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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인 김소월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조회수 2017. 12. 26. 14: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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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2월 24일, 김소월 서른둘에 지다.
▲ 1998년 신시 100돌을 기념해 한국일보에서 남산에 세운 김소월 시비. 산유화가 새겨져 있다. ⓒ두산백과사전

1934년 12월 24일 아침 8시 평안북도 곽산의 집에서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전날 곽산 장에서 사 온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돌연한 죽음을 당시 동아일보는 짤막하게 전했다.

“한가히 향촌 생활을 하는 소월 김정식이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자택에서 24일 오전 8시에 돌연 별세하였는데 그가 최근까지 무슨 저술에 착수 중이었다 한다.”

▲ 오산학교 재학 시의 김소월(왼쪽). 사진과 자손의 진술을 토대로 만든 그림

당시 신문 기사는 그가 임종한 곳이 평북 구성이라고 알리고 있지만, 대부분의 관련 정보는 그 장소가 평북 곽산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곽산 장에서 사 온 아편’을 먹었다는 정보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그의 죽음에 관해선 대체로 자살설이 가장 유력한 추정으로 알려져 있긴 하다. 그러나 또 이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는 매체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그의 죽음(사인)은 일종의 미스터리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요절, 그 죽음도 미스터리다

그의 죽음은, 대체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 경영했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고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한 결과로 기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근년에 그의 증손녀를 통해 그가 생전에 심한 관절염에 시달렸고 그 통증을 잊고자 아편을 조금씩 복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살설이 다소 흔들리는 듯하다. 이는 그의 죽음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아편의 과다복용으로 인한 것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제기하고 있다.


소월의 삶은 32년 남짓이다. 열여덟에 등단했으니 실제 작품활동을 한 기간은 고작 14년 정도다. 그런데도 그는 이 나라 사람 가운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드문, 국민시인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니 그의 요절이 한층 더 안타까운 것이다.


그는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며 교장 조만식과 안서(岸曙) 김억(1896~ ?)에게서 배웠다. 그의 시재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게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됐다고 한다.


1920년 <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작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보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했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첫 치마·엄마야 누나야·진달래꽃·개여울·제비·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삭주 구성(朔州龜城)·가는 길·산(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따라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이 ‘밭고랑 위에서’(1924)·‘꽃촉(燭)불 켜는 밤’(1925)·‘무신(無信)’(1925)(이상 <영대>), ‘나무리벌노래’(1924)·‘옷과 밥과 자유’(1925)(<동아일보>), ‘물마름’(1925)(<조선문단>), ‘지연(紙鳶)’(1925)(<문명(文明)>) 등이다. 

▲ 1925년 간행된 그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

소월의 시작 활동이 절정에 이른 때는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할 때다. 그동안 써뒀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된 <진달래꽃>은 소월의 전반기 작품 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드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월의 시 세계를 짧은 밑천으로 주절대는 것은 외려 그에게 누가 될 듯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김소월 항목의 일부로 대신한다. 

'민요 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첫치마’·‘금잔디’·‘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 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 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 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먼 후일’·‘꽃촉불 켜는 밤’·‘못 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 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 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 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 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건강한 잠’(1934)·‘상쾌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팔벼개노래’(1927)·‘돈타령’(1934)·‘삼수갑산’·‘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3음보 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내가 김소월을 만난 것은 언제였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초등학교 때 그를 배운 것은 아닌 듯하다. 대신 나는 집안에 굴러다니던 한림출판사 판 <영원한 한국의 명시> 같은 책을 통해서 김소월에 입문했다. 책의 주인이 바로 위의 형이었는지 아니면 그 위의 누나나 형님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월을 알게 될 즈음 나는 그의 시보다는 형이 전해 준 일화를 통해서 시인의 삶을 머릿속에 재구성하는 데 바빴던 것 같다. 형은 소월의 ‘초혼(招魂)’을 비장하게 암송하면서 그가 사랑을 잃고 괴로워하다 ‘금잔디’를 써 놓고 그 여자의 무덤 앞에서 음독했다고 일러줬다.


