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성공 요소 중 하나, '52시간 근무제'?

조회수 2019. 9. 2. 14: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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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은 스태프들이 표준근로계약서를쓰고 정해진 시간 안에 촬영을 마무리하는 등 노동 인권에 힘썼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자세한 내용 살펴보시죠!


위클리공감 홈페이지 원문 보러 가기

영화계에서의 주 최대 52시간 근무
봉준호 감독(왼쪽)이 5월 27일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해 배우 송강호와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인천공항/공동취재사진

5월 28일 서울 CGV용산에서 진행된 <기생충>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표준근로계약 준수에 대해 “저나 <기생충>이 표준근로 정착에 특별한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닙니다. 


2014~2015년 즈음부터 이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국영화계에서도 표준근로계약 준수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있어왔다”고 설명했는데요. 


제작 현장이라는 특수성을 안고 있는 영화계에서 어떻게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에 먼저 다가갈 수 있었을까요. 영화·방송 제작 관계자들이 말하는주 52시간 근무제 준수 노력과 방향을 들어봤습니다.

한 영화 제작 현장에서 연출부 스태프들이 촬영에 몰두하고 있다.

“예전엔 오늘 이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될 때까지 하는 거지!’라는 개념으로 했다. ‘24시간이든 48시간이든 열정 하나로 버텨보자, 그게 영화인이지!’ 하는 식이었다.” 


2001년부터 영화 <질투는 나의 힘> <아는 여자> <특종: 량첸살인기> 등 수많은 영화제작 현장을 경험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안병호 위원장은 한국영화 촬영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요.


2000년대 초반, 대기업 자본이 영화로 들어오면서 예술의 장르이던 영화가 ‘산업’으로 발돋움했습니다. 영화 산업 규모는 날로 커졌지만, 영화 노동자들의 처우는 변하지 않았고 임금 체불도 심각한 수준이었는데요.


“24시간, 40시간이 넘어가면 사람이 유령처럼 된다. 그럼 몸과 혼이 따로 있는 것처럼 ‘붕’ 떠 있는 상태로 일하게 된다. 당연히 사고 위험도 커질 수밖에 없다.” 안 위원장은 당시를 가리켜 “알 수 없는 어떤 세계를 향해 마구 달려가던 시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어길 땐 투자 않겠다고 하자 급속 변화”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한겨레

다행히 오늘날 영화촬영 현장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영화산업노조를 거점으로 스태프 임금 체불 문제와 노동환경 개선 등을 위한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됐기 때문인데요. 


2005년 12월 정식 발족한 영화산업노조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표준근로계약서 작성 등이 포함된 단체협상이었습니다. 안 위원장은 “처음엔 대기업과 배급사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밝혔는데요. 


하지만 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시작으로 단체협약 요구를 이어갔고, 2012년 CJ E&M과 CGV, 영화산업노조와 영화진흥위원회 등과 함께 ‘노사정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2014년부터는 모든 대형 영화 배급사와 투자사가 이 노사정 협상에 참여하고 단체협약을 맺고 있습니다. 


안 위원장은 “대기업으로 이뤄진 투자사들이 ‘하루 12시간 근로’ ‘10시간 이상 휴식 보장’ ‘표준근로계약서 사용’ 등의 내용이 포함된 단체협약을 지키지 않는 제작사에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합의하자, 영화제작 현장은 급속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2015년에는 이런 단체협약 내용을 법률로 반영해, 이를 지키지 않는 영화는 국고 지원 사업에서 배제한다는 내용이 담긴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까지 이뤄냈습니다. 


안 위원장은 “여전히 일부 소규모 영화나 단편영화 촬영장 등에서는 단체협약을 지키지 않는 곳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는데요. 


단체협약이 자리 잡으면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비상식적인 노동환경을 강요하는 분위기도 줄었습니다. 


안 위원장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12시간 이내에 촬영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면서 “영화의 경우 보통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에 해당하기 때문에 내년 1월부터 본격적인 주 52시간 근무제의 범위인 1주 7일, 1주 52시간의 영역으로 접어든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영화촬영 현장에서는 촬영팀 인력을 오전·오후반 혹은 요일을 달리해 근무시간을 나누고, 업무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일의 효율성을 높여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수성 고려, 유연근무제 활용 필요 

유연근무제란 근로자들의 일하는 ‘시간’과 ‘장소’에 유연성을 제공하는 기업의 제도를 의미합니다. 유연근무제의 유형은 근로시간과 장소의 유연화를 보장하는 제도들을 포함하는데요. 


근로시간에 대한 유연화 제도에는 단시간 근로, 탄력 근로, 집중 근로 등이 있으며, 근로 장소와 관련한 제도에는 재택근무, 원격근무 등이 있습니다. 유연근무제를 도입함으로써 기업에는 업무량의 변화에 따른 효율적인 인력 배치의 효과가 있는데요. 


근로자에게는 여가를 갖고 일과 가정을 양립시키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이하 PGK) 최정화 대표는 영화계의 경우 제작 과정의 특수성을 고려해 유연근무제를 적극 활용하는 등의 방향성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영화촬영 현장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지키기 어렵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연출부, 미술부 등 촬영 현장을 ‘준비하는 팀’의 경우는 쉽지 않다. 인원을 늘리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다. 인건비 상승도 여기서 나오는 얘기다.”


최 대표는 영화 <비트> <태양은 없다> <박하사탕> <이재수의 난> 등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영화 <무사> 라인 프로듀서와 메인 프로듀서 데뷔작 <중천>을 거쳐, 최근에는 영화 <밀정>의 프로듀서를 맡아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는데요.


