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니 내게서 아버지가 보인다

조회수 2017. 10. 6. 15: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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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선 내 나이 때 어떻게 명절이 맞이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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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빵'으로 유명한 연예인 부자들

자식들은 부모를 닮는다. 생김새는 말할 것도 없고 성정도 닮는다. 오죽하면 ‘씨도둑은 못한다’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이들 핏줄이 보여주는 닮은꼴의 전개는 유전자의 위대성을 실증한다. 그러나 사소한 버릇까지도 닮아가는 이 피의 기적은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다.


자식들이 부모를 빼닮은 게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낸 풀빵처럼 형상이 같다 하여 국화빵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 국화빵 현상은 혈연 가족의 유대를 확인해 주지만, 그게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부모는 자식에게 우성인자만을 물려주지 않고 때론 열성인자도 전해주기 때문이다.  



싱크로율 100%, 어버이를 닮아가는 노년 


세상에 그 자식이 닮고 싶은 부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닮지 말았으면 좋을 부분조차 용케도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또 더러 달리 살겠다고 이를 악물고 살아온 사람들도 있지만, 정작 그들이 그 부모를 온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 넘어서고자 했던 부모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자식들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지지난 일요일에 벌초를 다녀왔다. 해마다 만나는 종형제들의 모습에서 나는 영락없는 그들 선친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하긴 아우들 역시 내 모습에서 큰집 아재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다. 자식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싱크로율 100%로 부모의 모습을 선연하게 드러내곤 한다.  


나는 선친의 모습과 내 모습이 특별히 닮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쉰을 전후할 때부터 주변의 친지들은 내 모습에서 아버지를 보는 모양이었다. 생질녀들은 내 모습에서 외조부를 발견하고 탄성을 지르곤 했다. 정말인가 싶어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글쎄다, 정작 본인이 그걸 느끼는 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몇 해 전에 벌초하러 산에 갔다가 동네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상대가 먼저 인사를 했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분명 동네 어른의 모습이었지만,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향해 상대는 ‘나야, 아무개’라고 해서 자신이 그의 아들, 내 후배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거짓말 같은 장면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그의 부친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가서 가끔 만나는 후배들을 초면이라도 알아보고야 마는 것은 그들이 내가 익히 아는 그 부친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돌아가신 어머니께선 늘 ‘4부자 기침소리가 하나같이 똑같다’고 이르시곤 했다. 문밖에서 나는 기침 소리만으로 지아비와 자식을 분간하지 못했다는 얘긴데 그건 역시 유전자의 힘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자식은 용모나 목소리뿐만 아니라 성격, 사소한 버릇, 건강 따위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으니 말이다. 


자식이 부모의 모습과 거의 일치하는 시점은 아마 죽음을 맞이할 때가 아닐까 싶다. 젊어서도 부모의 모습이 있긴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모습과 겹쳐지기 시작하는 것은 중년 이후부터고 그것은 노화하면서 점점 짙어지는 듯하다.  


젊고 건강할 때야 부모와 닮았기는 하지만, 제 나름의 삶을 살면서 지어내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는 삶의 조건과 사회적 환경이 아주 다르다. 그런 외부 상황 덕분에 자식은 마치 용모가 닮은 걸 빼면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육신에서 청춘의 뜨거움과 열정을 빼앗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 살이 빠지거나 혹은 쪄 비대해지고 머리카락이 빠져서 정수리가 훤해진다. 그리하여 젊음의 왕성한 기력과 의지가 빠져나간 노년의 쇠한 몸이란 쓸쓸한 거푸집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노화란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날것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모 세대와는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가치관과 삶의 양식으로 살아오면서 감춰져 있었던 생래의 유전적 특성이 비로소 쇠한 몸을 뚫고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다. 


노화, 유전자가 날것으로 드러나는 시간 


목소리나 말하는 모양, 자세나 걸음걸이, 웃음이나 기침 소리와 같은 겉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성격이나 취향은 물론 크고 작은 질환 따위의,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어버이의 어떤 유전자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것을 깨달을 때쯤에 그는 운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어버이와는 결이 다르게 달려왔다고 믿었던 자신의 삶이 어버이의 그것과 똑같은 동심원으로 겹쳐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버이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왔다고 믿었던 자기 삶이 단지 전개 과정만 달리한 진부한 리메이크라는 것도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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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닌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으셨다.

