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민 학살을 명령한 세계의 '전두환'들

조회수 2017. 9. 26. 12: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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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전두환'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왼쪽부터 시계 방향) 전두환, 야쿠부 고원, 이디 아민, 사담 후세인,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 중 하나는 전두환이 5·18 민주화운동 중 시민을 상대로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한 여부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해병대가 하달받은 발포 명령 문서가 공개됐다. (관련 기사: '전두환 발포 증거?' 5·18 발포 명령한 문건 발견) 목격자의 증언도 전두환을 겨냥하고 있고. 과연 이런 인간 부류가 또 있을까 싶지만, 세상은 넓고 형님들은 많다는 걸 명심하자. 그래서 준비했다. 쿠데타로 독재자가 되어 자국민을 학살한! 세계의 전두환들을 만나보자.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표 명령하달과 해병대 병력의 전남 배치 계획을 담은 군 기록

나이지리아의 도살자, 야쿠부 고원

1. 쿠데타

196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새 수반으로 임명됐다. 고원 ‘Go One’이란 닉값마냥 하나의 나이지리아를 추구했는데 말이 하나지 ‘내 편 아님 다 죽임 ㅇㅇ’과 다름없었다. 그 말처럼 그가 집권 후 가장 먼저 한 짓도 반정부 세력을 싹 다 잡아 죽인 것이었다. (사실 그의 이름은 Gowon. 개드립이니 넘어가기로 하자.)

2. 학살

비아프라 전쟁 중 난민 아이의 앙상한 모습

고원 집권 이후 종족 갈등과 학살이 끊이질 않았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이그보족 지도자 오두메구 오주쿠가 비아프라 공화국을 세우고 나섰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빡이 칠대로 칠 고원은 바로 전쟁을 명령해 비아프라 지역을 초토화해 버렸으니까. 비아프라 전쟁으로 이 지역에 쌓인 시체는 무려 110만 구에 달했다. 비아프라 지역 주민을 상대로 약탈, 강간도 서슴지 않았다. 야쿠부 고원이 이끈 나이지리아 공군이 ‘도살자’로 불린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난민캠프와 시장까지 융단 폭격하는 인간쓰레기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

- 추정 희생자: 1,100,000명

3. 최후 

무르탈라 모하메드

1975년 고원은 무르탈라 모하메드가 이끄는 군부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1976년 다시 한번 쿠데타를 모의하나 보기 좋게 실패하는데. 나이지리아를 하나로 만들겠다는 독재자는 결국 나이지리아를 갈기갈기 찢은 뒤 유유히 자취를 감춘다. 놀라운 건 그는 여전히 잘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간다의 히틀러, 이디 아민

1. 쿠데타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출신이며 190cm가 넘는 거구다. 1971년 이디 아민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쉽게 정권을 잡는다. 쿠데타임에도 피를 보지 않았던 건 수상이던 밀턴 오보테가 해외 콘퍼런스에 참여한 사이 빈집털이를 시전했기 때문이다.

2. 학살

이디 아민이 정권을 잡은 우간다는 악어들의 대포식기로 알려진다. 평소 이 나라엔 강변에서 멱을 감거나 빨래를 하다 악어에 습격으로 사망하는 인명사고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디 정권하에서는 악어가 선비마냥 얌전을 떨었는데 이유는 이디 아민에 죽어 나간 시체가 늪지대로 던져져 악어 밥이 됐기 때문이란다. 악어들도 하도 많이 먹다 보니 야성을 잃어갔다는 그런 썰.


아민, 그를 악마에 비유한다면 악마도 치를 떨 것이다.

그렇게 최대 80만 명의 우간다인들이 늪지대로 사라졌다. 대부분 반정부 인사였고 상당수는 민간인이었다. 이디 아민은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자란 평을 받는다. 고문이나 살인 행태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잔인했기 때문. 정적의 목을 잘라 그 머리를 냉장고에 넣어두거나 인육을 했다는 썰도 그 악명을 드높이는 데 한 축이 됐을 것이다.

- 추정 희생자: 300,000~800,000명

3. 최후

악어에게만은 산타 뺨 후려치던 이디 아민. 1978년 군 내부의 반역 음모를 눈치챈 그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탄자니아 침공을 명하지만, 반군이 탄자니아와 연합해 달려드는 바람에 꽁무니를 빼고 줄행랑을 친다. 결국, 그는 리비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를 전전하다 고혈압과 신경마비 원투 펀치에 혼절한 채 2003년 사망한다. 

