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교동도, 제비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유는?!

조회수 2020. 6. 26. 11: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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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차로 1시간 거리로 그리 멀지 않은 곳, 강화의 교동도에 다녀왔어요. 하루 당일치기 나들이로도 좋은 이 곳은 위치상으로는 북한과 2km의 짧은 거리 차를 두고 있어요. 하지만 분단 이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교동도의 대표적인 특징은 제비가 많기로 유명해요. 그 이유는 남북 분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요. 자세한 내용을함께 살펴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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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가 날아들어요. 입에 지푸라기를 물었어요. 새 집을 지어요. 인간들이 바로 밑에서 바라보아도 개의치 않아요. 끊임없이 지절대며 자신들의 작업에 몰두해요. 제비들의 천국인 듯해요. 인간들이 가까이서 바라봐요. 신기하기 때문이에요. 이미 육지에서는 제비를 보기 힘들어요. 도심의 공해가 제비를 내쳤어요. 도심의 소음이 제비의 보금자리를 빼앗아갔어요.

▶ 대룡시장 골목에서 자리 잡고 사는 제비가 전깃줄에 앉아 있다.

그런데 이곳 교동도에서는 제비를 흔히 볼 수 있어요. 흥부에게 줄박씨를 물고 제비가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날아다녀요. 강화도 옆 교동도에 제비가 날아들고, 집을 짓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동도 대룡시장 골목길을 찾은 외지 사람들은 제비의 현란한 날갯짓에 눈길을 빼앗겨요. 말 그대로 코앞에서 제비들이 놀아요. 이 곳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니에요. 제비들이 자신의 집에서 인간을 내려다봐요. 교동도에 제비가 많은 이유는 남북 분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요. 한민족의 비극이 교동도를 제비 천국으로 만들었어요.


2㎞ 앞이 북한 땅… 한때 실향민 3만여 명

교동도는 강화도의 서북쪽에 붙어 있어요. 최근 수도권의 가족나들이 장소로 주목받고 있어요.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강화도를 거쳐 교동도에 도착해요. 6년 전 교동대교가 세워져 교통이 편리해졌고, 1960~7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시장이 있어요. 게다가 북한 땅이 바로 강 건너로 보여요. 실향민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예요.


현재 교동도에 살고 있는 주민은 3000여 명인데 1965년경에는 지금의 네 배인 1만 2000명까지 살았어요. 섬 북쪽의 말탄포구에서 북한 땅 연백군이 빤히 보여요. 강 건너 불과 2㎞ 정도면 북한 땅이이에요. 6·25전쟁 당시 황해도에서 교동도로 피란 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이 3만여 명에 이르렀어요. 대룡시장은 이들 피란민이 임시로 머문 수용소가 있던 장소예요. 피란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그리며 하루 이틀 기다렸으나 약소국 국민의 운명은 강대국이 결정했어요. 교동도에 머물던 실향민은 하나둘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세월이 흐르며 운명을 달리했어요.


피란민 수용소는 한때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버려진 가옥으로 변했어요. 그때 수용소를 차지한 주인공이 바로 제비였어요. 철 따라 한반도를 오가던 제비들은 교동도에서 보금자리를 발견했고, 수많은 제비가 집단 거주했어요. 그러다 2014년 강화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대교가 세워지고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하며 제비들은 보금자리를 옮겼으나,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는 제비들이 인간과 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셈이에요.


대룡시장 입구에 있는 교동이발관 간판 위에 제비집이 두 채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요. 이발관 주인장은 지광식(81) 할아버지. 황해도 연백군에서 13세 때 피란 와 대룡시장에 자리 잡고 살아왔어요. 이 시장통에서 가계를 아직도 운영하는 유일한 실향민 1세대예요.

▶ 교동이발관 간판 위에 제비 집이 두개 자리잡고 있다.

“고향이 지척인데 이리 오랫동안 못 갈 줄은…”

▶ 대룡시장의 상점 벽에 그려진 뻥튀기 장면이 동심을 자극한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가지 못한 채 지 할아버지는 17세 때부터 이발관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이발학원이 없어 청소하고 물 길러 오면서 어깨너머로 이발 기술을 배웠어요. 한때 직원이 세 명까지 있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지만, 지금은 혼자 해도 그리 바쁘지 않아요. 뒷산에 올라가면 고향이 바로 보여요. 참 모진 운명이에요. 고향을 눈 앞에 둔 채 평생을 살아야 했어요. 헤엄치면 금방 건널 수 있는 거리인데, 백발이 성성하도록 가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의 이발소 간판에 자리 잡은 제비가 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요. 제비는 훌쩍 날아 북한 땅에서 집 지을 흙도 물어올 수 있고, 먹잇감도 잡아 올 수 있어요. 비록 제비와 의사소통은 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제비는 헤아린다고 믿어요. 그야말로 격강천리(隔江千里)인 셈이에요.


