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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매일 밤 머리맡에 유품을 남기는 이유

조회수 2020. 6. 16. 14: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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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유품을 매일 밤 푸는 일을 하고 있다

어김없이 그녀의 머리맡에 보따리가 놓였다. 



붉은색 보자기로 야무 지게 매듭까지 단단히 묶어놓은 짐 보따리다. 그녀가 삶을 떠나며 남기고픈 것들이다. 그녀는 홀로 사는 막내딸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매일 밤 남기는 중이다. 



보따리는 그녀의 유품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아흔이 훌쩍 넘었고, 그녀에게는 일곱 명의 자녀 가 있다고 했다. 마흔이 넘어 막내딸을 낳았는데 이 막내딸을 그녀는 자주 걱정했다.

그녀의 흐릿한 기억에 의하면 그녀는 쉴 새 없이 일을 다녔기 때문에 막내딸을 한 번도 업어준 적이 없었다. 설날에는 아이들 옷을 사주었는데 매번 큰 아이들 옷을 샀고 막내딸은 언니들 옷을 물려 입어야 했다. 그래서 막내딸은 새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이런 일은 60~70년대에 태어난 이들에게는 흔한 일이었 다. 내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의 막내딸은 이제 쉰 살이 넘어가는데, 그녀의 기억 속에서  막내딸은 여전히 10대에 머물러 있다. 언니들의 색 바랜 원피스를 물려 입던 작은 소녀는, 공책 한 권 여유롭게 써보지 못한 조용한 아이는, 가난한 집안의 일곱째 막내로 태어난 딸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까지고 그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소나무 껍질 같은 손바닥으로 매일 밤 막내딸에게 남길  옷을 준비한다. 옷장을 뒤져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비싸 보이는 옷을 꺼낸다. 



요양원에서 간식이 나올 때마다 서랍에 숨겨놓았다가 옷 보따리 한쪽에 간식을 끼워 넣는다. 그런 뒤에는 이 모든 것을 막내딸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보따리를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든다.


그녀가 매일 밤 남기는 유품은 그녀가 깊은 잠에 빠지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보따리 안에는 50대가 입기엔 무리일 것 같은 할머니 옷들과 양말 두어 켤레, 휴지로 칭칭 싸매놓은 빵이나 사탕이 들어 있다. 막내딸에게 무어라도 챙겨주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다.


언젠가는 그 보따리가 그녀의 진짜 유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녀는 매일 밤 짐을 싸고, 나는 매일 밤 다시 짐을 푼다. 옷이야 옷장에 있든지 보따리에 있든지 상관없지만, 상할 수 있는 음식은 그대로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는 밤사이 사라진 보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매일 그녀는 처음인 것처럼 유품을 남기는데, 그녀의 아픈 손가 락은 내내 낫지 않고 있다.



출처: 고재욱,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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