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전 그만두고 앵무새가 된 전원책
"제가 원래 기자를 꿈꿨다. TV조선 입사 조건으로 '다른 자리는 싫으니 평기자로 입사하겠다'고 했다. 평생 꿈꿔 온 직업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 시인과 변호사는 해봤으니 기자를 이제 하게 됐다. 죽기 전에 영화감독도 꼭 해보고 싶다. 결국 기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TV조선에 입사해 앵커를 맡게 된 셈이다."
(CBS 노컷뉴스)
전원책 변호사가 앵커가 됐다.
오랜 꿈을 이뤘다. 만 62세에 거둔 성취다. 열심히 산 덕분이다. JTBC <썰전>을 통해 과격한 입담을 과시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쌓았고, TV조선 <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에서 진행자 역할을 하며 가능성을 타진했다. 결국 문이 열렸다.
TV조선은 지난 7월 1일 하계 개편을 단행하면서 메인뉴스의 방송 시간을 19시 30분에서 21시로 조정했다. 그리고 주중 앵커로 전원책 변호사를 내세웠고, 전 변호사는 TV조선에 기자직으로 입사했다.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기자 경력이 전혀 없는 비전문가를 앵커로 발탁하다니.
시청률 면에서만 본다면 출발은 괜찮았다. 전원책 앵커가 처음 진행을 맡은 7월 3일(월) 방송의 시청률은 1.327%(닐슨코리아)로 1.310%였던 7월 2일(일) 방송에 비해 소폭 상승했다. 6월 30일(금)의 0.900%보다는 확연히 높은 수치였다. 지난 19일에는 1.659%까지 상승했으니 적어도 시청률 면에서는 전원책 영입이 뚜렷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7월 19일 기준
JTBC <뉴스룸> : 5.629%
MBN <뉴스8> : 2.368%
TV조선 <종합뉴스 9> : 1.659%
채널A <종합뉴스> : 1.101%
보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전원책 앵커의 높은 인지도가 화제성을 견인하고, 그 결과가 시청률의 상승으로 나타난 건 분명하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을 넘기엔 역부족이지만, 적어도 채널A <종합뉴스>를 넘어서고, MBN <뉴스8>을 추격하는 모양새는 분명 고무적이다. 그러나, 시청률만으로 노년에 이룬 꿈을 축하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다.
앵커로서 처음 시청자를 만난 날, 전원책 앵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팩트를 전달하겠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는데 결코 소홀하지 않겠다. 어둔 길을 밝히는 등불 같은 역할을 하겠다."고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마치 손석희 앵커가 JTBC로 자리를 옮긴 후 "약 70년 전 <르 몽드> 지의 창간자인 뵈브 메리는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을' 다루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저희들의 몸과 마음도 그만큼 가벼워지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고 약속했던 것처럼 말이다.
손석희 앵커는 각계각층에서 쏟아졌던 우려와 달리 '오직 진실을 다루겠다'는 신념을 지켜냈다. 쉼 없이 몰아치는 격랑 속에서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심해의 공포 속에서도 굳건히 닻(anchor)을 내려 버팀목이 됐다.
하지만 전원책 앵커의 경우는 어떨까.
고작 2주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종합뉴스9>는 휘청이고 있다. 그 흔들림의 정도가 생각보다 심해서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문제의 원인은 전원책 앵커의 편파적인 코멘트였다.
"어제 정유라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이재용 부회장 재판에 출석했느냐는 겁니다. 특검은 본인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새벽 5시에 비밀 작전하듯 승합차에 태워 데려온 것부터 석연치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회부 기자들에게 검찰과 정씨 간에 뭔가 거래가 있는 것 아니냐, 취재 좀 잘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아직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7월 13일, 전원책 앵커의 오프닝 코멘트)
"정권이 바뀌었다고 전직 대통령의 우표 발행을 취소하는 것은 너무 옹졸한 처사입니다. 저세상에서 요즘 몹시 마음이 괴로울 박정희 전 대통령님, 송구스럽다는 말씀 올립니다.“
(7월 13일, 전원책 앵커의 클로징 코멘트)
위와 같은 편파적인 앵커 코멘트에 TV조선 기자들이 반발하면서 문제가 확산됐다. 지난 15일, TV조선 기자 80명은 성명서를 발표하며 전 앵커의 코멘트가 TV조선 보도본부 전체를 모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 앵커가 결론을 정해놓고 취재 지시를 하고 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우표와 관련한 발언은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또, 전 앵커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내부 구성원과 아무런 논의도 없었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하고 나섰다.
한편,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TV조선 주용중 보도본부장은 "오프닝과 클로징 모두 전원책 변호사가 아닌 내가 쓴 것"이라 해명을 했다고 한다. 주 본부장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전원책은 앵커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그저 적어주는 대로 읽기만 하는 '앵무새'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 의견이 내 의견과 같았을 따름이오'라고 변명을 하더라도 적잖이 실망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뉴스를 편집 ·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앵커로서의 신뢰가 깡그리 무너져 버린 상황이나 다름없다.
공정성과 신뢰성이 무너져버린 뉴스를 생산하고, 편향되고 왜곡된 언어들이 난무하는 종합편성채널. 지난 19일, 이효성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종편 의무재전송 4개는 너무 많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전원책 앵커로부터 불거진 논란은 TV조선의 처참한 민낯을 한층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감동스러워야 할 노년의 꿈이 예기치 않은 후폭풍을 낳고 있는 셈이다. 부정확한 발음과 부족한 전달력보다 더욱 아쉬운 건 앵커로서의 자질과 역할에 대한 몰이해다.
"외람되게도 수많은 선배 언론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하게 됐다"던 전 앵커에게 묻고 싶다.
앵무새가 되기 위해 평생의 꿈인 기자가 되고 앵커 자리에 앉은 것인가? 아니다 싶으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적어도 그 정도의 자존심은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과거 자유선진당에 합류한 후 대변인 역할을 맡았지만, 당의 방침과 자신의 신념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퇴하고 탈당 했을 만큼 당당했던 전원책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기엔 노년에 이룬 꿈이 너무도 달콤한 걸까?
전원책의 꿈과 도전, 그 자체에 대한 응원과는 별개로 준비되지 않은 도전이 가져온 씁쓸함은 뒷맛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