“전쟁이 났다는 소식에 연백 사람들이 모두 교동도로 배를 타고 왔어. 그때만 해도 잠시 지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휴전선이 교동과 연백을 갈라놓고 이리 오랫동안 못 갈 줄은….” 지 할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져요.

연백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사고 나누면서 만들어진 임시 거처는 시간이 지나며 시장통으로 커졌어요. 임시로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초막으로 바람을 피했어요. 새마을운동 시절 배급된 목재와 슬레이트로 지었어요. 미장원, 분식집, 통닭집, 전파사, 신발 가게, 다방 등이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있어요.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폭에 400m 정도의 길 양쪽에는 분단의 아픔이 그대로 존재해요.

▶ 평생 대룡시장에서 시계 수리점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밀랍 인형으로 기념관을 만들어놓았다.

대룡시장 중간쯤에 시계 수리점이 있어요. 유리문에 자물통이 잠겨 있어요. 어두운 실내에는 한 할아버지가 조명 불빛 아래서 시계를 수리해요. 그런데 움직임이 없어요. 평생 이 자리에서 시계 수리하다 4년 전 돌아가신 황세환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밀랍 인형을 만들고, 시계를 걸어놓았어요. 걸려 있는 시계들은 다 다른 시간에 멈춰 있어요. 관광객들은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바라보며 분단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그대로 담고 멈춰 있는 현실을 실감해요.

▶ 대룡시장의 골목길은 196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부모 생각에 교동도 지키는 실향민 2세

이제 시장 대부분 상인들은 실향민 2세예요. 부모가 평생 강 건너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고 살았기에 쉽게 이곳을 떠나지 못해요. 시장 골목길은 1960년대 도시 변두리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 대룡시장 골목길에 역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쥐를 잡자’라는 당시 포스터와 ‘뻥이요’라는 소리에 귀를 막은 까까머리 아이들, 말뚝박기 놀이하는 개구쟁이 등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벽화가 정겨워요. 달걀노른자를 한가운데 띄운 쌍화차를 파는 다방과 꽈배기를 파는 군것질 가게, 차진 떡을 파는 방앗간 등이 아직도 손님을 끌어요.


시장통 입구에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요. 전동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는 귀가 안 들리는지, 이야기를 걸어도 대꾸를 하지 않아요. 할아버지들에겐 시장통을 구경 온 도시인들이 구경거리인 셈이에요. 


지금 교동도에 사는 실향민은 100명이 채 안 돼요. 북쪽으로 황해도와 연결되고, 동쪽으로 한강 하류와 만나는 교동도는 고려시대에는 황해도 예성강 하류에 있던 국제적 무역항 벽란도로 가는 중국 송나라 배들이 바람과 안개, 물때를 기다리며 잠시 머물던 중간 기착지였어요. 서양에 ‘코리아’라는 이름이 알려진 시기에요. 


조선 인조 때에는 황해, 경기, 충청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한 해상 전략적 요충지였어요. 또 교동도에는 한반도에 최초로 세워진 교동향교가 있어요. 고려 인종 5년(1127)에 세워진 교동향교는 원나라와 교통의 중심지가 교동도라는 사실을 보여줘요.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 물살이 빨라 탈출이 어려워 고려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쓰였어요. 조선시대 연산군도 폭정을 휘두르다 중종반정으로 물러나 교동도에 유배돼 두 달 만에 숨지기도 했어요.

▶ 망향대에는 실향민들이 북녘땅을 바라보고 절할 수 있는 제단이 있다.

교동면 지석리의 야트막한 언덕에는 실향민들이 제를 올리는 망향대가 있어요. 망향대 너머로 보이는 황해도 연백군은 배를 타면 10분이면 갈 수 있었어요. 망원경이 있어 연백군의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어요.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북한 땅이 가까이에 있어요.

▶ 망향대에 있는 망원경을 통해 한 부부가 북한땅을 살펴보고 있다.

 ⓒ 이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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