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주간지 공감

금오도의 섬 둘레길 이름은 ‘비렁길’입니다. ‘벼랑’의 여수 지방 사투리인데요. 이름은 살벌하지만 아름답기로는 남해에서 손꼽힙니다. 이곳에서 일상을 벗어나 자연속 인문학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한번 살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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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 뱃길로 20분 만에 도착하는 가까운 탓도 있지만 섬 트래킹 하기에 좋은 섬으로 이름나 한 해 30만 명이 찾습니다. 특히 봄에는 육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데요. 바로 동백꽃 때문입니다. 

비렁길 곳곳에 있는 동백나무 터널을 지나다 보면 붉은 동백꽃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남녘의 동백꽃은 무려 반년간 피며, 늦가을에 피기 시작해 늦봄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합니다. 

가을에 피면 추백(秋栢), 봄에 피면 춘백(春栢)이고, 겨울에 피어야 비로소 동백(冬栢)인데요. 그러기에 동백은 장수하는 꽃이고, 향기가 없습니다다. 대신 그 붉은 빛과 꿀로 동박새를 불러 꽃가루를 퍼뜨립니다. 조매화(鳥媒花)입니다. 

이파리도 유혹적이며, 윤기가 흐르고 광택이 납니다. 동백의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요. 나무에서 피고, 떨어져서는 땅에서 핍니다. 다른 꽃잎들처럼 낙화하는 순간 시들어 비참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땅에 떨어져서도 한동안 당당한 모습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동백꽃은 땅에서도 눈부신 매력을 발산하는데요. 

국내 유일한 ‘섬학교’ 교장인 강제윤 시인이 육지 사람들을 3월 1일부터 2박 3일간 여수 금오도의 비렁길과 금오도와 붙어 있는 안도로 초대한 이유도 그런 동백의 매력과 함께 봄이 오는 남녘 바다 내음을 맛보이고 싶어서였습니다. 

섬학교는 섬에 있는 학교가 아닙니다. 한 달에 한 번 강 시인이 사람들을 모아 1박 2일이나 2박 3일간 섬을 찾아가 걸으며 섬에 스며드는 학교인데요. 지난 2012년부터 시작한 섬학교는 이번이 80회째입니다. 

8년째 고집스럽게 지속하고 있는 인문학 교실입니다. 서울에서 새벽 5시 50분에 출발하는 버스에는 이미 40명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수 배편 시간에 늦지 않게 서둘러야 합니다. 

한동안 조용히 달리던 버스에 강 시인의 친절하고 자세한 섬에 대한 설명이 가득 차는데요. 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의 설명을 듣는 순간 이미 마음은 푸른 수평선을 향해있습니다. 여수 돌산도 신기항에 도착해 배를 타고 버스도 함께 타며, 드디어 금오도 여천항에 도착하는데요. 매운탕으로 섬에서의 첫 점심을 먹습니다. 

잠시 쉰 뒤에 비렁길 트레킹에 나서는데요. 이날 오후 트레킹은 금오도 비렁길의 3, 4, 5코스며, 모두 10km입니다다. 강 교장의 설명을 듣고 트래킹 준비를 합니다. 대부분 섬학교 경험자들입니다. 

40~50회 참가한 단골부터 몇 차례 참가한 이들까지 다양합니다. 산길에 접어들면서 그들의 발걸음에 탄력이 붙는데요 곧 동백나무 터널이 외지 손님들을 반깁니다. 푸른 바다와 하늘, 진한 녹색의 잎 사이에 붉은 동백꽃은 전혀 수줍음이 없습니다. 

강 교장은 보길도 출신입니다. 고산 윤선도의 유적이 있는 보길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인천으로 이사 갔습니다. 대학은 10년 만에 졸업했는데요. 시국 사건으로 구속돼 3년 2개월 옥살이를 했습니다.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평범하지 않게 보냈습니다. 문득 자신이 태어난 섬에 가고 싶었습니다. 고향 보길도로 들어가 윤선도가 살았던 ‘세연정’ 옆에 돌과 흙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동천다려’라는 이름을 붙이고 들르는 이들에게 차와 술, 음악을 내주며 혼자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인’으로 이름이 났는데요. 완도군에서 보길도 부용리의 40만 톤 규모 댐을 400만톤으로 10배 증축하겠다고 하자 그가 맨몸으로 막았습니다. 

