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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할머니들의 사랑스러운 초상화

한국 최초의 여성 수중 사진작가 와이진, 70대 프리다이버 해녀를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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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 '불턱'에 모인다. '불턱'은 해변에서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아 만든 공간이다. 할머니들은 물질(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하다가 이곳에서 쉬거나 옷을 갈아입는다. 얼룩무늬 잠수복을 입고 작살과 그물 바구니, 스티로폼 도구 같은 장비들을 모은다. 그런 다음 수다를 떨고 노래를 부르면서 구불구불한 화산암 위로 걸어간다. 바다에 도착하면 낡은 물안경을 쓰고 거친 파도로 뛰어든다.

이들은 바로 ‘한국의 프리다이버’ 해녀다. 주로 제주도에 거주하는 해녀들은 스쿠버 장비도 없이 잠수해 채취한 해산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제 수천명 남은 해녀들의 평균 연령은 75세다. 사실 일의 강도를 생각하면 이들의 나이는 놀랍다. 낚시 철에는 하루 5시간 잠수해 문어와 해삼, 전복 등을 채취한다. 제주 해녀들은 최대 2분까지 숨을 참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 번에 보통 30초 정도 잠수한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 해녀의 역사는 6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질은 사실 여성만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18세기 무렵부터 해녀의 수가 해남의 수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유 중 하나는 섬 내 갈등으로 남성 인구가 줄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체지방량이 많아 차가운 물에서 더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은 남자들도 물질을 돕는다. 해녀의 남편들은 바닷가에서 아내가 물질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획물의 무게를 재고 분류하는 작업을 돕는다.

해녀는 지역의 무속신앙과 바다 전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제주의 경제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특히 제주 해녀들은 보통 물질을 할 뿐 아니라 소규모 농사를 지었다. 여성들은 보통 어업 협동조합을 통해 수확물을 판매하고 연간 약 1500만원을 벌었다.

요즘 한국에선 해녀를 거친 육체노동자로 보는 인식이 강하다. 이런 편견을 바꾸고자 한국 최초의 여성 수중 사진작가 와이진(본명 김윤진)씨는 7년 전부터 해녀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담는 사진 프로젝트 ‘행복한 해녀’를 추진했다. 김 작가의 사진은 전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해녀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론이 퍼졌을 시기였다. 김 작가는 사진을 모아 2017년 10월 포토북 ‘해녀-한국의 여성 다이버’를 한영 2개 언어로 출간했다.

김 작가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사진작가로 일한다. 이 밖에 다이빙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 김 작가는 2012년 해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은 쉽지만은 않았다. 먼저 해녀들을 설득하는 일부터 고비였다. 김 작가는 “할머니들이 어린 육지 여성이 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했다”고 회상했다. 또 “만지작거리던 대형 카메라를 특히 경계했다”고 털어놨다.

김 작가도 겁을 먹었다. 해녀들은 항상 큰 목소리로 말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었다. 해녀들은 잠수를 자주 해 귓속 기압의 부침을 자주 겪어서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그래서 김 작가는 평소보다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김 작가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경계를 풀었다. 카메라를 등 뒤의 그물만큼이나 편하게 생각하게 됐다. 김 작가의 포토북 내용처럼 이들 사이에는 점차 신뢰가 쌓였다. 해녀들은 김 작가를 딸처럼 따뜻하게 대해줬다. 춥거나 배고프지 않은지, 불편하지 않은지 물어보면서 챙겼다. 김 작가는 “할머니들이 마음을 열어 주실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라며 “해녀들이 지닌 부드러움과 강인함 두 모습을 이해한 것이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한국 사회에서 해녀는 가난하고 늙고 유별난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김 작가는 이런 편견이 깨진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 날 해녀 한 분이 사진 촬영 전에 립스틱을 바르겠다고 하셨어요. 그때 어머니들도 저처럼 평범한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해녀들은 다른 사진작가들이 와서 촬영할 땐 무거운 전복 꾸러미를 들게 해서 못생긴 표정만 나온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들도 다른 이들처럼 사진에 잘 나오고 싶어 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강하고 거친 모습보다는 부드러운 모습을 포착하고 싶었다. 또 해녀 간의 각별한 우정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김 작가가 포착한 사진 속의 해녀들은 일하기도 하고 쉬기도 한다. 또 혼자 있기도 하고 무리 지어 활동하기도 한다. 육지에선 무거운 짐을 몸에 이고 물속에선 발레리나처럼 헤엄친다. 바닷속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어두운 해초와 극명한 대조를 이뤄내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포토북에는 잠수복 위에 자주색 셔츠를 입은 여성이 거꾸로 해산물을 채집하는 모습이 전면으로 나온다. 흰 장갑을 착용한 손으로 해초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해산물을 찾는다. 한 마디로 현대판 인어다.

김 작가는 해녀들처럼 한국의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2008년 미국 밴드 너바나의 앨범 ‘네버마인드’ 커버를 보고 수중 촬영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한국의 사진 업계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초기에는 가수의 앨범 커버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틈새시장인 수중 사진 분야로 진출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명 수중 사진작가인 제나 홀러웨이에게 조언을 들었다. 김 작가는 “한국의 제나 홀러웨이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여러 일을 하지만 수중 촬영에 집중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김 작가는 해녀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수중 촬영 기술이 있었다. 또 적절한 시기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해녀의 수가 급속도로 줄고 있는 시기였다. 해녀의 수는 1970년 1만4000명에서 2015년 4000여명으로 급감했다. 사회와 경제의 구조가 바뀐 탓이다. 김 작가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에도 해녀 사망자가 발생했다. 게다가 젊은 여성 중에 해녀 일을 배우는 인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김 작가는 해녀가 사라지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힘들고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부분도 있어서다.

해녀는 수십년 안에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 작가의 시선이 남긴 사진에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김 작가도 해녀는 아니지만 한국 최초의 여성 수중 사진작가로 해녀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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