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의 촛불혁명 vs 연금 사회주의? 올바른 주주권 행사 지침 '스튜어드십 코드'

조회수 2019. 9. 9. 10: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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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총수가 주주들의 투표로 이사진에서 퇴출되는 첫 사례가 나오면서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 일어났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반면 재계 등 일부에서는 연기금을 움직여 기업의 경영권을 침해한 ‘연금 사회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자세한 내용 살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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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촛불혁명
3월 27일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 모습│공동취재사진

대한항공 주주들은 3월 27일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을 참석 주주의 3분의 1이 넘는 35.9%의 반대로 부결시켰습니다. 


대한항공 정관 규정상 이사로 선임되려면 참석 주주 3분의 2(66.7%)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조 회장은 64.1%의 찬성을 얻는 데 그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조 회장 쪽은 대한항공 지분 33.4%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이지만, 2대 주주 국민연금(11.6%)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고 외국인과 소액주주도 조 회장에 등을 돌려 연임에 실패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앞서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와 국민연금 의결권 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조 회장 재선임안에 반대투표를 권고한 게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됩니다. 여기에 캐나다 연금 등 해외 공적기금도 반대에 가세했습니다. 

‘조양호 퇴출’ 뒤 한진 계열사 주가 상승 

국민연금은 “(조 회장이)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권 침해 이력이 있다”며 연임 반대 이유를 밝혔습니다. 조 회장은 현재 총 270억 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이며 조 회장 일가는 ‘땅콩 회항 사건’이나 ‘물컵 갑질’ 등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아왔습니다.


주식시장은 대한항공의 기업가치를 떨어뜨리는 ‘오너 리스크’가 실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조 회장 이사 연임안 부결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항공을 비롯한 한진 계열사 주가는 일제히 동반 상승했습니다. 


의결권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국민들이 주인인 국민연금과 소액주주들이 힘을 합쳐 대한항공의 잘못된 경영을 바로잡은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라고 환영했습니다.

조 회장의 이사 연임 부결은 국민연금이 2018년 7월 도입한 스튜어드십 코드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승객의 안전과 편익을 최우선하는 스튜어드(승무원)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고객이 맡긴 돈을 최선을 다해 관리하기 위한 기관투자자들의 주주권 행사 지침이지요. 문재인 대통령은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장기적인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통한 주주권 행사 강화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했습니다.


1월 23일 청와대 회의에서도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 탈법과 위법에 대해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주주 권리 행사가 경영권 침해? 

조 회장의 이사 연임 부결에 대해 재계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권을 흔드는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경영권은 노동조합의 경영 참여 요구에 맞서 나온 말로, 주주를 상대로 주장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는 “주총 안건에 찬반을 표결할 수 있는 주주의 권리 행사를 경영권 침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재산권과 상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국민연금의 반대표 행사는 경영에 개입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산가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라는 의견이 일반적입니다.


경영의 자율성은 보장돼야 하지만, 총수 일가의 명백한 불법·비리 행위 때문에 기업의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주총 거수기’ 구실만 한다면 국민의 노후자금이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연금이 자본시장의 호랑이? 

사실 국민연금은 재계가 말하는 것처럼 자본시장의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전인 2013년과 2016년에도 조 회장의 이사 연임에 반대표를 던졌지만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올해도 3월 29일 한진칼 주총에서 주주 제안으로 내놓은 정관 변경안이 부결되는 등 대부분은 대주주와의 표 대결에서 패배했습니다. 국민연금이 2018년 반대 의결권을 던진 주총 안건 539건 중에서 실제 부결된 안건은 5건(0.9%)에 그칩니다. 


이찬진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위원은 “현재 많아야 12% 정도인 국민연금 지분으로 사외이사 선임 같은 경영권 관여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송민경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스튜어드십코드센터장도 “이번처럼 대표이사의 법적·윤리적 문제가 켜켜이 쌓여 다른 주주들의 의결권 행사 의지가 커졌을 때만 국민연금의 경영권 관여가 가능해진다”고 짚었습니다. 

대한항공 무책임한 대응이 자초했나

대한항공의 무책임한 대응이 부결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의 장기적 가치 향상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투자한 회사와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전제로 주주 활동을 진행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기업의 위험 요인을 포착한 뒤에도 경영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치부터 단계적으로 주주권을 실행합니다. 기업의 문제가 감지되면 우선 비공개 서한을 보냅니다. 


해결이 안 되면 비공개 중점관리 기업으로 선정합니다. 나아질 기미가 없으면 공개 중점관리 기업으로 전환하고 공개서한을 보냅니다.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경우 더 이상의 조치는 없습니다. 


