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 교수가 말하는 '이 망할 놈의 도시' 바꾸는 법

조회수 2019. 10. 31. 15: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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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망할 놈의 도시’ 규제혁명이 필요하다.

위클리 공감 누리집 원문 기사 보러 가기



도시는 훌륭하지만 고쳐 써야 할 발명품이다

현대 도시인이 출퇴근에 소모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100분(1시간 40분)이 넘어요. 출근 시간으로 평균 48.1분, 퇴근 시간으로 53분을 쓰며, 서울 거주 직장인의 경우에는 무려 134.7분이나 돼요. 전국 1등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1등이죠.

직장 생활을 30년이라 어림잡으면 무려 1만 4400시간(600일)을 우리는 도로에 쏟아버리고 있어요. 


출퇴근 시간 동안 지하철과 버스에서 몸은 녹초가 되고 정신은 한없이 피폐해지는 걸 생각하면, 이 망할 놈의 도시는 구제 불능이에요. 


평균 수면시간(6시간)의 3분의 1을 직장과 집을 오가는 데 쓰는 시민들에게 그 시간을 돌려주려면, 도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먼저 교통 시스템이 지금보다 훨씬 똑똑해져야 해요. 인공지능(AI)이 보행자와 자동차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신호등을 조절해, 사람이나 차가 멈춰 기다리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해요. 


자율주행 자동차가 일상화되면, 출퇴근 시간에 차 안에서 숙면을 취하거나 일을 할 수 있어요. 자율주행 택시가 나타나면, 출퇴근 시간에만 그 수를 대폭 늘릴 수도 있죠.

직장 컴퓨터를 집에서도 쓸 수 있도록 네트워크 연결을 쉽게 하고 보안 걱정도 없게 해준다면, 일주일에 며칠은 재택근무도 가능해져요. 


5세대 이동통신이 보편화해 동영상 회의가 지금보다 훨씬 원활해진다면, 직장인은 물론 1인 기업이나 프리랜서의 재택 활동은 크게 늘어날 거예요.

좀 더 근본적으로는 지금처럼 주거지역과 상업지역, 일터가 모여 있는 도심이 분리되지 않고 직주근접 환경으로 도시가 다시 설계된다면, 출퇴근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게 돼요. 


유럽의 구도시들이 그렇듯 삶터와 일터가 가깝게 연결되고, 문화 공간과 쇼핑 공간이 삶터에 인접하면, 인생 중 600일에 해당하는 출퇴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실제로 핀란드 헬싱키시가 짓고 있는 유명한 스마트 도시 칼라사타마(Kalasatama)에서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활용해 도시의 효율성을 높여 시민들에게 ‘매일 1시간의 여유를 돌려주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어요.


2008년까지만 해도 버려진 항구였던 칼라사타마에서는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으로 교통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했고, 소흐요아(Sohjoa)라는 자율주행 버스가 주택단지를 운행하며 시민을 안전하게 이동시켜줘요. 


얼마 전, 인텔 후원을 받아 발표된 주니퍼 리서치 보고서에는 스마트 도시가 시민들에게 한 해 125시간을 돌려줄 잠재력이 있다는 분석이 담겨 있어요.

대한민국 대도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전 세계 도시 면적은 육지의 1%에 그치지만, 지구 인구의 54%가 도시에 모여 살고 있어요. 마치 바닷속 산호 면적은 2%에 불과하지만 바다 생물의 30%가 산호 근처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40억 인구가 사는 도시들은 전 세계 온실가스의 80%를 배출하고, 심각한 교통 체증과 환경오염, 쓰레기 방출, 지나친 물 소비 등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어요. 범죄와 사고도 도시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벌어져요. 


내가 다치거나 폭행을 당해도 그저 지나가며 쳐다볼 뿐 도와주는 이 없는 ‘낯선 이들과 동거 사회’, 이 익명의 공간에서 도시는 병들어가요.


