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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누명 쓰고 사형당한 귀순자 이수근

북한에서 그는 김일성 수행 기자로 활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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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근, 위장 간첩으로 처형되다

이수근의 구속기소와 사형선고, 사형집행을 전하는 경향신문 기사들(왼쪽부터)

1969년 7월 3일 이태 전에 판문점 북측 지역을 극적으로 탈출해 귀순했던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1924~1969)이 위장 귀순 간첩 혐의로 선고받은 사형이 집행돼 마흔다섯의 나이로 곡절 많은 삶을 마감했다.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40여 발에 이르는 북한 경비병의 총탄을 피해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을 때 그는 영웅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동토의 공화국을 탈출해 마침내 자유를 쟁취한 영웅의 앞길은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불과 이태 만인 1969년 1월 위조여권을 이용해 캄보디아로 향하다가 베트남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체포돼 한국으로 강제 압송됐다. 그해 5월 이수근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불과 2년 만에 그는 영웅에서 위장 간첩으로 전락했고 자유의 이름으로 동포를 기만한 간교한 스파이로 지탄받았다.  


1967년 3월 22일 오후 5시 40분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의 판문점 엑소더스는 가히 한 편의 드라마였다. 판문점에서 제242차 군사정전위가 끝난 뒤 이수근은 회의장 앞에 서 있던 UN군 대표 밴 크러프트 준장의 승용차에 뛰어들었다.  


그의 탈출을 알아챈 2명의 북한군 경비병이 차 뒷좌석에 숨은 그를 끌어내리려 했으나 유엔군 작전 장교 베어 대위가 이들을 때려뉘었다. 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북한 경비초소를 통과해 북한군이 쏘아대는 40여 발의 총탄을 뚫고 남측 지역에 안착했다. 

판문점에서 정전위가 끝난 뒤 이수근은 회의장 앞의 UN군 대표 밴 크러프트 준장의 승용차에 뛰어들었다.

김일성 수행기자 출신의 이수근은 북한에서 기자로 승승장구했지만,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북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남한으로 귀순을 선택한 것이었다. 당시 제5대 대선(1963)에서 고작 15만여 표로 승리한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과 한일협정 등으로 정치적 곤경에 처해 있었다.


5월에 6대 대선을 앞두고 있었던 박정희 정권에 북한 언론계 고위 간부의 귀순은 대단한 호재일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북한 고위직을 지낸 지식인 이수근을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남한의 체제 우위를 선전하는 도구로 쓰고자 했다. 

판문점 정전위 뒤에 극적으로 남쪽으로 탈출한 이수근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북한 고위직 언론인의 귀순은 박정희 정권에는 호재였다. 그의 귀순환영대회에 몰린 인파

출처서울아카이브

남한에서 온 국민의 환영을 받은 뒤 결혼하고 반공 강연을 이어가던 그와 중앙정보부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원했던 자유로운 생활 대신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마찰이 계속되자 그는 회의에 빠졌다. 

이수근의 두 차례 엑소더스

이수근은 처조카인 배경옥(당시 29세)과 함께 1969년 1월 27일 태국을 목적지로 김포공항에서 홍콩으로 출국했다. 그들은 도쿄, 타이페이를 거쳐 홍콩에 도착해 이틀간 머물다가 캄보디아로 목적지를 변경하고 프놈펜행 비행기를 타려고 홍콩 공항에 나갔다.


대기하던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공항에서 이들을 체포하려 하면서 격투가 벌어져 홍콩 경찰이 이들을 연행했다. 이수근이 정치적 망명과 캄보디아행을 주장하자 홍콩 경찰은 1월 31일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가는 비행기 편으로 이수근 일행을 출국시켰다.  


이수근의 망명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비행기가 베트남 탄손누트 공항을 경유하던 중 이수근 일행은 기내에 들어온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돼 한국공군기 편으로 한국으로 압송됐다. 자유를 향한 이수근의 두 번에 걸친 탈출은 결국 실패한 것이었다. 