에티오피아판 이디 아민,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1. 쿠데타

1974년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의 머리채를 잡고 왕좌에서 질질 끌어 내린 뒤 1977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또한 아프리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개막장 독재자였다. 오죽하면 에티오피아판 이디 아민이란 칭호를 얻었겠나 (…)

2. 학살

그에게서 전두환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던 때다. 반정부 시위를 막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지프에 기관총을 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무차별 개막장 난사가 벌어졌다. 그때, 민간인 1,000명은 순식간에 벌집이 돼 거리를 나뒹굴었다. 반정부 세력은 영장 없이 닥치는 대로 즉각 처형했다. 교회에 몰아넣고 불을 지르기도 했는데 이때 채 꽃을 피우지도 못한 8~11세의 아이들도 1,000명가량 사망했다고 (…) 집권 기간 통틀어 그가 직간접적으로 죽인 에티오피아인의 숫자는 200만 명으로 추정된다.

- 추정 희생자: 2,000,000명

3. 최후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

모든 나쁜 놈이 그렇듯 그 또한 원한이 쌓일 대로 쌓인 반군과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한 뒤 짐바브웨로 망명한다. 여기서 빡침 포인트는 에티오피아 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다른 나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전두환은 여전히 자국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에티오피아의 송환 요구를 짐바브웨의 독재자인 로버트 무가베의 피의 쉴드 덕이라고 (…)

이라크의 극악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

1. 쿠데타

정권을 잡기 전 사담 후세인 머릿속은 나, 쿠데타, 로맨틱으로 가득했다. 1964년 농민국장이던 사담 후세인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압둘 살람 아리프 대통령을 암살하려 하나 실패해 2년간 감옥 신세를 진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8년 아메드 하산 알 바크르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을 때 활약상을 인정받게 되고 이후 바크르 정권의 2인자를 누리다 1979년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2. 학살

독가스에 희생된 쿠르드인의 모습

대통령이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짓은 전 정권에서 일했던 관료 및 공무원을 싹 다 죽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막장 클라스를 자국민 학살 시 화학무기 사용으로 증명했다. 1982년엔 이라크 중부에 있는 두자일 마을에서 암살당할 뻔하자 그 보복으로 180명 이상의 마을 주민을 화학무기로 학살한다. 1988년엔 쿠르드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독가스와 화학무기로 5,000명을 단숨에 지워버린다. 20년 넘게 재임하며 죽인 자국민 수는 500,000명에 달한다. 아마 사람들은 그를 오사마 빈라덴과 함께 역대 최악의 이라크인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다.

- 추정 희생자: 500,000명

3. 최후


앞서 소개한 세계의 전두환들에 비해 사담 후세인의 최후는 자국민들에게 사이다에 가까웠다. 2006년 시아파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돼 교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2003년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해 후세인을 생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수형 판결. 하지만 후세인은 뻔뻔하게도 이를 항소하지만, 그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그의 처형 장면은 촬영돼 인터넷에 유포되는 대굴욕을 겪었다.

그리고 전두환

1. 쿠데타

전두환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쏜 총알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한다. 바지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으로 물러나자 그는 장충체육관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만을 모아 선거를 치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선거에는 2,525명이 참가했지만, 반대 및 무효표는 한 장에 불과했다. 독재자 클라스 ㅇㅈ?

2. 학살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1980년 5월 21일 군인에게 광주 시민을 상대로 발포 명령을 내린 것으로 강력히 의심된다. 당시 현장에 있던 목격자의 증언과 해병대 발포 명령하달 문서가 발견되면서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당시 전두환의 명령으로 사망한 시민의 수는 200여 명. 최대 5,000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죽했으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취임하자마자 어떻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손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정상회담을 거부했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5·18은 폭동이라며 끈질기게 주장 중이다. 그밖에도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 인권을 유린당해야 했던 삼청교육대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 추정 희생자: 200~5,000명

3. 최후

친구 노태우와 손 꼭 잡고 재판 받는 전두환

대통령직을 내려놓기 무섭게 전두환은 친구인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고 1997년 4월 17일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그해 12월 사면돼 국민을 극심한 분노에 빠뜨렸으며 텅장에 29만 원밖에 없다는 개드립 시전한 뒤에도 골프 치며, 경호를 받으며, 해외여행을 하며 잘 먹고 잘사는 중이시다. 무엇보다 자신이 한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게 개빡침 포인트.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여전히 ‘5·18은 폭동’, ‘발포 명령 없었다’, ‘나는 5·18 상처 치유를 위한 희생양’이라는 되도 않는 말로 잔뜩 써놔 숱한 국민을 뒷목 잡게 했다. 나무 낭비는 덤.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대해서는 아직 감정이 안 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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