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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지금 보면 한없이 구린 이 영화

“이제 좀... 꺼져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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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에 개봉했던 영화 <건축학개론>은 흥행했다. 배우, OST부터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카피 문구까지 모조리 유명세에 올랐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그려내는 첫사랑의 추억이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개봉일로부터 6년이 넘게 지난 지금, 영화가 '국민 첫사랑'으로 만들었던 서연(배수지)의 눈으로 이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본다면, 이 영화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보기가 조금 어려워질 것이다.

성폭력 당하고 X년이 된 여자

영화의 소재는 승민(이제훈)과 서연의 첫사랑이다. 지금이었다면 ‘음대 여신’으로 불렸을 서연이 승민의 전공 수업인 건축학개론을 수강하며 두 사람은 처음 만난다. 첫 만남 이후 두 사람 사이 첫사랑의 감정은 천천히 선명해진다.


승민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이 첫사랑의 장면들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만약 영화가 서연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설레고 아름답기만 할 수 있었을까.

출처영화 <건축학개론>

잘생기고 돈 많고 인기도 많았던 재욱(유연석)이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서연은 술자리에 오지 않는 승민을 기다리던 중 재욱과 마주친다. 그는 고사하는 서연에게 재차 술을 권한다. 결국 만취한 서연은 재욱의 차에 탄 채 승민이 기다리고 있는 자취방 앞에 도착한다.


재욱은 서연을 부축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 서연에게 입맞춤을 시도하지만 서연은 고개를 돌린다. 숨어서 이 광경을 모두 목격한 승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방 문 앞에 바싹 귀를 댄다. 영화의 장르가 멜로에서 스릴러로 바뀌는 순간이다. 


다음 장면, 잔뜩 상처받은 얼굴을 한 승민.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조정석)가 승민을 위로한다. 승민은 서연에게 배신 내지 '어장관리'를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승민을 위로한답시고 친구는 서연을 가지거나 안 가질 물건 정도로 표현한다.

어우 X년 진짜, 개X같은 년! 야 다 잊어! 그런 X년은 줘도 안 가져!

출처영화 <건축학개론>

‘국민 X년’이 아니라 피해자입니다

사실 서연에게 일어났던 일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흔하고 흔한 성폭력이었다. 재욱은 서연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심지어 서연을 심신미약 상태로 만들고 나서 성적 접촉을 시도했다. 상대를 심신상실, 항거불능의 상태에 처하게 한 후 성적 접촉을 강제하는 것은 형법상 준강제추행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위기의 광경을 목격한 승민은 돈 많고 집안 좋은 학교 선배인 가해자 재욱에게 분노하지도, 맞서지도, 그를 고발하지도 않는다. 대신 승민은 서연을 원망한다. 만취한 상태에서 강제로 들이밀어지는 입맞춤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유로 서연은 한순간에 "X년"이 된다. 


영화는 이 사건을 범죄가 아니라 배신으로 해석한다. 그 해석에 맞추어 서연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된다.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가 보는 앞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바람에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는, 차마 말로 하기 민망할 정도로 우스운 죄목이다. 


서연은 많은 관객들에게 '국민 첫사랑'인 동시에 ‘국민 X년’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것은 결코 정당한 칭호가 아니고, 그녀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육두문자를 뱉던 승민의 얼굴은 그래서 유치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다.

출처영화 <건축학개론>

서연이 재욱과의 사건을 마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모습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는 승민이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간 드림 하우스 모형을 십수 년 동안 보관하고, 싸늘한 얼굴로 꺼지라고 말하는 그와의 약속을 위해 첫눈 오는 날 빈집에 찾아간다. 그녀는 마치 스스로의 잘못을 아는 죄인처럼 승민의 분노를 얌전하게 받아내기만 한다.


심지어 영화는 끝내 서연의 입에서 “네가 내 첫사랑이었”다는 고백을 이끌어낸다. 서연이 겪은 폭력들은 ‘사랑하니까 감내했던 일’로 뿌옇게 채색되어버린다. 


서연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장에서 되짚어보지 못했던 폭력의 기억은 단숨에 ‘첫사랑의 아픈 추억’ (내지는 오해) 정도로 남는다. 승민의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서연의 상처와 피해는 쉽게 동원되고 쉽게 잊힌다.

뭔가 이상한 여자 캐릭터들

영화 속 다른 여성 캐릭터들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서연은 물론 "보고 있으면 예뻐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는 이유로 싱숭이, 생숭이로만 불리는 두 여학생을 포함해 승민의 초라한 어머니까지 그렇다.


사실 그들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캐릭터인데, 너무 전형적일 뿐 아니라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들 같지 않다. 아들의 어머니, 남성의 연애 상대라는 고전적인 성역할을 제외하면, 이 여성들이 이야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출처영화 <건축학개론>

유일하게 자기 욕망과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여성 캐릭터는 승민의 약혼녀(고준희)인데, 그녀는 남녀 주인공 사이에 끼어드는 흔한 악녀의 포지션에 놓인다. 말하자면 <건축학개론>의 여성들은 남성의 욕망을 위해서만 행동할지, 혹은 스스로의 욕망을 추구하고 악당이 될지의 기로에 선다.

이 영화의 흥행이 부끄럽다

<건축학개론>은 2012년 5월 14일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 400만 명을 돌파했다. 역대 멜로 로맨스 장르의 한국 영화 개봉작 가운데에서 단연 발군의 성적이다. 이 호응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남성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지 단면적으로나마 보여준다. 여성을 사람처럼 묘사하는 데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대중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제 좀 꺼져줄래..?"라는 대사는 이제 영화를 향해 하도록 하자.

출처영화 <건축학개론>

적어도 2018년이라면 이 폭력의 이야기를 서툴렀던 첫사랑의 기억으로 미화하게 두어선 안 되겠다. 지금은 사랑해서 때렸다느니, 연애관계였기 때문에 그건 성폭력이 아니었다느니 하는, 폭력을 사랑의 탓으로 돌리는 남성들의 자기연민을 받아주는 시대도 아니다.


이제 우리에겐 <건축학개론>보다 나은 첫사랑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

* 외부 필진 고함20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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