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는 성교하되 책임 안 지는 것"이라고?

조회수 2018. 5. 29. 10: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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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 오늘 되게 기분 좋은 일이 있었어. 수요일 저녁마다 영어회화 과외를 하고 있는데, 지난주에 못 뵌 과외 학생분이 스승의 날 선물이라며 선물을 주셨어. 예전에 수업 때 마음에 남는 글귀나 시가 있으면 노트에 필사한다고 말했었는데 그 말을 기억하시고는 예쁜 노트를 건네주셨어. 짱이지? 자랑 맞아.


되게 기분 좋게 수업을 끝내고 핸드폰을 켰는데, 트위터 피드에 너 이름이 들어간 기사가 있더라. ‘법무부 “낙태죄 폐지? 성교하되 책임 안 지겠다는 것”.’ 당연히 낚시성 뉴스겠거니 했어. 왜, 트위터에 그런 거 되게 많잖아. 십 년 이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이번에 터진 일인 양 포장해서 괜히 사람들 분노만 조장하는. 기사 제목이 좀 자극적이어야지~ 링크도 안 누르고 쓰루했는데 사람들이 자꾸 너 욕을 하는 거야. 

출처: 노컷뉴스
그날의 뉴스 헤드라인.

뭐지 싶어서 봤는데 멀쩡한 언론사에서 오늘 낸 기사더라고. 낙태죄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이 있을 예정이라 네가 헌재에 낙태죄 폐지 반대를 주장하는 변론요지서를 보냈다며. 거기서 너 이런 문장을 썼더라.


“통상 임신은 남녀의 섹스에 의해 이뤄지는 것으로,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갖고 있다 할 것이므로 이에 따른 임신은 원치 않는 임신이라 보기는 어렵다.”

아, 정말 맞는 말이야. 임신은 남녀의 섹스에 의해 이뤄지지.


초등학교 때 받던 성교육을 떠올려봤어. 남자의 정자가 이렇게 움직여서 여자의 아기집에 들어가면 임신이 돼요. 그렇게 열 달을 엄마 뱃속에서 지내고 나면 여러분 같은 아기가 태어난답니다~! 그럼 남자 정자는 처음에 어떻게 여자 몸에 들어가요? 쌤들은 늘 그 부분은 빼고 말해주셨지만, 피스톤 운동이라는 말을 수업 때 들은 건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이 된 후였지만, 그래도 남녀가 섹스하면 아기가 생긴다는 건 초등학생 때부터 알았어. 


남녀가 섹스하면 임신이 될 수 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니까 사람들은 섹스할 때 콘돔이라는 걸 껴. 이걸 아니까 여자들은 배란일을 계산해가며 21일 동안 매일같이 경구피임약을 먹어. 이걸 아니까 여자들은 몇십만 원씩 내가며 임플라논이니 뭐니 루프 이식해서 피임 수술을 받기도 한다? 


근데, 섹스할 때 콘돔 빼자고 하는 남자들이 한 둘이어야지. 빼지 말자고 거부해도 몰래 빼는 좆같은 놈들 때문에 스텔씽(stealthing, 합의없는 피임기구 제거)이라는 말도 생겼어. 그래서 말인데 여자가 콘돔 빼자고 동의한 적도 없는데 남자가 몰래 빼서 임신이 되면 이건 낙태 수술을 해도 되는 경우야, 아니야? 이런 수준 이하의 질문을 하다니 기분 나쁘겠지만 그래도 그 기사만 읽고는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스텔씽에 의한 임신은 당연히 낙태죄 예외 사유로 인정하고 있는 거지? 스텔씽도 강간에 해당하는 거로 보고 있는 거지?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소중히 여기는 법무행정을 펼쳐 나가겠”다고 말한 네가 이 정도는 생각하고 그런 주장을 펼쳤다고 기대하는 게 합리적이잖아.

출처: 여성신문

그런 맥락에서 이어지는 궁금증은 이거야. 스텔씽도 강간의 일종으로 여긴다면 너는 강간죄의 성립요건에서 폭행 협박을 제외해야 한다는 말에도 동의하는 거겠네? 최협의설은 당연히 반대하고. 너도 알다시피 법원은 피해자의 항거가 불능할 정도로 폭행 협박이 있었거나, 필사의 저항이 있었어야 강간죄를 인정한다는 최협의설을 채택하고 있잖아. 너는 최협의설에 비판적이고, 나아가 강간죄의 성립요건에 폭행 협박을 빼서 기준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강간이 아닌 섹스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거라 믿어.


마지막 질문이야. 너는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성교”는 자의라고 했는데, 미성년자의 임신, 연인과 헤어진 후 발견한 임신, 별거 또는 이혼소송 중 발견한 현 남편의 아이, 이혼 후 발견한 전 남편의 아이 (조국이 2013년에 쓴 낙태 비범죄화론 논문에 명시된 사례를 인용) 같은 경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앞에 열거한 사례들은 현행법이 규정하고 있는 낙태죄 예외 사유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잖아. 이 경우는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성교에 의한 임신이므로 여자가 책임지고 출산한 뒤 양육해야 하는 경우야? 설마, 공정함과 정의를 수호하고 대변하는 네가 그런 경우까지 여성에게 부담을 지우려 들진 않겠지.

출처: 연합뉴스

나는 굳건히 믿어,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고 있다고. 너의 진의와 고민을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함부로 말하고 있다고! 그래서 기분이 정말 나빠. 너도 이런 오해를 받다니 기분 나쁘겠지? 얼른 해명해서 너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 답장 기다릴게~~~

* 외부 필진 곽경민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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