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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이 아빠' 이동국의 국가대표 발탁이 감동인 이유

조회수 2017. 9. 26. 12: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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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이동국은 역경을 딛고 일어난 기적이다.

8월 14일, 신태용 신임 한국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발표한 대표팀 명단을 확인한 축구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6인 엔트리에는 79년생, 39세 이동국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축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대박이 아빠’로 더 잘 알려진 이름이었다.

출처: KBS
대박이 아부지

90분을 뛰는 축구라는 종목 특성상 축구선수들은 꽤 이른 나이에 은퇴한다. 30대 초반에서 중반은 선수 생활의 황혼기다. 이동국은 그 나이를 훌쩍 넘었다. 현역으로 선수 생활을 지속하는 것도 드문 경우다. 그러나 국가대표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103경기를 뛴 노장은 다시 신태용 감독의 배에 올랐다. 무려 2년 10개월 만의 복귀였다.

이동국 = 월드컵과는 거리가 먼 선수

이동국은 축구선수로 20년을 뛰었지만 정작 월드컵과는 지독하게도 인연이 없었다.


월드컵과의 첫 번째 인연은 98년이다. 19세에 월드컵에서 교체로 13분을 뛰었다. 이후 탁월한 재능 때문에 국가대표에 자주 호출당했다. 무릎에 매번 붕대를 감고 뛸 정도로 헌신했지만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의 눈에 들지 못했고,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탈락 직후 아침에 일어나서 소주 한 병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했다.

이동국은 아픔을 삼키며 2006년 월드컵을 기다렸다. 광주 상무에서 연일 득점포를 쏘아 올렸고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며 아시아 예선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의 일등 공신이 된 것이다. 그렇게 본선을 두어 달 앞둔 상황에서, 그의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만다.


겨우 재활에 성공하지만, 이동국의 불운은 계속된다. 부상에서 회복한 직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도전하기 위해 국내 무대 최고의 공격수임에도 과감히 도전했다. 그러나 빅리그는 쉽지 않았다. 한국의 ‘라이온 킹’을 환영하던 영국 언론들은 이동국이 부진하자 그를 ‘품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08년, 미들즈브러는 이동국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소속이 사라진 이동국은 초라하게 귀국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 전성기가 끝나버린 노장이 부활할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대박이 아빠의 축구인생 2막

하지만 이동국의 축구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2009년 전북 현대로 이적 후 리그 26골을 넣은 것이다. K리그 득점왕과 MVP는 그의 것이었다. 2010년, 잠시 부상에 주춤했지만 9골을 넣으며 현역 득점 1위 타이틀을 확보했다. 2011년에는 16골 15도움으로 도움왕과 MVP을 모두 수상했다.


그의 질주는 계속되었다. 2012년에는 커리어 하이인 26골을 기록했고. 2013년에는 클럽의 주정을 맡으면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득점 단독 1위를 기록한다. 2014년에는 K리그 역사상 세 번째로 60-60 클럽에 입성했으며 2015년 통산 4번째 MVP를 수상했다. 2016년에는 소속팀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동국은 전북현대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2017년이 되었다. 이동국은 국가대표에 다시 승선했다. 2년 10개월만이었다. 대표팀 선수들 중 이동국은 단연 눈에 띈 이유는 대박이의 유행어 ‘할뚜이따’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와서는 아닐 것이다.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 이동국이 국가대표를 뛴다는 일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신태용 감독은 대한민국의 월드컵 진출이 걸린 중요한 길목에서 이동국을 선발했다. 국가대표팀 김남일 코치와 동갑, 차두리 코치보다 한 살 많은 나이의 선수를 뽑은 이유를 기자들이 물었다. 신태용 감독의 답변은 간결했다.

노장이라는 이유로 뽑은 게 아니다. 최고 선수를 뽑았다.
2012년, 국가대표 이동국의 모습

국가대표 이동국의 스완송을 기대하며

2006년, 당시 KTF에서 독일 월드컵 직전 이동국을 나레이션으로 섭외해 만든 광고를 기억하는 팬들도 있을 것이다. 광고에서 이동국은 이렇게 말한다.

8년을 기다렸습니다. 
꼭 뛰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라운드는 아니지만 
4800만 붉은 악마와 함께 더 뜨겁게 뛰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꼭 이겨주십시오.

박지성의 맨유로만 축구를 접했던 나에게 그 광고는 큰 충격이었다. 8년을 기다렸던 월드컵을 부상으로 인해 포기하게 된 선수의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라운드를 지켜보는 축구선수의 심정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잉글랜드에서 실패하고 돌아와 카메라 앞에서 머쓱하고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던 그의 표정을 기억한다. 안쓰러웠다. 월드컵 16강 우루과이전에서는 완벽한 찬스를 이동국을 원망했다.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그의 이름이 나올때면 아직도 뛰고 있냐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지금, 나는 39살의 이동국을 존경한다.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 모습만을 보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에게 이동국이라는 이름은 역경을 딛고 일어난 기적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내 앞에 다가올 몇 번의 고난을 떨쳐낼 수 있게 할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현실적으로 노장인 그가 선발로 90분 풀타임을 모두 소화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소속팀인 전북 현대에서도 주로 교체로 투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이란을 상대할 이동국을 기대할 것이다. 


단 몇 분이라도 좋다. 그가 부르는 스완송을 뜨겁게 듣고 싶다.  


* 이 글은 외부 필진 20timelines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http://20timeline.com/8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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