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김구·윤봉길이 깍듯이 존경했던 석오 이동녕 선생

조회수 2018. 3. 13. 13: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오늘은 석오 이동녕 선생의 서거 78주기다.
▲ 1940년 3월 13일 급성폐렴으로 순국한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 선생의 장례는 3월 17일 국장으로 치러졌다.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치장에서 스러지다

1940년 3월 13일 임시정부 17대 주석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이 쓰촨성(泗川城) 치장(綦江)에서 급성폐렴으로 순국했다.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한 지 서른 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 풍찬노숙한 세월 스물한 해, 그는 생애 네 번째로 내각 수반을 맡아 분투 중이었다.

이동녕은 구한말 독립협회에 가담해 구국운동을 전개한 이래 임종의 순간까지 독립 전선에 있었다. 그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이었고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1914)의 주역이었다. ‘무오독립선언’(1918)에 참여했고 1919년 상하이 임정 수립 때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었다. 11대(1925)와 13대(1929)에도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았다.

모두 7차례나 임정 수반이었던 석오 이동녕

그는 또 임시정부의 2대(1919)·11대(1924) 국무총리였고, 5대(1926)·7대(1926)의 국무령, 11대(1927)·12대(1930)·15대(1933)·16대(1935)·17대(1939)의 주석을 역임했다. 이는 백범 김구의 다섯 차례보다 더 많이 임정 수반을 지낸 것이다. 그러나 석오 이동녕의 지명도는 백범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이동녕은 충남 천안 출신이다. 열여섯에 일가가 서울로 이사해 종로에 정착했다. 1892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구국운동을 시작했다. 1897년 종로 만민공동회에서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했다가 이준, 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 진사시: 시(詩)와 부(賦)의 창작 능력을 겨뤄 진사를 뽑는 시험

▲ 임정과 의정원 1921년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앞에서 둘째줄 오른쪽에서 7번째가 석오

출옥한 뒤 제국신문 논설위원으로 개회 논설 수십 편을 집필했다. 그는 논설을 통해 개화와 함께 여성의 해방과 사회참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나라의 주인은 국민임을 명백히 한 ‘국민참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1903년에는 이상재,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 운동을 벌였고 1904년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상동교회에서 양기탁, 신채호, 조성환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면서 김구, 이회영 등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조약 무효와 파기를 선언했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두 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동녕은 1906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 이상설 등과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해 동포와 2세의 민족 교육을 시행했다.


1907년 이준, 이상설 등이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귀국해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노백린 등과 신민회를 조직했다. 그는 또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설립을 돕고 상동학교를 세워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 서간도 망명, 신흥학교 초대 교장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다시 조국을 떠나 만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했다. 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 형제, 이상룡 등과 함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해 동포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독립정신을 북돋웠다.


특히,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해 한국사, 윤리학, 경제학, 신지리, 박물학 등을 직접 가르쳤다. 이 학교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확장, 개편돼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석오는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4년 이동녕은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에 널리 퍼져 있는 무장력을 갖춘 각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독립전쟁을 구현할 망명 정부였다.


이동녕은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평화와 자유를 애호하는 전 세계 민족 앞에 호소할 독립선언의 필요성을 역설해 1918년 음력 11월,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3·1운동에 영향을 끼친 이 선언이 바로 ‘무오독립선언’이다. 이 선언에 동참한 독립지사는 대종교 제2대 교주인 김교헌을 필두로 한 신규식·박은식·안창호·이시영·신채호·김좌진·김규식·이승만 등 39명이었다.

▲ 1932년 자싱 피난 시기 저장성의 집에서 찍은 임정 요인과 가족들. 뒷줄 중앙이 이동녕 주석

이듬해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정부 조직을 모색하던 석오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3일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선임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28명의 동지와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한 석오는 얼마 뒤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 의장

그해 9월, 국내와 노령, 중국 등 세 갈래의 임시정부가 통합되고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면서 석오는 내무총장이 됐다. 그 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시정부의 불신이 표면화되자 석오는 안창호·여운형·조소앙·이시영·차이석·홍진·노백린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고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1924년에 석오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궐석으로 직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대통령 직권을 대행했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 의장이 됐다. 1926년 임정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잠시 국무령을 맡았으며 다음 해에는 주석으로 선임됐다.

▲ 자싱 피난 시기의 임정 국무위원들. 앞줄 중앙이 석오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 의장이 됐고 다음 해에는 두 번째로 주석(1930∼1932)의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 백범과 함께 이봉창과 윤봉길, 양 의사의 거사를 조직해 ‘훙커우(虹口)의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임정은 13년간의 상하이 시기를 마감하고 항저우(杭州)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석오는 세 번째로 임정의 주석(1935∼1939)이 됐다. 이때 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이사에 선임됐다. 항저우에서 전장(鎭江)으로 이동(1935)했던 임정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다시 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 등을 전전했다.


1937년 석오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속하고 진로를 모색했다. 1939년 임정은 일곱 번째 도시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으로 옮겼다. 여기서 석오는 네 번째 주석(1939∼1940)이 돼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 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했다.


이듬해 4월, 망명 30년을 넘겨 이미 일흔한 살의 고령이었던 석오 이동녕은 급성폐렴으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해방을 맞을 수 있는 다섯 해의 수명이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백범 김구는 석오의 타계를 안타깝게 추모했다.

▲ 쓰촨성 치장에 있었던 석오 이동녕 선생의 묘
▲ 석오의 유해는 1948년 봉환돼 효창공원 임정요인 묘역에 조성환(좌), 차이석(우) 선생과 나란히 안장됐다.

백범 “선생의 애호를 받은 이는 오직 나 한 사람”

“(……)석오 이동녕 선생이 71세 고령으로 작고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30여 년 전이다. 을사늑약 때 경성의 상동예수교당에서 진사 이석으로 행세할 때 상봉하여 같이 상소 운동에 참가하였다. 합병 후 경성 양기탁의 사랑에서 다시 밀회하여 장래의 독립운동을 위한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에 관한 일체 사무를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그 후 기미년 상해에서 또다시 상봉하여 20여 년 고초도 같이 겪고 사업도 함께 해 오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지냈다.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 석오 선생이 별세한 뒤, 일을 만나면 당장 선생 생각부터 하게 되니 이는 선생만 한 고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랴. 우리 운동계의 대손실이라 할 수 있다.”


- 김구, <백범일지>(돌베개, 2014) 중에서

▲ 1993년에 세워진 집터 표석 (종로 훈정동)
▲ 충청남도 기념물 제 72호로 지정된 이동녕 생가. 천안시 목천읍 동리
▲ 2010년 이동녕 생가 앞에 세워진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관

석오 이동녕은 치장에 묻혔다가 조국광복 후 1948년 봉환돼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됐다. 그는 효창공원 임정 요인 묘역에 조성환, 차이석 선생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 있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2호 이동녕 생가 앞에 2010년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3년에는 종로구 훈정동에 이동녕 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대한민국 국회 중앙홀에는 석오 이석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과 임정 수반을 지낸 석오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천안시 석오 이동녕 기념관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낮달

4평 기숙사 쫓겨나고 8평 전세집 구한 썰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