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당일치기 여행 추천! #군산다크투어

조회수 2019. 11. 22. 16: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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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다크투어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전쟁·학살 등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재해가 일어난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여행이에요.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군산으로 떠나볼까요?

위클리 공감 누리집 원문 기사 보러 가기


아픈 역사 새기며 기억의 시간여행

△1930년대 군산 번화가의 모습.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이 모두 보인다.



그의 아버지(여점체)는 1926년에 중국 산둥에서 군산으로 왔어요. 당시 한반도는 일제의 점령지. 50대의 나이에 조선에 온 그의 아버지는 밭농사를 지으며 5남 2녀의 자녀를 키웠어요. 일본인들에게 채소를 팔았고요. 돈벌이가 됐죠. 왜냐하면 군산에 사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부자였기에 채소를 후하게 쳐주며 구입했어요.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들이 쌀 등을 수탈해 일본으로 보내는 중심 항구였어요. 


1933년 조선에서 생산된 쌀 1630만 석 가운데 53%가 넘는 870만 석이 일제에 수탈됐어요. 그중 약 200만 석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갔어요.

△일제가 내선일체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영화 전단. 일제강점기 군산역사박물관에 전시돼있다.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어요. 비옥한 땅에 땅값은 일본의 10분의 1 수준. 일본인들은 호남평야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인 뒤 쌀농사를 지어 막대한 부를 쌓았어요.


해방 당시 군산의 인구 5만 8000여 명 가운데 20%에 가까운 8000여 명이 일본인일 정도였으니까요. 일본인 대지주들은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을 통해 많은 한국 농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어요. 


농민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농장이나 정미소의 잡부 또는 쌀을 배에 실어 나르는 인부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어요.

당시 군산의 화교는 1500여 명. 이들은 일용직뿐만 아니라 양복점, 구둣방, 이발소 등 각종 서비스업을 담당했어요.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도주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화교들은 박정희 정권이 화교들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조처에 타격을 입고 대부분 중국 음식점을 차렸죠. 


여건방(72)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다른 화교들처럼 중국 음식점을 운영했어요. 1969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집 ‘용문각’을 운영한 여 씨는 2년 전 음식점 자리에 ‘군산화교역사관’을 세웠어요.

사재를 털어 만든 개인 박물관에는 주말이면 500여 명의 관광객이 몰려요. 무료로 박물관을 운영하는 여 씨는 정성을 다해 전시물을 설명해요. 


전시물 가운데는 1969년의 ‘음식물 가격표’가 있어요. 짜장면 50원, 군만두 70원, 탕수육 220원이다. 50년 전의 물가를 가늠해볼 수 있죠.

인생사진 명소이자 영화 촬영 단골

△경암 철로길에서 교복을 입고 포즈를 잡으며 추억 여행을 하는 중년 여성들



여 씨가 개인 박물관을 운영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군산시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근대로 시간여행’을 주제로 일제강점기 유적지를 활용했기 때문이에요. 비록 민족의 아픈 역사이지만 이를 숨기거나 파괴하지 않고 관광자원으로 홍보하는 전략을 세운 거예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죠. 전쟁, 학살 등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재해가 일어난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에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2018년 500만 명이 군산을 찾았어요. 2016년 221만 명, 2017년 366만 명, 2018년 515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어요.

△경암 철로길 벽화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경암동 철길마을. 해방 1년 전인 1944년 4월 신문 용지를 만드는 페이퍼 코리아 공장(옛 세풍제지)과 군산역을 잇던 2.5km 길이의 철로가 생겼고, 주변에는 앉은뱅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어요. 


협궤의 기차는 시속 10㎞로 천천히 달렸고, 이렇게 운반된 신문 용지는 일제를 찬양하는 신문을 제작하는 데 쓰였어요. 2008년 기차가 멈춘 뒤 철길 주변의 집들은 관광객을 맞이하는 가게로 바뀌었어요. 


최근에는 고교 시절 교복을 빌려주고 사진을 찍는 복고풍 영업이 인기를 끌고 있어요. 철길 위에서 교복을 입은 청춘 남녀들과 중년의 동창생들이 인생 사진을 기대하며 포즈를 잡아요. 외국인들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교련복과 교복을 빌려 입고, 이국의 정취에 젖어요.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의 남녀 주인공 황정민과 한혜진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철길을 걷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어요.

본격적으로 근대로 시간여행을 떠나려면 근대역사박물관을 가야 해요. 박물관에는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서해 물류유통의 천년 세계로 뻗어가는 국제 무역항 군산의 모습을 보여줘요. 


박물관 3층에는 1930년 9월의 군산 거리를 재현한 근대생활관이 있어요.

