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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대행소 왱

[5.18] 그해 5월,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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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례/ 故권호영(당시 20세) 어머니

열두 시가 넘으니까 총소리가 나고 탱크 소리가 나고 난리더라고.

5.18이 났을 때 아들을 다락방에다 딱 넣어놓고 밖에 못 나가게 했어요. 26일 날, 저한테 ‘음료수 값 좀 주면 안 돼? 엄마?’ 그러더라고요. 그건 내가 주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 애가 그 날 오후에 나갔어요. 그땐 해지돼서 조용했어 모두.


아들이 안 들어왔는데, 열두 시가 넘으니까 총소리가 나고 탱크 소리가 나고 난리더라고.

‘이거 뭔 일일까? 왜 이런대? 뜬금없이 이런대?’

이러면서 아들을 찾으러 나가려고 했죠. 근데 다들 나를 못 나가게 해요. 그래서 마당에서 동동 다리를 구르고 섰어. 시민 여러분들 나오면 죽으니까 나오지 말라고.


27일, 8시 넘어서인가 나왔어요. 도청 본관 앞에 애기들 줄줄이 여섯인가 다섯인가 누워가지고 있어요. 우리 앤가 싶어서 이렇게 걷어보니까 팬티도 안 입혀서 홀딱 벗겨놓고... 얼굴이 아무것도 없어요. 너덜너덜하니 살떼기만 있는 것 같아가지고. 이것은 우리 애기 아니라고. 우리 애기 없다고 여기저기 다 찾으러 다녔죠.


'우리 애기 아니라고요.'

한 열흘이나 있으니까 망월동(구 묘지)에 묻히고 남은 유골이 세 구가 있는데. 거기 학생 같은 시신이 하나 있다고 해요.


그래서 가보니까 도청에서 본 애기가 여기서 본 애기에요. 이미 벌레가 이런 구더기가 드글드글하고 떨어져. 이 애기 우리 애기 아니라고 또 말했죠.


'내가 네 애미 아니다.'

22년간을 행불자로 찾아 다녔어요. 그러다 묘지를 구 묘지에서 신 묘지로 옮길 때 DNA 검사를 했거든요. 근데 4-94번이 아들이래요. 그러고 봤더니 전에 도청에서 본 것이 우리 애기가 맞았어요. 


그 묘를 찾아서 팠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누가 그냥 맨살로 묻어 버려가지고, 임자가 없으니까. 그것이 이렇게 한에 맺히고 이렇게 가슴이 아파서 죽겠어요. 그 일만 생각하면 내가.


김영훈/ 故김명철(당시 66세) 아들

'야 영훈아, 너희 아버지 어디가셨냐'

집으로 부랴부랴 가니까. 아버지가 신분증도 안 갖고 가셨더라고요. 광주 시내 적십자, 기독교 병원, 전남대, 조선대 병원 다 찾아다녔죠.


어디서 찾았냐면 22일인가 23일인가 그럴 거예요. 도청에 가니 내 기억에 시신이 38개인가 있었을 거예요. 거기서 제가 아버지를 찾았죠. 얼굴이 함몰이 되어있고...


박계남/ 故박병규(당시 20세) 형

가면 죽음이니까 도청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27일에 계엄군이 도청을 마지막으로 진압한대요. 시민 수습 위원회에서 여성분들은 전부 집으로 귀가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어요. 제 동생이 그 여성분들 11명 정도를 총 메고 데려다 주는 역할을 했고요.


어느 집은 열어주고 어느 집은 안 열어줬대요. 우리 집까지 다치니까 다른 집으로 가라는 거죠. 마지막에는 동명교회 목사님이 교회 문을 여셔서 거기다 데려다주고 저희 동생은 도청으로 갔대요.


여성분들이 동생에게 '절대 가지 말라고. 너 가면 죽음이니까 가지 마라.'라고 말렸대요. 그런데도 다시 갔답니다. 제 동생은 그날 새벽에 계엄군에 의해서 사망했습니다.