1969년 2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언론에 ‘위장 귀순한 이중간첩을 체포했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공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중정은 그가 귀순한 이후 ‘김일성을 비난하는 논지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등 많은 의문점을 드러내어’ 위장 귀순 문제를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내사를 계속했다. 그 결과 이번 국외 탈출을 적발해 그를 국내로 압송해 왔다는 것이었다. 


중정은 이수근이 북한노동당 대남사업 총국장에게서 ‘적화통일이 될 때까지 장기 잠복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순했으나 정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 처조카를 포섭해 월북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이수근과 처조카 배경옥 등 7명을 기소하면서 이씨가 김일성 앞으로 보내는 암호문을 작성한 혐의를 추가했다. 그러나 이수근의 혐의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었던 암호문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자유를 찾아 귀순했다가 결국 이중간첩으로 몰려 법정에 선 이수근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수근의 선고 공판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심 뒤 항소 포기하자 바로 사형 집행

1969년 5월 10일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는 이수근과 배경옥에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이 사건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처리됐고 1심 판결이 나온 지 채 두 달도 안 된 7월 3일 이수근의 사형이 집행됐다.


위장 간첩 이수근에게는 세 번 재판받을 권리, 즉 삼심제도 허용되지 않았다. 비록 그가 항소를 포기했다고 하지만 공범들의 2심이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는 1심 재판만으로 처형됐다. 배경옥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고해 12월 23일 대법원판결로 형이 확정됐다. 


2007년 1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수근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이수근이 중정의 지나친 감시 및 재북 가족의 안위에 대한 염려 등으로 한국을 출국하자 중정이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조작, 처형해 귀순자의 생명권을 박탈한 비인도적·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2008년 12월 서울고법은 배경옥이 청구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이 40년 만에 ‘이수근 위장 간첩 사건’이 국가에 의한 사법 살인이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무고한 이수근은 죽임을 당했고 구속 당시 29살이었던 배경옥은 20년을 복역하고 1989년 12월에 쉰이 다 돼 석방됐다. 

이수근의 처조카 배경옥 씨가 대검 앞에서 이수근 재심 청구를 위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출처한겨레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주범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었다. 이수근이 중립국으로 망명해 남북한 체제를 동시에 비판하는 책을 내고 이를 통해 북한의 가족들을 데려올 계획이라는 걸 중정 수사 과정에서 알게 된 김형욱은 경악했다. 이수근의 계획이 자신의 자리에 대한 치명적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김형욱은 그를 이중간첩으로 둔갑시켜 위기를 돌파했다.


이수근은 수사 과정에서 인격 모독적인 대우를 여러 차례 받았는데 과거사위는 수사관이 이수근을 위협하면서 그의 발을 향해 권총을 쏘기도 했다는 사실도 기록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배경옥은 알몸으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각본대로 진술해 간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20년 동안 복역한 배경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 출소했지만 반년 만에 결혼을 앞두던 큰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감당해야 했다. 가족들에게 낙인찍힌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에는 그처럼 질기고 끔찍한 것이었다.


배경옥이 이모부 이수근의 재심을 청구하자 법원은 그에게 재심청구권이 없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지난해 9월 대검찰청 공안부는 이수근 위장 간첩 조작사건 등 권위주의 정부 시기의 인권침해 사건 관련자에 대해 직접 재심을 청구하기로 했다. 공범들이 무죄를 선고받았는데도 유족이 없어 재심청구를 못 한 경우 형평성 차원에서 검찰이 재심을 청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수근이 묻혀 있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 서울구치소 공동묘지

출처한겨레

사형집행 뒤 이수근의 유해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 서울구치소 공동묘지에 다른 사망 수용자 270여 구와 함께 합장돼 있다. 그 무덤의 돌비에 물론 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합장지묘’라고 새겨진 돌비가 분단의 상처를 말없이 감추고 있을 뿐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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