교육은 또 어떤가요? 과도한 경쟁의 온상으로,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교육 백화점으로 변해왔어요. 편리한 정량평가를 ‘공정함’이라 믿는 한 줄 세우기식 교육을 ‘차악’이라 위안하며, 청소년들을 경쟁주의에 희생시키는 교육지옥으로 도시는 변해가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행복을 망가뜨리고, 삶의 질을 떨어뜨려요. 도시는 더 이상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하는 행복을 만들어줄 지속 가능한 공간이 못 돼요. 


우리의 문명을 행복하게 담아낼 수 있는 안전한 그릇이 더는 아니에요. 따라서 이렇게 도시가 마냥 커지고 계속 성장해서는 안 돼요. 


하지만 유엔 보고서는 앞으로 도시화는 더욱 가속화해 2050년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2인 66억 명이 도시에 거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새로운 문명을 담아낼, 지속 가능한 도시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대도시를 어떻게 재생시킬 수 있을까요?

21세기 들어 공학자들은 그 답을 ‘스마트 도시’에서 찾고 있어요.



스마트 테크놀로지가 시민 행복 이끄는 도시

스마트 도시란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과 움직임, 시민들의 행동을 데이터화해서, 인공지능을 통해 분석해 도시인의 삶의 질과 행복을 높이는 맞춤형 예측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으로서 도시예요. 다시 말해, 제4차 산업혁명 기술을 이용해 도시를 ‘시민을 보듬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뜻이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디지털 혁명의 결과물인 정보 기술이 최근 급속도로 발전한 이유도 있지만, 그것을 제조업과 유통업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융합 기술들이 함께 발전했기 때문이에요. 


일례로, 사물인터넷으로 도시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나 시민들의 행동을 모두 데이터화할 수 있었기에 디지털 기술이 적용 가능한 사회가 된 거예요.

스마트 도시는 4차 산업혁명의 근원지

의료 서비스만 보더라도 앞으로 10년 안에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돼요. 환자 상태가 집에서도 모니터링돼서 병원으로 전송되니, 직접 병원에 가지 않더라도 주치의가 원격진료를 해줄 수 있어요. 지금 환자들이 종합병원에서 5분 남짓 받고 있는 진료보다 나은 진료가 가능해요.


중국 시진핑 정부도 자국에 스마트 도시를 500개나 짓겠다고 선언한 바 있어요. 리커창 총리가 주도하고 있는 이 사업에서 각 도시는 주요 테마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헬스케어’예요. 


중국의 부호들이 최신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으로 나가지 않고 자국에서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취지죠.

헬스케어 중심 스마트 도시는 환자에게 어떤 치료를 해줄 수 있을까요? 시민들에게 응급 상황이 생기면, 응급차가 복잡한 도로를 헤집고 도착하기 전에 드론이 3분 안에 가장 시급한 1차 응급을 위해 날아와요. 


곁에 있는 보호자가 직접 응급처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죠. 뒤이어 응급차가 도착하면, 환자를 이송하는 동안 웬만한 영상 촬영과 검사는 모두 그곳에서 이루어져요. 


오는 동안 병원에서 대기하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응급차 안의 환자 상태를 살펴보면서 응급치료를 지시해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중국은 칭다오(靑島) 근처 웨이팡(游坊)시에 헬스케어 중심 스마트 도시를 건설하고자 준비 중이에요. 웨이팡시는 샤산 생태지구 안에 위치하는데, 이곳의 신선한 식재료를 공급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한 헬스케어 서비스라 여겨요.


종의 다양성을 해치면서까지 전 지구가 소비하는 과일과 채소, 육종이 단순화돼가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식량 소비자들은 대도시에 모여 사는 반면, 주요 생산자는 각 나라의 농촌지역에 자리하는 탓이죠. 하나의 도시를 먹여 살리는 데 그 도시의 100배 크기 농촌이 필요해요. 푸드 마일리지(식재료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제 도시 자체가 생산자가 되어야 해요.


샤산 같은 청정지구가 가까이 있으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도시들은 ‘스마트팜’을 준비하고 있어요. 건물 하나에서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키우려는 시도예요. 


시카고나 토론토 등지에서 시도되는 스마트팜은 건물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농작물을 키워내요. 건강한 식재료를 도시에 공급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많은 스마트 도시가 스마트팜을 주목하죠.