댐이 증축되면 고산 윤선도 유적지와 상록수림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 댐 증축이 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기존의 댐을 활용하면서 해수담수화시설을 설치해 가뭄에 대안으로 사용 하자고 주장 했던 것입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보길도까지 와서 중재를 해 단식을 풀었고, 결국 댐 증축 대신 노후 관로 교체만으로 70% 이상의 물을 더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뒤 8년 만에 보길도를 떠났습니다. 평생 떠돌며 살고 싶은 열망이 그를 사로잡았는데요. “우리나라 유인도를 모두 가보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직접 내 발로 걸어서 그 섬에 사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남한의 유인도는 470여 개입니다. 그는 이미 400여 개의 유인도를 다녀왔습니다. 2015년에는 섬연구소도 만들었습니다. 섬을 보존하고 이해하는 이들과 힘을 모은 것인데요. 성과도 많았습니다. 

남해 여서도의 돌담은 2㎞에 이르는 명물입니다. 주민들의 요청으로 완도군에서 이 돌담을 허물고 도로를 만들려고 하자, 전남도와 주민들을 설득해 돌담을 지켜냈습니다. 관매도의 아름다운 폐교를 진도군에서 대명 리조트에 매각하려는 것을 언론 기고와 서명운동 등으로 지켜냈습니다. 

간척 사업으로 썩어가는 세계 2곳 뿐인 천연비행장이자 천연기념물인 백령도의 사곶해변 살리기 운동을 해 문화재청이 역학 조사를 하게 만들었다. 3년 전에는 섬 사진 전시회를 인사동 갤러리에서 열기도 했습니다. 

박용주(79) 씨는 부인 한수복(76) 씨와 섬학교에 세 번째 출석입니다. 4년 전에 추자도를, 2년 전엔 연홍도를 부부가 함께 다녀왔는데요. 부부는 10년 전 60대 중반의 나이에 손잡고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도 했습니다. 

건설업 쪽에서 일하다가 은퇴한 박 씨는 국선도를 30년 수련한 고수입니다. 한 씨는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 탁구를 칠 정도로 둘 다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단순히 걷는 것뿐 아니라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요. 섬의 맑은 공기와 신선한 먹거리도 섬학교의 큰 매력이지요.”

비렁길의 맛은 짜릿함에도 있습니다. 해가 등 뒤에서 바다에 내려앉는데요. 금빛 노을 물결이 가파른 바닷가 벼랑길을 호위합니다. 부지런히 걸어야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금오도와 다리로 연결된 안도의 펜션에 도착해 짐을 풉니다. 첫날 저녁인데요. 해안가 식당은 강 교장의 단골 식당입니다. 온갖 해초와 생선회, 해물이 한 상 가득 차려졌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이름하여 ‘백년손님 밥상’입니다. 육지에서는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주기도 했지만 모두 가난한 섬에서는 알을 얻어야 하는 씨암탉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갯가에 나가 온갖 해산물을 따다가 차려주었습니다. 

배말(삿갓조개), 군부(군봇), 거북손 등 갯바위에 붙어서 살아가는 따개비와 가사리, 미역 등의 해초를 넣어 만든 비빔밥이 백년손님 밥상입니다. 

섬학교에 53번째 출석한 고참 부부가 나란히 앉아 정겹게 식사를 합니다. 한춘식(60), 유옥남(55) 부부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도 함께 했습니다. 

“처음엔 섬에 가서 그곳 특산품도 적극적으로 사고, 소외된 섬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 섬학교에 출석했어요. 다니다 보니 나 자신을 위해 섬을 찾고 있음을 알게 됐어요. 아내가 허리가 불편했는데 섬에 다니며 허리 통증도 사라졌고요.”

이틀째 아침 일출을 보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바닷가에 갔지만 해는 짙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오전에는 비렁길 1, 2코스(6.5km)를 돌고, 오후에는 안도를 한 바퀴(4km) 도는 일정이다. 무릎이 뻐근합니다.

 

신지영(40) 씨는 한의학 박사인데요. 이번이 두 번째 섬학교 출석입니다. “단절된 느낌이 좋아요. 혼자 와서 오롯이 섬을 즐겨요. 바쁜 도시 생활과 잠시나마 단절된 상태가 바로 힐링입니다.” 

평소 산행과 캠핑을 자주 한 덕분인지 신 씨는 강 교장과 함께 속도를 맞추어 비렁길을 걷습니다. 어느덧 어둠이 깔린다. 둘째 날 저녁은 식사를 마치고 흥이 넘치는 뒤풀이도 이어집니다. 한민족 고유의 창에서부터 가곡 ‘명태’, 신나는 가요까지 반주도 없이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