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존과 인종차별은 다른 것일까?

조회수 2017. 10. 25. 16: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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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없는 '어른들의 나라'
출처: 노컷뉴스

한 블로거가 개인 SNS에 ‘제주도 노키즈존 리스트’를 공개했다. 


리스트는 가라앉던 노키즈존 찬반 논란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현재 꽤 많은 사업장이 노키즈존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언론은 (노키즈존은) “차별인가, 권리인가?”라는 제목으로 양측의 입장을 보여준다.


주로 공공장소에서의 매너를 근거로 “노키즈존은 권리”라는 쪽이 힘을 얻고 있다. 시끄럽게 떠들고 뛰는 아이들이나 자리에서 기저귀를 가는 부모 등이 사례로 나열된다. “성급한 일반화라고 하기엔 피해사례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와 “개인 사업장이기 때문에 사업주의 선택권”이라는 의견도 있다. 


간혹 노키즈존이 새로운 형태의 혐오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 노키즈존은 그저 ‘조용한 시간을 누릴 권리’인 것일까? 

출처: EBS

유색인종과 유치원생은 출입 금지?


만약 특정 인종에 대한 출입금지라면 어떨까? 아마 그것이 차별 행위라는 지적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은 매너가 없다거나 흑인이 범죄를 자주 저지른다는 식의 설명이 얼마나 조악한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가령 올해 4월엔 호주의 한 편의점주가 잦은 절도를 이유로 “10대 흑인 출입금지” 공고를 써 붙였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출입을 금지당하는 인종과 금지하는 인종 사이 권력 차를 우리 대부분이 실감하기에 가능한 사회적 합의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거부하는 건 인종차별과 다른 것일까? 여기서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사실 진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특정 성별과 나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공공장소에서 피해를 끼친다는 이유가 노키즈존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어린아이들과 소위 ‘진상 부모’ 외에도 출입이 금지돼야 할 사람은 많다. 


가령 공공장소에서 진상을 부리는 ‘일부’ 4-50대 남성들을 “개저씨” “아재”라고 칭하지만 이들을 공공장소에서 몰아내자는 논의는 없었다. “노키즈존이 있으니 노아재존도 만들자”는 주장이 아니다. 아저씨라는 집단에 대해서는 위협적인 배제가 이뤄진 적이 없었다. 


반면 아이들에 대한 통제는 쉽고 빠르게 이뤄졌다. 같은 ‘민폐’를 대하는 다른 온도는 차별받는 쪽의 약자성을 드러낸다. 바로 “출입을 금지당하는 쪽과 금지하는 쪽 사이 권력차” 말이다. 


현실사회에서 아이들은 약자다. 아직 사회화 기회를 충분히 갖지도 못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도 힘든 처지다. 노키즈존은 나이라는 특성으로 형성된 약자적 위치의 집단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는 차별이다.

출처: 채널예스

맘충과 아재의 권력 차이


누군가는 노키즈존이 공연장의 연령 제한과 비슷한 조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키즈존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데엔 소란스러움을 싫어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일부 노키즈존 카페에서는 아이를 동반한 부모가 음료를 테이크아웃 하는 것도 막고 있다. 노키즈존이 부모를 향한 적극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증거다. 그 메시지는 누구를 겨냥할까? 


부모 중 육아를 담당하는 쪽은 아직까지 주로 여성이다. 음료 포장마저 허용해 주기 싫은 그 ‘엄마’들을 가리키는 멸칭 또한 우리에겐 익숙하다. 결국 노키즈존은 아이를 가진, 가질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검열하는 효과를 낳는다. 


보호자 본인의 테이크아웃까지 금지하는 극단적 조치는 “자식관리도 제대로 안 하는 맘충”에 대한 혐오의 메시지인 동시에 ‘자식관리’를 하게 될 사람들(여성)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다. 노키즈존의 키즈가 나이를 통한 약자성을 동원한다면 그 배후에 있는 ‘맘충’은 성별을 통한 약자성을 같은 맥락으로 동원한다. 


얼마 전 등장한 맘카페 비난 기사를 살펴보면 쉽다. 기사는 커뮤니티 영향력을 무기 삼아 식당과 카페에서 갑질을 일삼는 맘카페 회원들을 비판했다. 소비자가 리뷰를 공유하고 아이와 가기 편한 장소를 선호하는 일을 어떻게 갑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우선 들지만 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지역상권의 영업을 방해하는 이들은 과연 맘카페 회원들뿐일까? 

출처: KBS

경찰청의 2016년 자료에 따르면 종업원에 대한 폭언과 영업 방해 등 갑질 횡포 가해자의 89.6%는 남성이다. 구입한 물건에 대한 거짓 항의로 이득을 취하는 블랙컨슈머 또한 4, 50대 남성에서 가장 많았다.


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다뤘나. “아재”라는 단어를 친근하게 만들어 “개저씨”의 이미지마저 위트 있게 받아넘기지 않았나. 정작 다양한 이름으로 라벨링 되고 비난받는 집단은 아이들이나 여성이다. 맘충과 아이들, 그리고 아재 간의 권력 위계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맘카페, 맘충에 대한 뜨거운 비난은 아이를 키우는 여성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반면 ‘개저씨’나 ‘아재’라는 단어의 등장은 4, 50대 남성들을 반성하게 할 힘이 없다. 그 나잇대 남성들에게서 들려오는 건 오히려 “이제 설 자리가 없다”는 자기연민의 목소리, 혹은 ‘아재파탈’ 따위의 단어로 무장한 기이한 자기미화다.


맘충과 아재 사이의 이 온도 차가 바로 노키즈존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노키즈존은 있는데 왜 노아재존은 없냐”는 성토가 그저 농담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다.

출처: EBS
출처: EBS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아이들이 만드는 소란스러움과 불편함을 싫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불편함이 동반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은영 육아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부모들은 아이들이 우는 시간을 인내”해야 한다.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아이들이 울고 떼쓰는 것은 유일한 의사소통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기다리듯이 사회도 미래의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화될 시간을 인정하고 인내해야 한다. 이는 공존하기 위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선택과 그 불편함을 이유로 모두가 누려야 할 누군가의 권리를 통제하려는 선택, 둘 중 어느 편이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함께 있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지워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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