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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1차대전 중 독일군이 여성 오줌을 모은 이유

개똥도 쓸 데가 있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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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전쟁’이 된 1차대전

1차대전은 화학자의 전쟁이라 불린다. 거의 모든 분야의 화학자가 기둥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화학물질 생산이 없었다면 1차대전과 같은 대량살상과 파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시간문제였지만 말이다. 


독일군과 연합군은 1차대전 교전 시간 내내 서로에게 고폭탄, 화학 가스, 소이탄과 같은 화학물질을 쏘는 데 소비했다. 이런 화학물질을 쏘려면 또 다른 화학물질인 추진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추진제를 점화하려면 총이나 포를 쏠 때 점화되는 일차 화약이 필수였다. 


화학물질은 살상용으로만 쓰이지 않았다. 환자나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질병을 예방하는 데에도 중요했다. 화학자는 탄약, 화약, 금속, 가죽, 고무, 기름, 가스, 음식, 약품 제조를 관장했다. 그래서 1917년 리차드 필처(Richard Pilcher)가 발표한 논문에서 1차대전을 ‘화학자 전쟁’이라 칭했다. 


화학자와 화공학자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 기능을 다 하는 화학물질을 생산하려면 원료가 필요했다. 전쟁 발발 몇 개월 만에 독일과 영국은 주요 원료가 거의 소진됐다. 독일군은 이전 2년 동안 누적된 피해 때문에 1918년 하반기에 갑자기 몰락했다는 기록도 나올 정도였다.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의 초상화

영국원정군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는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독일군의 예비전력을 소진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며 소모전을 체력싸움이라고 불렀다. 


전쟁이 계속되자 병력뿐 아니라 전쟁물자도 바닥을 드러냈다. 헤이그는 영국 해군의 항구 봉쇄로 독일 국민의 전쟁 지속 의지가 매년 심각하게 저하되는 중이라고 판단했다.


독일은 몇 차례 대규모 작전만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양의 탄약과 폭약만으로 참전했다. 1915년 초가 되자 그 수는 크게 줄었고 급히 생산에 박차를 가했지만, 질소가 문제였다.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 나이트로글리세린, 나이트로셀룰로스 등의 화약을 생산하려면 질산과 같은 질소 함유 화학 물질이 필요했다. 질소 함유 화학 물질은 전쟁 물자뿐 아니라 식량 생산에 필요한 비료인 과황산암모니아와 황산암모늄 제조에도 필요했다.


독일은 남미에서 질산염 광석을 수입해 화약과 비료에 필요한 질소를 사용했다. 영국 해군의 봉쇄 때문에 독일은 다른 곳에서 질소를 구해야 했다.

독일군이 택한 해결책은 소변이었다. 1915년 초, 독일 여성들은 힌덴부르크(Hindenburg) 원수가 서명한 신문 광고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독일 여성은 가정용 소변통을 내놓아야 한다. 조국이 화약원료 중 하나인 질소를 생산하는데 필요하다. 매일 마차와 통을 보내 소변통을 수집할 예정이다.

프리츠 하버의 또 다른 해결책

화약은 질산칼륨으로 부르는 질소, 탄소와 황으로 만들었다. 독일과학자는 소변에서 질소와 수소 결합물인 암모니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암모니아를 다시 질산으로 변환시키고 다시 가성칼륨과 반작용시켜 질산칼륨으로 바꿨다. 다행히도 가성칼륨은 풍부했다.


힌덴부르크의 명령이 실제로 많은 양의 소변을 모았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다른 해결책도 있었다.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주역이었다.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 *프리츠 하버는 영광보다 비극이 많았던 인물이다. 전쟁에 대한 비관으로 아내가 자살했고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자신이 개발한 독가스로 친인척이 처형되기도 했다.

1909년 8월, 하버와 영국 화학자 로버트 르 로시뇰(Robert Le Rossignol)은 공기와 물에서 각각 추출한 질소, 수소에서 암모니아를 생산하는 특허를 청원했다. 독일의 최대 화학회사인 BASF가 이 방법을 산업 규모로 적용하기도 했다.


1913년 9월부터 암모니아에서 황산암모늄 비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버와 BASF팀 리더인 독일 화학자 칼 보슈(Carl Bosch)는 그 결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질산칼륨 비료를 대량 생산한 덕분에 독일의 식량 생산이 급증했다. 국민은 하버를 공기에서 빵을 만들어낸 화학자로 칭송했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폭약 원료인 질산용 암모니아를 생성하는 데에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 하버는 공기에서 폭약을 만드는 방법도 발견해낸 셈이다.

소모전이 이어지자 독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모니아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전쟁과 농업 모두에 쓸 수 있을 만큼 생산할 순 없었다. 하버는 전쟁 후 당시 상황을 “굶어 죽을지 총에 맞아 죽을지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때, 독일은 아사를 선택했고 실제로 전쟁 말에는 국민이 굶주려 죽기 시작했다.

1915년 4월 22일, 독일 가스공병연대가 하버의 도움을 받아 1차대전 격전지 중 하나인 벨기에 이프르(Ypres) 부근 랑게마르크(Lanemarck) 전선을 수비하던 연합군에게 168톤의 염소를 퍼부었다. 전쟁사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사용한 첫 사례였다. 영국군은 큰 피해를 당했다. 피격 후 영국전쟁상 키치너(Kitchener)는 독일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화학무기 개발과 사용을 승인했다.

