한 번 강의 시간에, 이렇게 질문하는 걸 다들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자신은 궁금증이 들면 상관없는 주제라도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해 들은 이야기인지라 정확한 진실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약간의 희화화 혹은 조롱기가 담긴 목소리로 강의실의 이런 풍경을 수다 삼아 내게 전해준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화를 냈다. 소수자에 대한 공감이니 연대니 말하지만, 정작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어쩜 그리 무례할 수가 있냐고.

강의 시간에 계속 주제와 무관한 질문을 하면 당연히 짜증 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지적 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학생들은 그에게 직접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고 짜증 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지닌 약간의 장애 때문에 뒤에서 숙덕거리는 방식으로 짜증을 표출했을 게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던 셈이다. 물론, 그는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걸 느끼고 있었을 거고.


장애가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면, 그래서 장애여부와 무관하게 사람이 동등하다고 믿는다면, 나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그에게 직접 표현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 관계에서는 언제나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쉽게 발생한다. 문제는 그것을 직접 표현하지 못한 채 비겁하게 뒤에서 말하는 방식이다. 비록 그가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짜증을 표현하고 이해시키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그가 자신의 맥락을 설명하려 한다면 그것도 들으면 되고 그러면서 오해가 있었다면 풀면 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그건 사실상 암묵적인 차별과 배제일 것이다. 


내가 이 에피소드로부터 배운 교훈은 소수자나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소수자니까, 굳이 무어라 지적하기보다는 그냥 넘어가자는 태도가 어쩌면 상대를 두 번 죽이는 차별일 수 있다. 미성숙하니까 혹은 저렇게 분노할 만한 맥락이 있으니까 넘어가자는 건 오히려 그를 동등하지 않게 대우하는 우를 범하는 것일지 모른다.

문재인 재기하라고 혹은 그 이상으로 반인권적이고 반페미니즘적인 발언과 행위들을 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분노하고 떠드는 맥락은 충분히 이해되고 수용돼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태도를 비판해서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상충돼 보이는 두 전제가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착한 포지션’을 고집하는 것이, 역으로 그들을 충분히 대화하고 비판할 수 있는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위치의 차이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김부겸 장관은 자신의 위치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훌륭하게 보여줬다. 그들은 비판이 아니라 듣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약자들의 목소리 앞에서 취해야 할 자세다. 허나 적어도 제1의 전선에서 페미니즘을 옹호하고 지지했던 동세대라면 조심스럽더라도 충분히 비판하고 대화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화를 주저한 채 침묵한다면 그건 소수자를 영원히 이해받을 수 없고 대화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연대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고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장대비 가운데 함께 진흙탕을 뒹굴며 서로의 맨얼굴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상대를 온전히 ‘사람’으로 수용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2년 전의 강남역 때와는 달리 6만 명이나 집회에 참여하는 이 시점에 이젠 여성들이 약소하나마 ‘정치적 시민권’을 얻었다고, 그래서 더 이상 이해하기만 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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