주주가치 훼손이 지속되는데도 이를 방지하고 개선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기업 입장에서도 성실히 응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한항공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국민연금은 2015년 1월 ‘땅콩 회항’ 이후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비공개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지만 회사 쪽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2018년 5월에는 공개서한을 발송하고 6월에 경영진 면담을 요청했지만 대한항공은 제대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홍순탁 회계사는 “국민연금이 경영진에 추가적인 견제를 하기 어렵다는 걸 대한항공이 잘 알고 있었기에 전향적인 조치를 내놓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국민연금은 조 회장을 직접 겨냥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국민연금 독립성 문제 삼는 시선 

그런데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는 데 지배구조의 독립성 논란이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입니다. 


기금운용위원 20명 가운데 5명이 현직 장·차관이고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당연직으로 참석합니다. 일부 언론은 “이런 구조 아래에서는 국민연금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집사가 아니라 정권의 집사가 되는 것”이라며 집중적으로 비판합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복지부 장관이 기금운용위원장에서 빠지는 방안부터 기금운용위를 금융통화위원회처럼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조직으로 만드는 방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안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다만 국민연금의 지배구조 개편은 역대 정부에서 이루지 못한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힙니다. 이를 둘러싸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10여 년 동안 갈등과 대립을 반복해왔습니다.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문제 삼고 있는 언론의 속내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강화하면 안 되고 기업 관여 활동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연금 지배구조 개혁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강화하는 게 국민연금의 독립성 부족이라는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습니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기 전에는 국민연금이 지금처럼 용감하지 못했습니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한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제일모직에 유리하도록 왜곡된 합병 비율에 찬성함으로써 삼성물산의 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은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합병 과정 당시 복지부 장관과 기금운용본부장은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입니다.

피터 드러커가 말한 연금 사회주의는? 

이찬진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제도적 산물이 스튜어드십 코드”라고 말합니다. 국민연금의 정치적 독립성에 문제가 있다면 스튜어드십 코드를 더욱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죠. 


스튜어드십 코드에는 절차와 과정의 투명성을 통해 정부의 입김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기 때문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원칙 2는 이해상충 방지 정책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노동자, 정부 등 국민연금 이해관계자의 목적에 따라 의사결정이 왜곡되지 않도록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를 두도록 했습니다. 


주주권 행사의 핵심 역할을 하는 수탁자책임 전문위는 정부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민간 전문가들로만 구성됐습니다.

재계와 일부 언론은 이번에도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을 좌지우지한다며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연금 사회주의라는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지금 상황과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연금 사회주의는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1976년 펴낸 <보이지 않는 혁명>이라는 저서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합니다. 


드러커는 노동자가 생산수단과 자본을 소유하는 체제를 사회주의로 정의한다면 미국이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라고 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노동자들의 노후 복지를 위해 기업연금을 확대하면서 퇴직연기금이 미국 상장기업 지분의 3분의 1가량을 보유해 대주주로 올라섰습니다. 


그는 자본시장을 통해 연금이 기업을 지배하면 그 연금의 주인인 노동자가 기업을 지배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현상을 연금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입니다. 정부가 연금을 통해 기업에 간섭한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의미죠. 

연금 자본주의 또는 수탁자 자본주의 

주진형 전 대표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맥락은 무시한 채 그저 사회주의가 나쁘니 연금 사회주의도 나쁜 것이라는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기 위해 연금 사회주의란 용어를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도 “연기금을 통해 노동자들이 기업을 지배한다는 드러커의 연금 사회주의는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말했습니다.


또한, “그런데도 이 낡은 레코드가 우리 사회에서 국민연금의 정당한 주주권 행사를 가로막는 논리로 쓰이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습니다.


조흥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은 “스튜어드십 코드는 연금 가입자들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이 부딪쳤을 때, 무조건 가입자의 이익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선언이므로 연금 사회주의가 아닌 연금 자본주의”라고 규정했습니다.


이종오 사무국장은 “스튜어드십 코드는 돈을 맡긴 고객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주주권 행사 지침이라는 점에서 수탁자 자본주의라는 말이 적확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박근혜정부 때 민간 주도해 도입 

스튜어드십 코드는 문재인정부 들어 시작된 게 아닙니다.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6년 12월 민간 주도로 도입됐습니다. 


앞서 2014년 11월에는 금융위원회가 한국판 스튜어드십 코드 제정 방침을 밝혔고 2015년 3월에는 스튜어드십 코드 제정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국민연금의 삼성전자 지분이 이건희 회장 지분보다 많은데도 경영진에 대한 견제를 제대로 해왔는지 매우 의문입니다. 거대 권력이 된 대기업을 견제할 효과적인 수단으로 공적 연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발언은 어느 정부의 인사가 했을까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정부 핵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2011년 4월 26일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의 곽승준 위원장은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및 지배구조 선진화’ 토론회에서 재벌 견제를 위해 국민연금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면서 이같이 제안했습니다.


문재인정부가 연금 사회주의를 감행했다면 이명박·박근혜정부는 연금 사회주의를 획책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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