영국군의 반격

화학자는 무기 개발에도 필요했다. 때문에 전쟁부는 대영과 아일린대 화학회(Institute of Chemistr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에 화학지식이 있는 인력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많은 화학자가 이미 전투병으로 참전하고 있는 탓에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왕립화학회(Royal Society of Chemistry)의 기록에 따르면 1914~1918년 기간 동안 수십 명의 화학자가 전사했다.


영국은 1916년 말이 돼서야 일선의 화학자를 모두 본국으로 소환했다. 그밖에 유능한 여성화학자도 본국의 학계, 정부, 민간연구소에서 무기 개발에 협력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15년, 정부는 메이 레슬리(May Leslie)를 고용해 리버풀 부근의 민간연구소에서 질산생산의 효율성을 높이는 연구에 투입했다.

마사 휘틀리(Martha Whiteley)

런던제국대학의 화학 강사인 마사 휘틀리(Martha Whiteley)는 학내 여성화학자 팀을 꾸려 전쟁 발발 전에 독일에서 수입하던 의약품, 마취제와 다른 화학제품을 대체하는 연구를 했다. 이 팀은 군 병원의 마취제와 진통제를 개발했고 최루탄 겨자가스 등의 화학무기도 연구했다.


휘틀리는 겨자가스 극소량을 자신의 팔에 묻혀 효과를 확인하려고 했다가 후유증으로 3개월가량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평생 흉터가 남은 채로 여생을 살아야 했다. 


전쟁 초기, 영국은 환자와 부상병을 위한 화학제품뿐 아니라 영국군과 해군이 사용하는 무연화약에 필요한 아세톤도 바닥이 난다. 아세톤은 밀봉상태로 나무를 가열해 나오는 목초액에서 얻을 수 있는 휘발성 용제였다. 무연화약공장은 아세톤을 사용해 석유젤리(바셀린), 나이트로글리세린과 나이트로셀루로스를 혼합해 무연화약을 생산했었다. 


영국은 전쟁 전에 오스트리아와 미국에서 용제 대부분을 수입했고 국내에서는 소량만 생산했었다. 1915년이 되자, 용제 재고가 심각할 정도로 모자랐고 전선의 수요를 따라갈 수 없게 됐다.

하임 와이즈만의 등장

맨체스터대학 강사인 하임 와이즈만(Chaim Weizmann)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와이즈만은 1874년 벨라루스(Belarus)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나 독일과 스위스에서 공부를 마쳤다. 1904년 영국에 이민했고 6년 후에 영국 시민이 됐다. 전쟁 발발 2년 전, 그는 박테리아를 사용한 곡식 발효로 아세톤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영국 정부는 발효 방식에 관심을 보였고 와이즈만에게 규모를 키워 달라고 요청했다. 1917년, 와이즈만과 동료들은 옥수수와 쌀에서 약 3,000톤의 아세톤을 만들어냈다.

하임 와이즈만(Chaim Weizmann)

와이즈만은 발효의 아버지로 불리기 시작했다. 유대민족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하던 와이즈만은 그의 자서전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국가를 건립하는 벨푸어 선언(Belfour Declaration)이 자신의 공헌에 대한 대가라고 주장했다. 


1919년, 와이즈만은 세계 지오시스트 조직(World Zionist Organization) 의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됐고 1949년 2월에 이스라엘 초대대통령이 됐다. 


항생제의 비약적인 발전

1차대전 당시 군대는 쥐와 파리가 들끓는 참호에서 생활해야 했다. 벼룩에 피 빨리고 이가 가득한 군복을 입고 며칠씩 버텨야 했다. 부상병은 후송될 때까지 병균에 오염된 군복, 진흙과 흙 위에 그대로 방치됐다.


캐나다 의사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는 병균이 화약과 총알보다 더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전쟁에서 생긴 사상자 중 80~90%가 이질, 티푸스와 괴저 때문에 사망했다.


1차대전에서는 그 수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포탄, 소총, 기관총탄이 사망 원인의 80%를 차지한 반면 질병은 20%로 크게 줄었다. 소독약, 항생제, 마취제와 진통제와 같은 화학제품을 비교적 흔하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군 의사와 간호사는 이전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부상병과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화학제품들은 희석해 사용하더라도 부작용이 심했다. 1915년 11월, 영국 화학자 헨리 다킨(Henry Dakin)은 소다와 표백제를 물에 녹인 후 굳어진 고체에 붕산을 더해 부작용이 적은 항생제를 만들었다.

1916년, 다킨과 1912년 노벨상 의학상을 받은 프랑스 외과 의사 알렉시스 캐럴(Alexis Carrel)은 감염된 상처 치료를 크게 개선했다. 프랑스 북부의 한 병원에서 두 사람은 캐럴-다킨 치료법을 개발했다. 다킨약품으로 상처 표면을 여러 번 씻어내는 방법이었다. 다킨약품은 금방 상했기 때문에 사용하기 전에 매번 새로 만들어야 했다.


1차대전의 일부 화학물질은 적을 죽이는 동시에 아군을 치료하는 이중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독일과 연합국은 염소를 화학무기로 사용했지만, 염소는 표백제와 클로포름처럼 소독약과 마취제 제조에도 중요한 요소였다. 


영국 화약 암모날과 아마톨도 그런 경우였다. 두 화약은 모두 질산 암모뉼을 함유하는 데 토양비료로 사용해서 식량을 크게 늘릴 수 있는 중요한 물질이었다. 


1차대전은 화학이 양날의 검으로 사용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쟁 전과 기간 중 화학자의 발견은 군병력과 민간인 모두에게 혜택을 준 동시에 죽음과 파괴의 판도라 상자가 되기도 했다. 


* 이 글은 외부 필진 우에스기 님의 기고 글입니다.


원문: http://blog.daum.net/uesgi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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