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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수능, 문자. 사라졌던 국가가 나타났다

조회수 2017. 11. 17. 18: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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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걱정하는 국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출처: 정주식

#1 문자


어제 오후,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 핸드폰에 일제히 진동이 울렸다. ‘뭐지’ 하고 보니 올 여름 지겹도록 울렸던 긴급재난문자다. ‘별거 아니네’ 하고 핸드폰을 내려놓는 순간,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난생 처음 몸으로 느낀 지진은 생각보다 공포스러웠다. 한동안 건물이 계속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등에 식은 땀이 났다.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바라봤다. 좀 전에 울린 긴급재난문자가 참으로 신묘했다. 얼마 전까지 뒷북 알림으로 공해 취급 받았던 재난문자 아닌가. 몇 달 새 기상청의 테크놀로지가 급격히 발전한 것은 아닐 테고, 무언가 사람이 하는 시스템에 변화가 생긴 게 분명하다. 


“정권이 바뀌니 기상청이 열일하네”라는 말은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문자 한 통으로 얻은 시민의 안도감은 과학을 넘어선다. 


어제 나는 문자를 받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 어제와 같은 문자를 받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 몸과 주변을 보호할 것이다. 


빨라진 재난문자는 재난으로부터 내 몸을 지킬 가능성이 높여준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나의 안전을 걱정하는 국가가 있다는 안도의 메시지. 어제 기상청의 문자 한통은 수천억의 국정홍보예산으로도 얻지 못하는 시민의 신뢰를 만들어냈다.

#2 수능


어제 저녁 정부는 오늘로 예정됐던 대학수학능력평가를 일주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수능 연기가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러 피해를 보는 사람도 있겠지. 이기적인 개인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표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정부는 마땅히 내려야 할 결정을 내렸다. 개인은 다른 고려를 할 수 있지만 국가의 고려에서 국민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리스크는 '안 하던 짓'을 할 때 찾아온다. 수능을 연기하지 않았을 때와 연기했을 때. 아마도 욕을 좀 더 먹는 쪽은 지금의 후자였을 거다. 사서 욕을 먹더라도 마땅히 책무를 다하겠다는 태도. 이거 참 반갑고도 낯설다. 


어제 대통령 귀국 후 열린 긴급대책회의에서는 수능 연기와 관련된 내용이 90%를 차지했다고 한다. 교육부 장관의 수능 연기 건의가 있었다고 하나 이해가 엇갈리는 다른 부처의 이견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수능을 하루 앞둔 시점에 벌어진 자연 재난에 국가는 망설이지 않고 국민의 안전을 고려한 결정을 내렸다. 주무부처의 대처는 훌륭했고, 대통령의 결정은 과감했다.

출처: 직썰

#3 국가


지난 9년 국가는 있어야 할 곳에 나타나지 않아 국민에게 절망과 공포를 안겨줬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대통령은 실종됐고, 메르스가 창궐했을 때 국가는 재난의 실상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댓글부대를 운영하던 당시의 국가는 어느 때보다 시민의 삶에 깊숙이 관여했지만, 시민이 간절히 필요로 했던 순간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공공의 시스템이 신뢰받지 못할 때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시민은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접어든다. 국가시스템의 신뢰가 붕괴된 상태에서 폭동이 아닌 평화혁명으로 국가권력을 바꿔낸 수개월 전의 일이 새삼 기적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주인이 바뀐 한국의 정부는 지진 피해로 수험생들이 다칠까봐, 불안해할까봐 수능 시험을 연기했다. 어떤 정치적 동기도 없이 순수하게 시민의 안전을 걱정하는 국가라니, 책에서나 본 듯한 낭만적인 국가의 모습 아닌가. 


수능 연기 발표와 실시간으로 전송된 재난문자. 불편한 국가, 감시하는 국가가 아닌 ‘나를 걱정하는 국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실로 오랜만에 국가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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