적산가옥 수십 채 옹기종기

△군산 신흥동 일본인 적산가옥의 창문.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수탈한 일본인 부유층의 가옥이다.



근대역사박물관 바로 옆에는 군산세관 본관이 있어요. 1908년 대한제국 자금으로 세워진 이후 1993년까지 85년간 사용했던 건물이에요. 1910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호남과 충청 지역의 쌀, 곡식 등을 수탈하던 창구였어요. 


빨간 벽돌과 파란색 대문이 눈에 띄는 이 건물은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 등 건축재를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지었다고 해요. 


서울의 한국은행, 서울역사와 더불어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혀요.

근처에 있는 군산근대건축관은 식민지 경제 수탈을 위한 대표적인 금융기관이었던 조선은행 건물. 1922년에 신축해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장악하는 데 초석을 쌓아,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은행이었어요. 


근처에는 일본인들이 살던 집, 적산(敵産) 가옥이 수십 채 있어요. 대표적인 집이 포목상이었던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지은 2층집이에요. 


이 목조 가옥이 위치한 신흥동 일대는 당시 군산 시내 유지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죠. 일본식 정원과 전통 가옥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영화 <타짜>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등의 촬영지로 쓰였어요. 


정원 곳곳에 조선시대 사찰과 무덤을 지킨 석상, 탑 등이 장식품으로 있어요. 약탈의 아픔이 절절히 묻어나요. 이 집의 감춰진 보물 창고에서는 수탈해 모아둔 조선의 수많은 귀중품이 발견됐어요.

△동국사 뜰의 소녀상. 일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도 근대역사 여행에 꼭 끼워 넣어야 해요. 왜냐하면 일제강점기에 종교를 통해 황국신민화를 주입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에요.


1909년 일본 승려가 창건해 일제강점기 35년간 일본인 승려들이 운영했어요. 에도시대의 건축 양식을 본뜬 대웅전 지붕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처마에는 별도의 장식이 없어요. 대웅전 뒤편에 자리한 대나무 숲도 일본풍이에요.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이 법당 복도를 걷고 있다. 일본식 사찰의 독특함이 묻어난다.



목재는 물론 기와 한 장까지 일본산으로 건축된 동국사예요. 일본 조동종 포교당으로 시작한 동국사는 조선 불교의 분열, 황민화 교육 강화,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앞장선 사찰이었어요. 


일본 사찰로 유일하게 철거를 하지 않은 동국사는 지금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 야욕을 고발하는 ‘역사의 산실’로 탈바꿈했어요. 


현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의 노력 덕분이에요. 스님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에 걸쳐 일본을 오가며 5000여 점의 관련 자료를 수집했어요. 


스님이 모은 자료는 사찰 바로 옆에 있는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에 전시됐어요.

사찰의 마당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어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사찰은 동국사가 유일하죠. 단발머리 한복 차림의 소녀는 맨발로 서 있어요. 


분노에 가득 차, 차마 앉아 있을 수 없어요. 시선은 일본 쪽을 향하고 있어요. 평화의 소녀상 바로 뒤에는 일제 침략에 대한 일본인들의 참회와 사과 글인 ‘참사문’을 음각한 비석이 있어요. 


참사문에는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폭거를 범했으며, 조선을 종속시키려 했고, 결국 한국을 강점함으로써 하나의 국가와 민족을 말살했는데, 우리 종문(조동종)은 그 첨병이 되어 한민족의 일본 동화를 획책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맹세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그리고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해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라는 문구가 있어요. 


일부 양심적인 일본 종교인들의 목소리예요.

“매운 짬뽕의 원조”… 박대도 별미

△군산에는 짬뽕 맛집이 많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국물이 맛있다.
△군산의 특산 해산물인 박대



종걸 스님이 설명했어요. “동국사 범종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 있어요. ‘천황의 은덕이 영원히 미치게 하니,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복이 일본이나 조선이나 같이 굳건히 될 것이다.’ 분노를 일으키는 범종이지만 소유하고 있어야 그들의 과오를 정확히 질타할 수 있어요.”


근대로 시간여행을 하며 허기가 느껴지면 군산 짬뽕을 맛보세요. 군산에는 163개의 중국 음식점이 있는데 그 가운데 5곳을 화교가 운영해요. 5대에 걸쳐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곳도 있어요. 이곳 화교들은 빨갛고 매운 짬뽕은 군산이 시초라고 주장해요.


항구에 가면 군산의 특산인 박대를 맛볼 수 있어요. 참가자밋과인 박대는 껍질을 벗겨 바닷바람에 말려서 구이나 찜으로 먹죠. 10월부터 12월이 제철이에요.

ⓒ 이길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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