대의 민주주의를 극복하고 스마트 거버넌스로

지역 이슈에 대해 시민의 의견을 빠르게 모으고 그들의 뜻에 따라 행정 처리를 하는 스마트 거버넌스도 가능해요. 


시민들을 위한 앱을 개발해 그곳에서 여론을 묻고 시의회나 시청, 지역구 국회의원이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한 행정 활동을 해요. 예전 같으면 본인 확인이 어렵고 해킹의 위험이 있어 구현하기 어려웠지만, 이젠 생체 인식과 블록체인 기술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 거예요.


실제로 전 세계 ‘스마트 도시 1위’라 불리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시민들의 의견을 즉각 반영하는 스마트 거버넌스에 역점을 두고 있어요. 특히 도시 전체를 공유경제 플랫폼으로 바꾸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자전거 공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데, 공유경제 서비스가 보편화되려면 도시 규모에서 변화가 필요해요.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상의 도시를 컴퓨터상에 만들어 도시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고스란히 그 안에 담아 해법을 찾을 수도 있어요. 


‘디지털 트윈’이라 불리는 이 시뮬레이션 프로젝트는 싱가포르가 시도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어요. 프랑스 다쏘시스템의 플랫폼 위에 싱가포르 도시를 그대로 담아 도시 소음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어요.


도시는 새로운 문명을 담아내는 그릇

산타페연구소 제프리 웨스트 박사에 따르면, 도시의 크기가 10배 늘어날수록 그 도시의 창조성은 17배 늘어나요. 


한 도시의 생산성과 창조성은 사람 수나 면적에 비례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요. 


덕분에 도시는 20세기 문명의 창조 엔진으로 작동해왔어요. 농촌은 도시로 변모하고, 작은 도시는 큰 도시로 성장해요.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가르침 덕분이죠.


하지만 이제 도시는 수많은 장점과 함께 치명적인 문제를 초래하는 지구 문명의 위협이 돼가고 있어요. 지금과 같은 속도로 도시 가속화가 이루어지면, 언젠가 지구는 재앙을 맞을 수 있어요. 자생할 수 없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도시는 ‘문명의 종말’을 뜻해요.


현대 문명이 도시를 중심으로 한 ‘허브 문명’이었다면, 그래서 대도시로 모일수록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이제 다음 시대는 ‘분산 문명’으로 돌아서야 해요. 인터넷 네트워크가 정보를 공유하고 네트워크로 연결해줌으로써 권력과 인구를 분산시켜줄 거라 믿었지만, 오히려 허브 사회가 강화됐어요.


21세기 스마트 도시를 기획하면서 블록체인을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블록체인의 탈중앙화 철학을 도시에 접목하려는 이상을 실현해보기 위해 각국이 노력 중이에요. 데이터를 제공하는 주민들에게 지역 화폐를 암호 화폐로 제공해,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주민들에게 실제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경제구조도 가능해요. 


개인 간 거래가 활성화되고 중앙통제 사회로부터 벗어나면, 스마트한 ‘행복 강소도시’가 가능할 수 있어요.

규제혁신 없이 스마트 도시는 불가능

인구 500만 명, 1000만 명의 메가 시티는 이제 행복한 문명을 담아내기 어려운 그릇이 돼가고 있어요. 그렇다고 인구 10만 이하의 소도시가 좋은 교육, 다양한 일자리, 믿을 만한 의료 환경을 만들어내기도 힘들어요. 


그렇다면 가장 적절한 크기의 도시, 생산성과 창의성은 극대화돼 있지만 시민들의 다양성과 행복도 존중되는 도시를 구현하는 것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거예요.


스마트 테크놀로지가 도시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고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해주진 못할 거예요. 그러려면 규제혁신이 필수죠. 


왜냐하면 현재 법규와 규제는 모두 지금의 도시 시스템을 안전하게 운영·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에요. 스마트 도시를 만들기 위해 들이는 모든 노력은 사실상 현재 법규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에요. 


이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규제혁명이 필요해요. 오늘 이 자리가 그것을 제대로 논의하는 출발점이길 꿈꿔요.

* 이 글은 10월 30일 법제처·한국법제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제7회 아시아 법제 전문가 회의 기조연설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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