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오순이라는 여성과 교제했지만, 그는 이미 14살 때 혼인한 몸이었다. 뒤에 결혼한 그녀는 의처증 남편에게 학대받다가 스물두 살에 사망했는데 '초혼'은 소월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에 쓴 시라고 한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형이 일러준 소월의 삶과 시는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못 잊어’도 그랬고 ‘먼 후일’도 그랬으며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도 시인의 서사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충분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 나는 처음으로 김소월을 공부할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산유화’가 실려 있었는데 나는 그걸 좀 심심하게 만났다.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로 시작하는 시를 배우면서 열네 살짜리 사내아이들이 거기서 ‘존재’나 ‘고독’ 따위를 새기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읍내의 문방구 겸 서점에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을 한 권 샀다. 장문사라는 이름의 서점에서 내가 단돈 100원에 산 책은 <김소월 시집>이었다. 그 책에서 읽은 시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시가 ‘왕십리(往十里)’였다.

▲ 왕십리 광장에 세워져 있는 '왕십리'를 새긴 소월 시비와 흉상

왕십리가 서울에 있는 동네 이름이라는 것밖에 몰랐지만, 시의 울림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7·5조 율격 따위를 알 리 없으나 ‘오는 비는/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같은 구절이 좋았다. 한창 기억력이 좋을 때라 외울 법도 했건마는 고작 그 구절만 기억에 남아 있다.


뒷날, 고교를 졸업하던 해에 <문학사상>에 연재했던 조해일의 장편소설 <왕십리>에 꽂혔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지 않나 싶다. 이 허허로운 연애소설의 주인공은 십몇 년 만에 옛 애인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온 건달이었는데 그는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왕십리에 남는다. 소설에서도 ‘가도 가도 왕십리’의 허무와 고독은 이어지고 있었던 게다.


그의 시로 맺은 인연을 기리고자 한 것일까. 왕십리가 있는 성동구에서는 1997년에 왕십리 네거리에 ‘왕십리’를 새긴 시비를 세웠고 이 시비는 2010년 왕십리 광장으로 옮겨지면서 소월의 흉상도 함께 세워졌다.  

제대로 기리지 못한 국민시인 김소월

소월에게 예술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 것은 1981년이다. 그가 묻힌 지 근 50년 만에 그는 민족 최고의 시인으로 복권된 것이다. 1968년 신시 100돌을 기념해 한국일보에서 서울 남산공원 입구에 소월의 시비를 세웠다.


더 말할 것 없이 소월은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대중가요로 만들어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이 소월이다. 그것은 소월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의 공감을 받을 만한 정형성과 서정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으로 시작하는 ‘부모’(유주용)를 비롯해 정미조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개여울’, 패티 김의 ‘못 잊어’, 희자매의 ‘실버들’ 외에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진달래꽃’(마야) 등이 가요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당신은 무슨 일로/그리합니까?/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돋아 나오고/잔 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않노라시던/그러한 약속(約束)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나와 앉아서/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않노라심은/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개여울' 전문

겨레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정작 그에 관한 정보는 일천하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도 있고 그가 북쪽 출신인 탓도 있을 터이다. 전국에 100개 안팎의 문학관이 있고 이 문학관들은 해당 지역 출신의 문인들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소월을 비롯한 백석과 이용악 등 북쪽 문인들과 이상, 박태원, 염상섭, 임화 같은 서울 출신 문인들을 그런 문학관에서는 만날 수 없다.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가 지금 2020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국립한국문학관이 서울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 내 서가의 유일한 소월 시집

소월의 문학관이 세워지지 않은 것은 그가 북쪽 출신이기 때문만일까. 살아생전에 서울의 ‘중앙 문단’에 진출해 활동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그는 요절했고 당연히 후학을 기르지 못했다. 스승인 김억만이 그를 기려 사후에 <소월시초(詩抄)>(1939)를 엮었을 뿐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국민시인인 그의 시는 얼마나 읽히고 있을까. 유명한 만큼 사람들은 그의 시를 다 안다고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내게 소월 시집이 있는가 헷갈려서 서가를 뒤져보니 달랑 민음사판 세계시인선 10권 <진달래꽃>(2007년 개정 증보판 10쇄) 한 권이 외롭다. 1977년에 1판 1쇄를 내고 30년 뒤에 개정판 10쇄면 얼마나 팔린 거로 봐야 할지.


온라인 서점을 검색해 우선 1925년 초판본 복원판의 <진달래꽃> 한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래도 무언가 이 겨레 최고의 시인을 홀대하고 있는 듯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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