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여성 파일럿은 누구?

조회수 2019. 1. 21. 12: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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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최초로 시도한 사람들에겐 선구자, 선각자라는 수식어가 붙지요. 그만큼 첫 시도라는 것은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권기옥.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수많은 업적을 이룬 인물입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한번 들여다볼까요?

위클리공감 홈페이지에서 원문기사 보러 가기


독립의 꿈, 날개로 하늘을 날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보면, 광복 이전 독립운동의 삶을 넘어서 광복 이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기점에 서 있었던 선각자와 만나게 된다. 


한국 근현대사를 넘나든 여성들, 그중에서 권기옥에겐 최초 여성 비행사 외에도 독립운동가, 출판인, 공군의 어머니, 사회사업가 등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특히 자신의 전 재산을 대학생 장학사업을 위해 사회에 환원한 삶의 자세는 그 시대의 파격적인 여성 이미지였다.

내가 남기고자 하는 말은 그동안 머리는 좋으나 가난하게 태어난 대학생들을 위해 조그만 성의나마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심정에서 권기옥 장학금을 지급해왔고… 내 생명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이 사업은 계속해서 진행되도록 하고자 하는 바이다. 내 소유하고 있는 전 재산은 대학생들의 장학금을 위해 사용하기 바란다….

독립 자금 모아 상하이임시정부로

권기옥(1901~1988)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아버지 권돈각과 어머니 장문명의 2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평양은 관서지방 제1 경제도시로 풍부한 임산·지하·농산자원을 원료로 한 산업이 활발했고 일본의 병참기지화 식민정책으로 평남공업지대의 주요 지역이 된 곳이었다.


1908년 평양에 장티푸스가 창궐하자, 장대현교회는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때 권기옥 가족도 교회와 인연이 된다. 


열한 살 때 평양 은단공장에 여공으로 취직해 성실하게 생활하는 권기옥을 유심히 보았던 장대현교회에서 권기옥에게 송현소학교 입학을 권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을 감안하여 월사금 40전을 면제해주며 학업의 길을 열어주었다.


장대현교회가 운영하는 송현소학교에 입학한 뒤 권기옥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학업에 열정을 쏟았던 권기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수한 ‘갑’반에 배정되었고 1915년에 ‘고등과’로 진학했다. 


1918년 4월,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학한다. 교사 박현숙은 의지가 곧고 열의가 강한 권기옥에게 ‘송죽회’를 소개했고, 그 추천으로 죽형제회에 들어갔다.


숭의여학교의 ‘송죽결사대’는 나이가 많고 신망 있는 선배가 중심이 된 송형제회와 선배의 추천을 받은 후배의 죽형제회로 구성된 비밀결사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행상 활동, 수제품 등을 판매한 돈을 5년간 모아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전달했다.


임정 행동대 ‘평양 폭파’ 지원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었을 무렵, 송죽결사대는 태극기 200장을 제작해 3·1운동에 뛰어들었다. 그해 3월 5일 숭의여학교 기숙사생이 만세 시위를 주도했는데, 권기옥은 행상으로 변장하고 투쟁의 중심에 섰다. 


그때 일본 경찰에 검거돼 3주간 구류되었고, 평양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6개월 형을 받았다.


“열아홉 살 적 3·1운동 때 내 목숨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이후는 덤으로 사는 삶이었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권기옥의 고국에 대한 생각은 남달랐다.


1917년 5월, 평양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였던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멋진 모습을 통해 권기옥은 ‘비행술을 배워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리라!’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비행사가 되는 길은 불투명했다. 


그는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뒤 평남 안주·진남포, 경성, 대구 등 전국 20여 곳에서 사회 개혁 운동을 추진한 ‘결백회’와 ‘면려회’, 민중 계몽 운동을 한 ‘브라스 밴드단’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조선용의자 133’ 명단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그런 권기옥 일생에서 변화를 맞이하는 사건이 있었다. 권기옥은 1920년 7월 상하이임시정부 행동대의 밀파 계획을 전해 듣고 안경신, 장덕진 등을 통해 활동 지원 요청을 받았다. 


그는 그들에게 은닉 장소를 제공하고 폭탄 제조와 거사 논의에 참여하며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 폭파 작업 준비에 마음을 쏟았다. 1920년 8월 3일 오후 9시 30분, 폭음이 평양 시내 정적을 깨뜨렸다. 


그리고 다음 날, 언론에 평양 폭파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이후 권기옥은 용의선상에 오르며 일본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었다. 그때 권기옥은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시골 여인으로 변장하고 배로 탈출했다.


상하이로 망명한 권기옥은 김순애, 손정도, 안창호, 노백린 등 독립운동가를 만나면서 자신의 잊었던 꿈을 펼치기 위해 도전을 거듭했다. 1923년 6월에 홍따오여학교 졸업, 상하이인성학교 교사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1924년 중국 윈난육군항공학교에 입학했다.


그 뒤 1926년 7월, 중국 윈난육군항공학교 1기 졸업생,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이름을 알렸다. 졸업한 뒤에는 북경 개혁성향 풍옥상군의 항공대,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항원으로 활동했고, 1932년 상하이사변에서 비행기로 일본군에 기총소사해 중국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다.


“꿈이 없으면 송장과 다를 게 없다”

권기옥은 1938년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약한 뒤 상하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한국광복군 건군 작전 계획에 참여했고, 공군설계위원회 위원, 대한애국부인회 사교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에도 그는 국가 재건에 힘을 쏟았다.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여성 전문위원을 거치며 한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자처했다. 1971년 중화민국 비행흉장 공군 일급 상장을 받으며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과 자리매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국가의 미래 주역에게 남겨 청년들에게 꿈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말했던 권기옥. 그는 한국 근현대사를 넘나든 선각자였다.


“꿈을 가지라우! 꿈이 없으면 송장이나 다를 게 업디 않가서! 특히 젊은이들은 꿈이 있어야 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라우. 못할 게 뭐가 있어.”


ⓒ심옥주_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하지만 권기옥을 수식하는 단어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고 느껴지네요. 


그녀의 뭉클한 조국애와 선각자적인 삶에서 배워야 할 점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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