선친이 내게 물려준 유전자가 결국 내 노년을 당신의 그것과 겹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40대 말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내 전립선이 시원찮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60대 초기에 수술을 받아야 했던 선친의 병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50대 초기의 어느 날엔 선친이 오래 고생했던 다리가 시린 증상이 시작됐고 한겨울 추위에 ‘병적으로 몸에 생기는 추운 기운’인 ‘한증(寒症)’을 경험하기도 했다. 부친은 겨울이면 가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자지러지시곤 했는데 나도 요즘은 드물게 그러한 증상을 겪곤 하는 것이다. 


물론 선친이 앓은 질환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어버이로부터 우성인자만 물려받을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걸 담담히 받아들인다. 운명론을 들먹이는 것은 그게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성되는 피의 결과라는 걸 추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간암이 선친에게 찾아온 것은 60대 말, 그리 좋아하셨던 담배도 끊고 투병했지만, 노쇠한 육신은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선친은 우리 나이로 일흔에 세상을 버리셨다. 발인 날, 2년 차 신출내기 교사였던 나는 상여를 따르며 오래, 그리고 매우 서럽게 울었다.  


병력까지 물려주는 경우야 더러 있지만, 유전자가 수명까지 좌우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요즘 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일흔 어름이 어쩌면 내가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또 한편으로 나는 치매를 앓을 공산이 크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의 병력뿐 아니라 어머니의 병력도 물려받았을지 모르는 일, 어머니가 오래 중증의 치매를 앓으셨기 때문이다. 평생을 힘들게 일하신 어머니는 손가락 관절염으로도 고생하셨다. 이즈음 나는 가끔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시는 통증을 느끼면서 어머니의 고통을 반추하곤 한다. 


선친을 닮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버지 그릇의 반의반도 따르지 못하는 미욱한 자식일 뿐이다. 선친은 너그럽고 어지셨고 무엇보다 가족과 가족과의 단란한 삶을 사랑하신 분이었다. 여러 곡절 많은 삶을 살았지만, 늘 낙천적으로 당신을 짓눌렀던 삶의 무게를 가벼이 했던 분이기도 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비록 전근대적 가치관에 순응하며 평생을 사셨지만, 당신은 강인한 분이셨다. 눈물이 유달리 많으셨지만, 곡절 많은 삶의 순간들을 어머니는 강단으로 이겨냈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분이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눈물과 연민의 정서, 유세차로 시작하는 한글 제문을 지어내신 문재를 고작 흉내 내는 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피의 이력, 노년의 준비도 필요하다 


아내는 나와 아들 녀석의 목소리, 그러니까 부자의 목소리를 가끔 분간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아내와 딸애의 목소리에 더러 헷갈리곤 한다. 대를 이어 물려받은 유전자를 아내와 나는 지금 다시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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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개원한 지역의 시립노인요양병원. 노인 문제는 지방자체단체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사안이 됐다

지난달 말에 입원 중이신 삼종숙 어른을 찾아뵀다. 대문 앞에서 넘어지셨는데 걷지를 못해서 병원으로 모셨다고 했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평생을 원칙대로 고지식하게 살아오신 어른인데 세월이 오래되면서 육신도 쇠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의 연세, 올해 여든아홉이시다.


정신도 가끔 온전하지 않다는 얘길 하면서 삼종제(三從弟)는 담담했다. 그래, 노인은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는 해두어야 하겠지. 우리 집안의 마지막 어른이신데……. 하고 나는 말했는데 그게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  


삼종숙 어른이 오래 가실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와 같은 동네에 살던 4종숙모도 요양병원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그랬다. 내 목소리는 아마 좀 심드렁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내도 무심하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병들면 당신이 거두어 주고, 당신이 병들면 내가 거두어 주면 되겠지만. 그도 저도 안 되면 제 발로 요양병원으로 가는 거야. 부모 병수발로 자식들 골병 들일 일은 없으니까 말이야…….”


“아무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 되면 도리 없는 일 아니우?” 



아이들은 나라 밖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내와 둘이서 음식도 따로 차리지 않고서 한가위를 맞는다. 지금의 우리 내외 나이에 부모님께선 또 어떻게 명절이 맞이하셨을까 무심히 생각하면서.


* 이 글은 직썰의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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