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풍경화는 어떤 그림일까? (feat.날씨가 주인공!)

조회수 2020. 12. 3. 14: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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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그림을 감상할 때 무엇에 집중하나요? 어떤 사람들은 묘사한 대상 중 인물에 흥미를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인물의 뒤에 묘사된 풍경이나 자연물에 흥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어떤 부분을 강조했는지 함께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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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르조네, ‘폭풍우’, 캔버스에 유화, 82×73cm, 1505년경,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번개의 존재감과 폭풍 전야의 기운 극대화

풍경화는 자연 풍경을 주제로 그린 그림을 말해요. 역사적인 사건을 기리기 위한 역사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종교화, 등장인물의 업적이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초상화와 달리, 풍경화의 목적은 그림 감상 자체라는 점이 특별해요.


서양미술사에서 풍경화가 독자적인 회화 장르로 고개를 내민 시기는 17세기부터예요. 당시 렘브란트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화가들과 현재의 벨기에 땅인 플랑드르 지역에서 활동하던 페테르 파울 루벤스 등이 17세기 풍경화 시대를 이끌었던 주역이었어요.


17세기 이전에도 풍경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인물의 종속변수나 배경 장식으로만 등장해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어요. 풍경이 그림의 주제이자 주체로 독립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된 것은 17세기 들어서에요.


서양미술사에서 진정한 풍경화 시대의 개막을 17세기로 꼽는 이유죠. 풍경화는 이후 빛의 미묘한 변화와 움직임을 회화에 구현한 19세기의 위대한 미술사조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를 거치며 전성기를 구가했어요.


그런데 16세기 초 풍경을 그림의 독립변수로 당당히 등장시킨 걸출한 이탈리아 화가가 있었어요.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풍경, 그것도 날씨가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실험적인 그림을 선보여 당대 미술계를 뒤흔들었죠.


그의 이름은 조르조네라고 해요. 데생을 중요시한 이탈리아 피렌체파에 맞서 색채의 중요성을 강조한 베네치아파의 선두주자로 활동한 인물이었어요.


미술사학자들이 16세기를 풍경화의 잉태기 또는 태동기로 규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화가가 바로 조르조네예요. 서양미술사에서 조르조네가 근대적인 의미의 풍경화 시조로 평가받는 이유예요.


그 그림의 제목은 ‘폭풍우.’ 원제가 템페스트(Tempest)인 이 그림은 조르조네가 1505년경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세로 82cm, 가로 73cm 크기의 작품인데, 현재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 중이에요.

풍경화가 독립적 미술 장르로 처음 발돋움

서양미술사 사상 풍경화가 독립적인 미술 장르로 발돋움하게 된 최초의 그림으로 인정받는 ‘폭풍우’는 날씨라는 풍경, 그중에서도 번개가 처음으로 그림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돼요.


그렇다면 조르조네는 어떻게 해서 본격적인 풍경화의 개막 시기보다 1세기 이상 빨리 ‘폭풍우’를 그릴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은 화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조르조네의 내면세계를 채우고 있던 인생관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어요. 조르조네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현상만으로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는 누구나 객관적으로 직접 인지할 수 있는 사물의 형태나 모양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 시각적인 힘만으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분위기와 뉘앙스였어요.


왜냐하면 사유와 경험, 오감에 기초한 감각에서 우러나오는 인식이야말로 세상의 본질이자 근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느낌과 분위기는 단순한 형태묘사로는 전달이 되지 않는다. 조르조네가 색채와 공기의 미묘한 흐름에 천착한 이유죠.


거센 비바람을 몰고 오는 전령사, 번개를 그림의 주제로 삼은 ‘폭풍우’는 그렇게 탄생했어요. 조르조네는 30대 초반에 흑사병으로 요절했어요.


삶에 관한 기록도 별로 없어요. 그의 작품으로 확실하게 알려진 것도 다섯 점 남짓이고, 더불어 그림에 내재된 풍부한 시적 서사와 수많은 알레고리적 표현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어요.


분명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를 이끈 후배 티치아노(1488?~1576)와 공동으로 작업을 했으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에요.


조르조네가 화가로 활동하던 당시, 풍경은 그림의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등장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나 그림의 배경을 장식하는 애피타이저 용도로 사용될 뿐이었어요.


그러나 조르조네는 섬뜩한 번개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폭풍 전야의 날씨를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로 내세워 엄청나게 파격이었어요. 제목(폭풍우)도 무시무시하고요.

번개를 작품 제재로 내세운 최초의 시도

그림을 보면 왼쪽의 남자와 오른쪽의 젖먹이와 엄마, 세 명을 빼곤 죄다 풍경이에요. 세 인물이 그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해요.


대신 잔뜩 찌푸린 하늘과 구름 속에서 곧 들이닥칠 재앙을 예고하는 듯 번쩍거리는 번개가 시선을 강타하는데, 그림의 거의 절반을 점령하고 있어요.

 

그 아래로 집들과 다리, 숲, 개울과 부러진 기둥, 야트막한 언덕이 보여요. 사실상 그림의 전부이다시피 한 풍경 속에서 세 인물은 생뚱맞고 소외된 것처럼 느껴져요. 인물만 빼면 전형적인 오늘날의 풍경화죠.


세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림에서 전해오는 분위기도 가운데 다리를 중심으로 극적으로 대비돼요. 다리 위의 하늘에는 천둥 번개와 함께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맹공을 가할 것처럼 긴박한 불안감이 가득해요.


반면 다리 아래쪽으로는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한 기운만 흐를 뿐, 어떤 불길한 징조도 보이지 않아요. 긴 막대기를 들고 짝다리 자세를 한 남자의 느긋한 모습에서나, 여유롭게 모유를 먹이고 있는 여자의 모습 어디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 듯 한 위태로운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아요.


조르조네의 의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네요. 여기에 대한 해석은 분분해요. 우선 맨 처음 이 그림의 제목이 ‘폭풍우와 병사와 집시가 있는 작은 풍경’이라는 점을 근거로 남자는 병사, 여자는 집시라는 주장이 있어요.


이와 달리 남녀는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 아기는 그들의 맏아들 카인이라는 의견이 19세기 중반에 나왔어요. 둘 다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요.


그림 맨 아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뱀의 존재를 이유로 구름 속 번개는 인간의 원죄, 남자 옆 부러진 기둥은 죽음의 알레고리라는 설(設)도 있지만 이 또한 검증되지 않은 ‘설’에 머물고 있어요.


그래서 조르조네의 ‘폭풍우’는 현재까지도 서양미술사 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그림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 그림은 풍경화의 시대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구름 속에서 존재를 드러낸 번개를 작품 제재로 내세운 최초의 시도라는 점과, 번개가 그림의 전반적인 아우라를 장악하는 독립변수로 홀로서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어요.


번개의 존재감과 폭풍 전야에 휩싸인 하늘의 기운을 생동감 넘치게 극대화한 감각적인 색채 구사 능력도 마찬가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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