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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차별 말라며 엽총으로 야쿠자 쏜 권희로

"조센진, 더러운 돼지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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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20일 재일교포 권희로는 엽총으로 일본인 야쿠자 2명을 살해하고 88시간의 인질극을 벌였다.

재일교포 권희로, 엽총으로 야쿠자를 살해하다

1968년 2월 20일 시즈오카(靜岡)현 시미즈(淸水)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권희로(權禧老,1928~2010)는 일본 사회의 폭력배, 이른바 야쿠자 2명을 엽총으로 사살했다. 야쿠자가 채권자의 부탁을 받아 빚 독촉을 하면서 ‘조센진, 더러운 돼지 새끼’라 욕하자 격분한 것이었다.


범행 후 그는 실탄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차량으로 도주해 현장에서 45km 떨어진 시즈오카(靜岡)현 스마타쿄(寸又峽)의 후지노미 온천여관에 들어갔다. 그는 이후 여관 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장장 88시간의 인질극을 벌였다. 당시 그가 소지한 무기의 출처에 대해 그는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텔레비전과 신문으로 매일같이 중계된 이 인질극을 통해 권희로는 자신이 일본에서 자라며 겪은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과 모욕을 생생하게 부각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지면서 그동안 쉬쉬했던 재일교포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1928년에 태어난 권희로는 세 살 때 부친을 여의었다. 모친 박득숙이 넝마주이를 하며 생계를 꾸리다가 1933년 재혼하면서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 김희로라고 불리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국내에서 김희로라 알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지독한 가난 속에 힘겹게 살면서 소학교에 들어갔지만 민족차별을 겪으면서 권희로는 조선인은 다닐 곳이 못 된다며 학교를 그만뒀다. 의붓아버지에게 구박을 받다가 열세 살에 가출한 그는 음식을 훔쳐먹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몇 차례 감옥을 드나들며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


라이플로 두 명의 야쿠자를 살해한 사건 당시에 그는 결혼과 사업에 실패한 마흔 살이었다. 빚에 쪼들리던 이 한국인에게 채권자의 청부를 받은 야쿠자가 던진 민족 차별적인 욕설이 수십 년 동안 내연하고 있던 그의 분노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었다. 

민족차별로 드러낸 일본 사회의 민낯

그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라고 주장하며 TV를 통해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주장은 한국인에 대한 민족차별 문제를 환기하면서 일본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다.


인질극을 지켜보던 모친이 아들에게 한복 한 벌을 건네준 뒤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라며 비장한 각오를 드러낸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인질극은 사건 나흘 만에 기자로 위장한 수사관에 의해 권희로가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1992년 제작 상영된 영화 <김의 전쟁>(주연 유인촌)은 권희로의 석방 운동에 도움이 됐다.

권희로는 체포된 뒤 8년 동안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마모토(熊本) 형무소에 수감됐다. 권희로 사건은 일본 사회뿐 아니라 한국에도 재일교포 문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재일교포 문제는 일제의 식민지배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권희로에 대한 가석방 운동이 시작된 것은 그가 복역한 지 20년이 가까워서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박삼중 스님과 재일교포 사업가 조만길 등이 ‘재일한국인 김희로 씨 석방후원회’를 조직해 그의 석방 운동을 벌인 것이다.


1999년 9월 7일 31년 만에 마침내 권희로는 석방됐다. 7년 이상 복역한 외국인 장기수는 법적으로 국외 추방하게 돼 있는 일본 법규에 따라 그는 박삼중 스님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해공항으로 영구 귀국한 그는 그 전해 세상을 떠난 모친의 유해를 안고 있었다. 

어머니의 유골을 품고 권희로는 영구 귀국했다. ⓒ연합뉴스

71살의 노인이 돼 고국으로 돌아온 권희로의 삶도 순조롭지 않았다. 그는 후원인들의 도움으로 부산에 정착해 사회활동을 시작했지만, 결혼에 실패하면서 형사사건에 연루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치료감호소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그는 오래 앓아온 전립선암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82세. 그는 “시신을 화장해 유골의 반은 선친의 고향인 부산 영도 앞바다에, 반은 시즈오카현 어머니 묘 옆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일본도 그의 죽음을 비중 있게 다뤘다. 아사히신문은 “차별을 부각한 인물”이라면서 “한일병합(1910) 100년인 해에 숨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징적이다”라는 재일교포 2세 강상중 도쿄대 교수의 말을 전했다.


권희로의 이야기는 1970년 <분노는 폭포처럼>이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됐고 1992년에는 유인촌이 주연한 영화 <김의 전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영화는 재일교포의 인권문제에 대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의 국내 송환 운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권희로 사건이 일어난 지 꼭 50년째, 반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한일 양국 사이의 식민지 역사는 청산되지 못했고 재일교포의 인권과 차별 문제도 아직 남아있다.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할 때마다 재일교포들을 굴욕감에 빠뜨리는 지문 날인 제도(1952)는 아직도 살아 있다. 재일교포에게는 지방선거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공무담임권도 제한받고 있다. 고교 무상화 교육의 대상에서 유독 조선학교만 제외됐고 일본인들의 혐한(嫌韓) 의식도 위험수위를 넘곤 한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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