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진서, "겨울의 한라산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조회수 2021. 1. 25. 10: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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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겨울의 한라산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영화배우 윤진서는 제주 한라산의 정상을 향해가던 중 기묘하게도 안정감과 포근함이 들었다고 하는데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거세게 일었던 제주의 등산길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던 걸까요?


윤진서 배우의 '겨울의 한라산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제주의 겨울은 늘 한적하고 고요하다.

 적어도 강원도나 경상도의 바다 마을보다는 훨씬 더 그렇다. 이제 고작 제주에서 산 지 6년 차이기 때문에 ‘제주도 사람’이라는 칭호는 아직 스스로도 붙이기 어렵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눈이 오면 집 밖에 나갈 생각일랑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제주의 겨울은 오직 한라산뿐인 것이다. 어딜 가도 보이는 한라산 꼭대기의 하얀 눈과 아래로 점점 여유 있게 우거진 여전한 녹음. 한라산은 여름의 바다에 가려 소리 소문 없이 자리를 지키다가 겨울이 되어서야 생일을 맞은 듯 머리에 생크림을 뒤집어쓰고 제주의 주인공이 된다. 


어느 날, 서울에 사는 친구가 한라산의 설산을 보기 위해 1박 2일로 온다고 했다. 아니, 서울에서 여기까지 그걸 보러 온다고? 친구나 만날 요량으로 등산 장비 하나 없이 산으로 간 내게는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눈보라로 앞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는 데다 눈보라 속에 신발은 두 시간이 되기도 전에 젖고야 말았다. 무릎까지 쑥쑥 빠지며 눈 위를 걸어야 했지만, 곧 그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되었다. 우린 말없이 앞만 보며 걸었고, 가끔 마스크 너머로 눈이 마주치면 그것으로 안도했다. 두 시간쯤 걸어서 윗세오름에 다다랐을 때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헤어지더라도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출처: 윤진서
겨울의 한라산

 혼자가 되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는 거세게 일었다. 윗세오름으로 향하는 빨간 깃발을 빼고는 모든 것이 새하얗게 세상을 지워나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눈보라가 치는 해발 1700미터에 올라왔는데 기묘하게도 안정감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하얀 눈이 내 키만큼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안을 파고들어 잠을 청하고 싶을 만큼이나 유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눈을 바라보며 야릇함과 두려움이 교차했고, 숨은 차올랐다. 눈은 한없이 평안해 보였다. 


대피소에서 요기를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위력적인 태양이었다. 구름이 가리고 있던 한라산 아래 제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라산을 감싸고 있는 오름들과 저 아래 목을 축이는 새들, 그리고 이곳을 받쳐 들고 있는 바다였다.


나는 겨울의 한라산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경배하는 친구이리라. 그런 마음을 한가득 채우고서 어리목으로 하산했다. 올라올 때와는 달리 바람이 불지 않는 산세를 고즈넉하게 거닐며 안전을 살피는 새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가능한 한 침묵하며 혼자 걷기를 추천한다.


집으로 돌아와 난생처음 등산 장비 몇 가지를 샀다. 도착하는 대로 관음사를 통해 백록담에 다시 올라볼 계획이다. 그리고 1년 중 하룻밤만 개방된다는 새해맞이 캠핑의 꿈도 꿔볼 수 있겠다. 이전의 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한라산의 겨울은 그렇다. 나처럼 무지한 이들에게 조금씩 진짜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지도.


ⓒ 윤진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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