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지구 멸망해": 기후위기를 외면하는 심리

조회수 2020. 11. 27. 14: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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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가 진정으로 ‘위기’가 되려면 대다수 사람이 자신의 관점에서 그것을 ‘위기’로 간주해야 한다. 대중이 기후위기를 인식하고 기후행동에 관심을 가져야만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집합적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의 시각은 여전히 미온적이다. 대부분 기후위기에 관심이 없거나 기후변화에 관한 정보를 접하더라도 행동에 잘 나서지 않는다. 기후행동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을 물으면 높은 지지도가 나오지만, 비용을 부담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온실가스를 줄일 의향이 있는지를 물으면 답변이 달라지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기후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대표적인 심리적 장벽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부인
"기후위기는 좌파의 음모야"

부인은 기후위기 논쟁에 있어 집합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반응 중 하나다. 부인에는 “지구고온화는 가짜 뉴스야”와 같이 사실 자체를 잡아떼는 ‘문자적 부인’과, “기온이 오른 건 맞지만 기후는 언제나 변하니 인간의 책임은 아니야”와 같이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 의미를 왜곡하는 ‘해석적 부인’, 그리고 “기후변화가 있다 쳐, 하지만 나더러 어쩌라고?”와 같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 의미도 인정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은 인정하지 않는 ‘함축적 부인’이 있다.


오늘날 기후변화를 문자적으로 부인하는 경향은 전보다 많이 줄었다. 그러나 해석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기후위기를 부인하는 태도는 여전히 완고하며, 그 방법도 더 교묘하게 변하고 있다.

냉담과 무관심
"기후변화? 난 별로 관심 없어"

기후변화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냉담과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무관심에는 기후변화를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소극적 무관심과, 기후변화를 ‘웃기고 황당한 주제’로 간주하여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막아버리는 공격적 무관심이 있다.

회의적 인식
"나 혼자 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기후위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심을 갖게 되어도 그것이 곧바로 기후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너무 큰 문제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느끼고 자기 힘의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동 효과의 회의적 인식’이라 한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한다 해도 그것이 거대한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을 때, 즉 행동의 ‘효능감’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사람들은 무기력에 빠지고 행동에 나설 이유를 찾지 못한다.

사회적 비교와 형평성 인지
"왜 맨날 나만 손해를 봐야 돼?"

어떤 행동을 하고 싶어도 타인에 비해 나의 희생이 더 크다고 생각되거나 나의 부담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행동 변화에 나서지 않는다. 기후변화 이슈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의명분이 아무리 훌륭해도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명분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을 ‘사회적 비교와 형평성 인지’라고 한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심리적 반발
"뭐? 기후변화? 웃기고 있네"

흔히 ‘청개구리 심보’라 불리는 ‘심리적 반발reactance’은 기후행동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자신이 익숙한 것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 자기 자유를 제한할 것 같은 정보, 자신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거나 자신의 기존 신념을 크게 바꿔야 할 정보에 대해 사람들은 일단 거부부터 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

체념
"그래 봤자 망할 텐데, 뭐"

기후행동을 저해하는 심리적 장벽과 각종 부인 기제는 숙명론(“이미 망할 길에 접어들었어”), 패배주의(“어차피 기후변화로 세상이 끝난대”), 그리고 허무주의(“그러니 아등바등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와도 연결되기 쉽다. 최근에는 인간이 어떻게 노력해도 기후변화를 되돌리기는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기후 현실주의’가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현실주의적’ 입장은 기후위기의 리스크를 받아들이고 기후대응 노력을 하지 말자는 주장이므로 결국 부와 권력, 지위를 가진 기성 체제를 바꾸지 말자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기후위기가 오더라도 그것에 대응할 자원과 준비를 갖춘 사람들 혹은나라들은—기후대책에 따른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도—높은 수준의 회복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화된 상황의 피해는 차별 구조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오롯이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기후 현실주의는 강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무無행동을 지지하는 보수적 메시지의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

기후변화의 현실을 알리고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그것의 위험을 강조하는 것과, 기후변화는 이제 막을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이론적, 실제적, 정책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정치지도자들과 기후변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기후위기를 ‘대단히 심각하지만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문제’로 프레임하여 시민들의 정책 협조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조효제, 『탄소 사회의 종말』 에서 

수정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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