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터줏대감이었던 아재들, '힙지로'에서는 종적을 감춘 이유

조회수 2020. 12. 7.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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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같은 골목을 돌고 돌며 헤맸다. 휴일이라 공구상가도 다 문을 닫아 어두컴컴했다. 통유리로 불을 밝히고 있는 작은 가게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인스타그램에서 찾은 그 식당이 맞았다. 대기 리스트에 이름부터 적었다. “빨리빨리 안 와!” “아니 길을 못 찾겠어.” 12살 차이 띠동갑 사촌 동생에게도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을지로 골목은 미로처럼 작은 길이 이어져 있다.

조금 더 기다려 식당에 입장했다. 캐나다 주인장에게 막걸리를 주문하자 친절하게 설명한다. “송묭솝 맥걸리는 맥걸리계의 평양냉면으로 불려요. dry한 맛이 특징입니다” 서울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송명섭 막걸리를 판다. 주인장이 직접 와인 따르듯이 조심스럽게 막걸리를 졸졸 따라준다. 양은그릇 대신 투명한 유리잔에 뽀얀 막걸리가 채워졌다. 유럽풍 안주까지 곁들이자 사촌 동생이 반색한다. 계산서를 보고 속이 쓰렸으나 사촌 동생이 만족한 것으로 위안 삼았다.

지난 추석 때 있었던 일이다. 친척 간 우의를 다지고자 20대 중반 사촌 동생 눈높이에 맞춰 장소는 ‘힙지로’를 선택했다. 메뉴는 내 취향인 막걸리로 나름대로 접점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동생 반응은 나쁘지 않았으나 도대체 왜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곳에 새로운 맛집이 자리 잡는 것인지 의문이 일었다. 나름대로 정리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을지로 골목투어 안내문.

첫째는 접근성이다. 을지로는 젠트리피케이션 위험이 적으면서 역세권이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 2, 4호선 환승역 을지로3가역, 그리고 2, 5호선 환승역 을지로4가역까지 있다. 을지로는 도심에서 오가기 편리한 매력적인 장소다.

을지로 골목에 피에타 촬영장소였음을 알리는 게시물이 있다.

둘째는 레트로 감성이다. 을지로에는 유서 깊은 노포도 많다.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피에타 속 음침한 공구 골목이 을지로다. 숨은 명소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세운상가에 새로 입점한 가게.

셋째는 두 번째 이유인 레트로 감성의 결과물이다. 보여주기 좋다. 지금은 관종의 시대다. 김난도 교수가 2020년 키워드로 꼽은 단어는 ‘멀티 페르소나’다. 다양한 자아를 발산하는 것이 흉이 되지 않는다. 자기 내면의 다양한 욕구를 SNS에 표현하는 일은 자기만족이며, 덤으로 ‘좋아요’를 얻는다.

을지로의 공구상가

그렇다면 원래 을지로의 터줏대감이었던 아재들을 ‘힙지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까닭은 무엇인가.(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를 촬영했을 때, 그러니까 2012년만 해도 을지로는 조금 과장하면 아재가 99%였다.) 

첫째로 가성비가 좋지 않다. 을지로 대표 음식은 노가리 골목과 골뱅이 골목이었다. 근처 쌍용건설 직장인을 비롯해 인쇄 골목, 공구상가 종사자들이 가성비 좋은 안주로 2차, 3차까지 술자리를 즐겼다. 그런데 이른바 힙지로 맛집의 메뉴는 절대로 싸지 않다. 소주가 5000원인 경우도 허다하다. 창렬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절대로 혜자스럽지는 않다.

꼬마건물 꼭대기 카페에 옥상을 활용해 로프탑을 꾸며놓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구도를 연출할 수 있도록 한다. 사진은 을지로 옆 충무로에서 촬영.

둘째로 너무 은밀하다. 이른바 힙지로 맛집은 건물 꼭대기에 있거나 다소 엉뚱한 위치에 있다. 포털 지도에 등록하지 않고 인스타그램으로만 홍보하는 식당이나 카페도 있다 보니 검색해서 찾아가려고 해도 잘 나오지 않는다. 자주 방문한 장소임에도 길을 못 찾기 십상이다. 이런 곳에서 모임을 주선했다가 길 찾기 힘들었다고 면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로 불편하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옥상 카페를 힘들게 올라가서 그다지 편하지 않은 의자가 앉아야 할 이유가 없다. 아재들은 자랑용 사진을 찍어서 올리려고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종을 긍정하는 교육을 받지 않았고 그러한 사회적 환경을 접해본 경험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인스타그램을 거의 하지 않는다.

세운상가 골목에 붙은 포스터. 재개발로 인한 갈등이 있다.

을지로란 지명에서 을지는 중국인 거주민이 많았던 근대 조선의 과거를 지우려는 시도였다. 살수대첩으로 수나라를 물리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가져왔다. 힙지로의 힙은 아재들을 물리치려는 작명인 거 같아서 왠지 씁쓸하기도 하고 웃프기도 하다. “아재들은 가~ 아재들은 가~ 힙한 이들만 남고 아재들은 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을지로 맛집은 지도를 보고 찾아가려고 해도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왼쪽이 식당이다.

힙지로 중심에서 “싫어요”를 외치고 싶은 건 아니다. 늙어가는 게 서글프기도 하고 젊음이 부럽기도 하다. 다만, 공간을 성찰한 아래 책의 한 구절이 범상치 않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힙한 가게들은 일부러 간판을 내걸지 않는다. 그래야 주변에 계신 분들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간판을 내거는 대신 인터넷상에 예쁜 사진을 올린다. 인터넷에서 그 사진을 보고 찾아오는 힙한 젊은이가 주요 고객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SNS에 예쁘게 찍은 가게 사진을 올려 주길 기대한다. 을지로의 힙한 공간은 인터넷 가상공간상에서 정보를 얻은 사람만이 올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러한 가게들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높은 층에 있다. 나이 들어서 무릎이 안 좋은 분들은 오시기 힘든 또 하나의 허들인 것이다.”

(유현준 『공간이 만든 공간』 중)

세운상가 옥상에서 촬영한 을지로 일대.

사족인 줄 알면서도, 지금 힙지로를 즐기는 젊은이들은 언젠가는 아재가 되었을 때가 궁금하긴 하다. 힙지로의 성지 같은 카페와 맛집은 주인을 잃을까, 아니면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가게 주인에 의해 다시 변할 것인가. 힙지로가 지금 젊은이들만의 영역이 된다면, 힙지로의 상인들은 을지로의 노포처럼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충무로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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