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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상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이 작품

조회수 2019. 12. 27. 13: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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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유럽에서는 루이 14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미술공예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는데요. 프랑스 예술의 기초를 다지고 화려한 궁정생활이 시작된 바로크시대의 미술 이야기, 함께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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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상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품

△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캔버스에 유채, 318×276cm, 1656~1657,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미술계를 호령한 인물이에요. 


빛과 색채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복잡하고도 독창적인 구도를 앞세워 확립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화풍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뿐 아니라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 등 후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어요. 


특히 피카소는 그에 대해 ‘리얼리티의 진수를 확실하게 보여준 위대한 작가’라고 극찬했죠.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의 재위 기간(1621~1665) 동안 왕실 전속 화가로 부와 명성을 누린 벨라스케스는 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린 궁정화가로 잘 알려졌어요. 


놀라운 관찰력으로 인물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그는 궁정화가로 왕실에 들어가기 전, 보데곤(bodegón)양식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화가로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어요. 


보데곤 양식은 자신의 고향인 세비야 지역의 서민과 하층민의 일상을 가구, 식기 등 정물을 제재(題材) 삼아 진솔하게 표현한 그림으로 당시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어요.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화가로서 자신의 명성을 사실상 이 한 점의 그림으로 굳히는데, 바로 말년에 제작한 ‘시녀들’(1656~1657)이라는 작품이에요.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르가리타 공주를 중심으로 그녀의 시녀와 난쟁이, 궁녀, 호위병, 개, 집사, 벨라스케스 본인, 왕과 왕비 등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실재와 환영’ ‘주체가 사라진 재현’ ‘사물과 분리된 인식’ 등 미술의 세계를 뛰어넘어 인문사회학적으로도 숱한 논쟁거리를 제공하며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벨라스케스는 17세기가 시작되기 한 해 전인 159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났어요. 12세 무렵부터 직업 화가의 도제로 들어가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타고난 관찰력과 데생 솜씨 덕분에 인물과 정물 묘사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죠. 


초상화를 잘 그린다는 소문이 날 즈음인 1622년 마드리드로 건너간 벨라스케스는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당대의 실력자 올리바레스 백작을 만나게 돼요. 


이때 그린 펠리페 4세 초상화에 감탄한 백작의 추천으로 1623년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 공식 임명되었죠. 펠리페 4세의 나이 18세 때였어요.


왕의 특별 배려로 왕궁 안에 전용 아틀리에까지 배정받은 벨라스케스는 이후 죽을 때까지 궁정화가로 활동해요. 펠리페 4세는 틈틈이 벨라스케스의 화실을 방문해 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즐길 정도로 총애했어요. 


특히 벨라스케스 외에는 누구도 왕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었다고 하니, 국왕의 신임을 짐작하고도 남죠. 궁정화가라는 신분 덕분에 벨라스케스는 왕실의 컬렉션을 마음껏 열람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을 주름잡은 티치아노의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실제로 ‘빛의 화가’로 유명했던 티치아노의 화풍은 벨라스케스 작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궁정화가 시절 벨라스케스는 두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해 티치아노와 틴토레토 등 대가들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리얼리티 양식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알려졌어요.


대표작으로 브레곤 양식의 그림인 ‘달걀부침을 만드는 노파’와 ‘세비야의 물장수’, ‘브레다 성의 항복’, ‘거울을 보는 비너스’, 초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실 잣는 여인들’, ‘시녀들’ 등이 있어요.


서양미술 역사상 이처럼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섰던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그렇다고 이 작품이 미술 해석상의 복잡함, 난해함과 궤를 같이하는 현대미술 작품도 아니에요.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에 내재한 화제성을 더욱 증폭시킨 것도 사실이죠. 현대미술이 1830년대에 카메라가 발명되면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탄생 사실 자체로 경이롭기까지 해요.


왜냐하면 벨라스케스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이 자그마치 360여 년 전이기 때문이죠. 벨라스케스는 1656~1657년에 캔버스에 유채로 이 그림을 그렸어요.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작품답게 그림의 크기도 어마어마해요. 세로 318cm, 가로 276cm.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단연 으뜸인 작품이에요. 


미술사는 물론 인문사회학적으로도 끊임없이 화두가 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벨라스케스가 17세기 중반에 그린 ‘시녀들’은 왜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았을까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는 무얼까

가장 큰 이유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있어요. 그것은 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그림 속 상황의 실체는 무엇일까’라고 표현할 수도 있어요. 


그림의 앞면, 가운데 밝은 빛을 받으며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한 어린 소녀, 5세짜리 이 소녀는 마르가리타 공주예요.

그림만 보면 마르가리타 공주가 이 그림의 주인공처럼 여겨지죠. 


펠리페 4세 국왕과 마리아나 왕비 사이의 첫째 아이인 이 소녀 왼쪽과 오른쪽 인물은 공주의 하녀들이에요. 맨 오른쪽의 두 인물은 왕실의 광대 역할을 하는 난쟁이들이고 그 앞에 강아지 한 마리도 엎드려 있어요. 오른쪽 하녀 바로 뒤에 궁녀가 호위병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뭔가 얘기를 건네고 있고요. 

 

그림의 맨 왼쪽에 대형 캔버스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요. 붓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가임이 틀림없어요. 


이 남자는 다름 아닌 이 그림을 그린 벨라스케스 본인이에요. 그림 저 뒤편의 문가에 또 다른 남자, 왕실의 집사가 서 있고, 그 왼쪽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치는 남녀는 왕과 왕비예요. 


자, 그렇다면 벨라스케스는 지금 어떤 장면을 그리는 것일까요? 거울에 비친 국왕 부부를 그리는 것일까요, 공주 마르가리타를 그리는 것일까요. 국왕 부부를 그리고 있다면 공주가 시녀들의 보호 속에 부모인 국왕 부부를 보러 화가의 작업실을 찾은 장면일 거예요. 


반대로 공주를 주인공 모델로 시녀 등을 담은 모습을 그리고 있는 중이라면 국왕 부부가 작업실을 방문한 것으로 보여요.


또 다른 시각도 있어요. 국왕 부부를 그리는 도중에 작업실로 온 공주와 시종, 궁녀, 난쟁이, 집사의 모습을 벨라스케스 본인이 보고 있는 장면 그 자체를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 벨라스케스는 이 그림의 매력을 신비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유이기도 한 기발한 해석의 여지를 우리에게 남겨놓았어요.

 

그림의 감상자, 즉 우리가 이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장면이 진행 중인 작업실 현장을 목격하고 그 광경을 그리는 중이라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작업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는 주체는 국왕 부부일 수도, 공주 일행일 수도, 화가 본인일 수도, 나아가 우리일 수도 있다는 점이 이 그림이 지닌 신비스러운 매력이에요. 


최초 제목은 ‘가족’이었으나 1843년에 발간된 프라도미술관 도록에서 ‘시녀들’로 명명됐다는 점, 극도로 정교한 묘사로 사실성을 자랑하는 이 그림은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그림 속 형태들이 이지러져 멀리 떨어져서 봐야 제대로 된 감상이 가능하다는 점도 이 그림의 매력 포인트예요! 

ⓒ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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