한양임/ 故허규정(당시 27세) 어머니

닭튀김 50개 하고 수박 30개하고 콜라 5박스 사가지고 아들을 빼내려고

아들이 조선대학교 대학생이었는데 아들 찾으려고 목포서 광주까지 걸어왔어요. 엄청나게 노력을 해도 못 찾았어요. 걔가 어디 있는가? 했는데 군인들 영창에 있대요.


아들을 상무대(군 재판소)에서 빼내려고 했죠.  돈 없는 돈 아주 다 사용해서 닭튀김 50개 하고 수박 30개하고 콜라 5박스 사가지고. 아들을 빼내려고... 그런데 때가 늦었습니다.얼마나 머리를 때렸던지... 그 원인(후유증)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쥐었던 주먹을 다시 쥐고 일어나라 


강해중/ 당시 47세

이렇게 뜯고 나서 보니까 눈이 없어요

총 짊어진 사람 셋이 앞에 딱 섰어요. 그리고는 공수부대가 총을 팍 쏴버렸어요. 아들들은 도망을 친 걸 봤는데 우리 딸이 죽을 것 같아요.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일어나는 순간 총알이 여기 눈 앞으로 지나가 버렸어요.


총을 맞고서 기다가 어쩌다 정신을 잃어버렸어요. 5일 만에 통합병원에서 깨어났는데 붕대를 탁 막아 놓으니까 뭔지를 몰라요. 실오라기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는걸 이렇게 뜯고 나서 보니까 눈이 없어요. 


그때 숟가락을 딱 놔버렸어요. 죽어 버리려고.


박천만/ 당시 21세

왜 안 두려웠겠어요?

27일 날 마지막 새벽까지 도청에 있었어요. 안전핀 다 끌렀어요. 당기면 총알이 나가게끔. 걔들이 오면서 총을 쏘는데,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총을 갈기고 온 거예요. 그 속에서 동지들이 몇 명이나 돌아가셨는지 몰라요.


솔직히 거기서 두려운 마음도 있었어요. 왜 안 두려웠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그때 당시 20대니까. 얼마나 젊은 청춘 아니에요? 그때 제 여자 친구가 배가 불렀어요. 몇 개월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에 제가 가서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근례/ 故권호영(당시 20세) 어머니

우리 애기는 평범하고 지 애미밖에 모르는 애기였어요. 자기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엄청 괴팍해지고 나를 때리고 그러니까 내가 같이 안 살고 나갈 줄 알고 ‘엄마, 어디 나가려면 꼭 나 데리고 가’라고... 죽겠어요. 그 생각하면.


박계남/ 故박병규(당시 20세) 형

저희 동생은 동국대학교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추억 같은 경우는 그때 옛날이다 보니까 그 당시에 먹고 살기는 힘들고 어떤 특별한 추억은 없어요. 


한양임/ 故허규정(당시 27세) 어머니

우리 아들은 조선대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근데 후회하는 건 서울에 대학교로 보냈으면 이런 일이 안 나서 아들을 안 잃어버렸을 텐데 맨날 생각하면 정말로 간이 붙어 있으니까 그렇지 안 떨어지고 이렇게 오늘날까지 살아요.


강해중/ 당시 47세

저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그랬는데 집에서도 벌이를 하고 있었어요.


김영훈/ 故김명철(당시 66세) 아들

아버님이 국민학교에서 소사를 했어요. 나이를 먹으면 부모님 생각이 더 많이 나지 않습니까? 아버지한테 불효를 했다는 것이 제일 마음이 아파요. 꿈에서 한번 뵙자고 하는데 나오시지를 않네요.


2019년 5월 광주 시민, 유가족 등 81명이 불렀습니다

평범한 사람 81명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내가 노래 같이 부르다가도 가슴이 벅차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 국민을 향해서 그렇게 총살을 하고 학살을 했는가. 듣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슬픕니다.
그게. 투쟁으로 부르면 또 투쟁이 돼요. 또 추모제 같은 걸 할 때 항상 부르면 또 마음이 울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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