유연근무제는 수많은 영화에서 경험을 쌓은 그가 직접 현장에 부딪히며 얻은 대안인 셈입니다. “하루 8시간, 정년이 보장되는 등 일반적인 근로 환경에서는 유연근무제에 대한 찬반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 겸 문샷필름 대표인 최정화 프로듀서│최정화

"하지만 영화는 보통 1년에 3~4개월 작업하기 때문에 유연근무제를 잘 활용하면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 효율적인 근무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최 대표는 기존 영화계의 살인적인 노동환경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영화 작업이라는 게 생각의 산물이기 때문에 감독의 변화를 무시할 수 없다." 


"감독이 촬영 계획을 주먹구구식으로 잡거나, 시간이 정해졌는데도 무리해서 많은 촬영 분량을 계획하면 결국 예정된 작업을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에 비용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가령 야외촬영을 한다고 했을 때 낮 촬영은 낮에, 밤 촬영은 밤에 해야 하는데 과거에는 비용을 아끼려고 24시간 촬영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최 대표는 그러면서 이런 과거의 노동환경은 영화산업노조가 출범하면서 사용자와 근로자가 서로 대화를 나누었고,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최 대표는 과거와 달라진 환경을 만드는 데 ‘인식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요. 


“먼저 영화를 만드는 작업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쉽게 말해 의미 없는 범위에서 계속 바꾸는 건 지양해야 한다. 정해진 예산과 스케줄 등 주어진 환경에 맞춰 진행해야 한다." 


"두 번째는 구조적인 문제를 바꿔야 한다. 영화와 달리 방송은 사전제작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더 상황이 좋지 않다. 프로그램 중후반으로 갈수록 생방송과 맞먹는 스케줄이 이어진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제작 현장에서 주 52시간 근무제는 먼 미래일 뿐이다.” 

초과근무 많은 예능·드라마 방안 없어 
한 영화 촬영 현장의 모습│영화산업노조

‘주 52시간 근무제’ 등 노동환경에 대한 관심은 방송가에서도 불고 있습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MBC) 본부에서는 5월 29일 사내 노보를 통해 주 52시간 근무제를 앞둔 준비 사항을 점검했는데요. 


‘주 52시간 노동제, 혁신과 동기부여가 답이다’라는 제목의 노보에서는 2월 27일 이뤄진 노사 간 노동시간 단축 합의 소식과 이에 대한 아쉬움, 대안에 관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노동시간 단축 합의에는 장시간 노동 관행을 타파해 구성원들의 적절한 휴식 보장하고, 방송제작 프로세스의 혁신을 통해 노동시간 총량을 점진적으로 단축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는데요. 


또 적정한 보상과 합리적인 근태관리를 제도화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 합의를 바탕으로 MBC는 점차 주당 52시간을 초과하는 평균 노동시간을 매달 5%씩 총 15% 감축하기로 했습니다. 


관행을 앞세운 무분별한 유연근무제 도입을 막고 기본적인 휴식을 보장하는 제도 정착을 위해 노사가 최선을 기울이자는 취지입니다.

2013년 작품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제작현장

이에 대해 노조 측은 합의 후 3개월이 지난 현재 전체적으로 매월 평균 52시간 초과근무 인원이 162명에서 147명으로 약 8% 줄고, 근무시간은 67시간에서 64시간으로 4.5%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 관행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방송 제작 프로세스를 혁신하겠다는 합의 사항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는데요. 


초과근무가 압도적으로 많은 예능과 드라마는 구성원들의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를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조 측은 이 같은 분위기는 보도본부와 시사교양본부 등도 마찬가지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경영진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면서 콘텐츠 경쟁력을 강화하는 구체적 실행 방안이 병행돼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데스킹 방식 바꾸니 분위기 쇄신

방송 촬영 현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 바람이 불며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요? 익명을 요구한 한국방송(KBS) 시사교양국 소속 ㄱ PD는 가장 먼저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을 꼽았습니다. 


“입사 즈음인 5년 전만 해도 ‘이렇게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심지어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도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그램 완성본을 두고 ‘컷 바이 컷’ 형식으로 계속 수정하는 거다.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잘못된 관행이었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직원 수만 7000명(2009 방송산업실태조사 보고서 기준)이 넘는 대형 방송사인 KBS가 변화하기 시작한 건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2018년 7월입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데스킹 단계를 거치는 거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였다. 이런 작업 방식을 바꾸면서 빠르게 분위기가 쇄신됐다.” 

한국방송(KBS) 드라마 <파트너> 제작모습│한겨레

ㄱ PD는 7월 주 52시간 근무제 법적 의무화를 앞두고 회사에서는 팀별 근무환경 조사를 하고 있다고도 밝혔습니다. “보직자들은 주 52시간 준수를 위해 고민하는 게 보인다. 관련 교육도 많이 하고 의무적으로 공지 사항을 보고 숙지하게 하고 있다."


"특히 방송사 특성상 여러 계약조건의 직원이 존재하는데 회사 노무팀에서도 대비하고 있는 걸로 안다. 주 52시간을 지킬지, 유연근무제를 선택할지 개인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다.”


현장에서 느끼는 아쉬운 점은 없을까.ㄱ PD는 바람직하고, 당연히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세부 내용에서 불편한 점은 분명히 있다고 말합니다. 방송사 특성상 구조적인 부분이 바뀌지 않으면 주 52시간 근무제는 지키기 쉽지 않다는 것인데요.


“내가 속한 시사교양팀은 유연근무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지만 사실 드라마나 예능처럼 현장 상황에 따라 변수가 있는 팀에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주 52시간 근무제 정착과 함께 제도 시범 운용에 따른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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