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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 대신 북촌 선택한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사들, '독립운동가의 길' 걷다

조회수 2019. 5. 13. 10: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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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코스인 줄 알았던 북촌 한옥마을에 새겨진 '대한 독립 만세'
꿀맛 같은 5월의 주말, '협곡'이나 '나락'을 포기하고 북촌에 모인 '소환사'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한복을 입은 연인들이 사진을 찍는 그곳이 맞습니다. 오늘(11일) 서울의 날씨는 27도, 바깥에 가만히 서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날입니다. 그런데 소환사들은 왜 북촌에 모였을까요?
 
이들은 라이엇게임즈 코리아가 주관하는 '소환사 문화재지킴이'의 프로그램 '독립운동가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문밖을 나섰습니다. '독립운동가의 길'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신설된 문화 답사 프로그램으로 서울의 옛 골목길을 함께 거닐며 역사문화 유산을 살펴보고,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12인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우리가 흔히 데이트코스인 줄 알았던 북촌에는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흔적이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게임에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지도 모를 소환사들은 이날만큼은 한뜻이 되어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디스이즈게임도 이 뜻깊은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안국역 1번 출구와 2번 출구로 나가기 전에 있는 공간에서 집결했습니다.

안국역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새단장했습니다. 왜 안국역일까요?

출발 전에 코스에 대한 안내를 받습니다.


# '한복 데이트코스' 북촌 한옥마을에 숨겨진 사연

북촌은 서울시 종로구 계동과 가회동 일원의 한옥 밀집지역을 뜻합니다.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 동네라서 북촌이라 불리었으며, 조선시대부터 궁궐이나 육조거리에 오가던 양반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북촌은 지금의 북촌과 많이 달랐다고 하는데요. 소환사들은 그 이유를 파헤치는 것으로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북촌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북촌의 한옥은 대체로 좁은 마당을 ㄷ자나 ㅁ자 모양으로 두른 집이 대부분이며 그 크기가 작아서 서로 오밀조밀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콧바람 꽤나 뀌던 양반들이 그렇게 좁은 집에 살았을까요? 옛날 북촌에 살던 양반들 집에는 쌀 넣는 창고도 있었을 테고, 머슴 부릴 공간도 필요했을 것이며, 넓은 마당에 나무도 심었을 것입니다.

북촌의 한옥은 오밀조밀 붙어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의 한옥 밀집지역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요?

 

1920년대 충무로와 명동 일대에는 진흙이 가득이라 통행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고개가 있었습니다. 이곳을 당시 사람들은 진고개라고 불렀는데요. 경성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이 고개를 통으로 밀어버리고 일대를 일본식 번화가로 만들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칼잡이 구동매가 바로 이 진고개를 근거지로 활동하죠.


우리 땅에 일본식 가옥이 들어서는 것을 안타깝게 본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당대 경성을 주름잡던 부동산 거물 기농 정세권 선생입니다. 정세권 선생은 북촌이 진고개처럼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일대의 한옥을 모조리 사들여 소규모 한옥으로 개조시킨 뒤, 그 자리에 조선인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일본인들이 북촌에 발을 들이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정세권 선생은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조그만 개량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해 조선인들이 살 집을 확보했습니다. 북촌뿐만 아니라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 곳곳에 개량한옥을 지어 조선인에게 보급했습니다. 돈이 없는 조선인 구매자에게는 연부 또는 월부로 집값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신문 기록에 따르면, 그가 지은 집만 조선인 주택의 35%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규모는 엄청났죠. 

요즘 '핫플레이스'로 뜨는 익선동의 한옥과 한성대입구역 성북동 방면에 남아있는 한옥도 모두 정 선생이 기획한 것입니다.

정세권 선생

어떤 이들은 정세권 선생을 돈벌이에 매진하는 부동산업자라고 매도했지만, 그는 자신이 번 돈의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쾌척했습니다. 그는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에 필요한 활동자금을 마련했으며,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말모이'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조선어학회에 참가해 한글을 지켰습니다. 그는 공간이 필요한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회관이나 사무실을 지어 무상으로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정세권 선생은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았으며, 가지고 있던 땅을 일제에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그저 데이트코스 내지는 관광지로 알고 있던 북촌 한옥마을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있었습니다. 





# 신분, 계급, 성별, 종교, 지역을 뛰어넘은 3.1운동, 북촌 곳곳에 살아있는 그 흔적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은 신분, 계급, 성별, 종교, 지역​을 뛰어넘어 대한의 독립을 외친 비폭력 불복종 운동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00년 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북촌 인근에서 3.1운동을 준비하고, 기획했습니다.

1919년 춘원 이광수 등 일본 도쿄에 유학하던 학생들은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대한의 독립을 요구하는 '2.8 독립 선언'을 발표합니다.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송계백은 이 독립 선언의 실행위원으로  1919년 1월 조선에 파견됩니다. 그의 임무는 춘원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활자와 활동 자금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2.8 독립 선언의 주역들의 모습

송계백은 선언서를 비단조각에 써서 이를 학생복 속에 바늘로 꿰매어 숨기고 국내에 잠입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 중앙학교에​ 찾아가 ​1년 선배 현상윤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거사 계획을 알렸습니다. 이에 크게 감동한 현상윤은 송진우와 최남선에게 유학생들의 계획을 전파했습니다.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은 대규모 독립 운동을 조직하던 천도교 계열의 손병희와 최린에게도 알려졌죠.

수업 시간에 배우신대로, 2.8 독립 선언이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서울 중앙고등학교에는 송계백과 현상윤이 만나 독립운동의 계획을 공유한 것을 기념하는 공간이 남아있습니다. 2.8 선언 이후 경성 시내를 가득 메운 3.1운동의 선두에는 중앙고등학교의 전신 중앙고보 학생들이 있었다고 하죠.

북촌 중앙고등학교의 삼일기념관. 당시 거사를 논의하던 숙직실의 모습을 재현한 것입니다.

천도교의 손병희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우리도 3월 1일에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는 내용의 거사를 논의했습니다. 개신교의 남강 이승훈과 불교의 만해 한용운이 계획에 동참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중앙고보의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집에서 주로 회합을 가졌습니다. 그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간하던 만해는 잡지 사무실이자 본인의 거처인 '유심사'에서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학림 학생들과 독립운동 계획을 나눴습니다. 3.1운동 당시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유심사 역시 인촌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유심사가 있던 곳은 현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인촌선생고당
유심사 앞에서 만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소환사들




# 오늘 밟은 발도장 오래도록 기억하자 의미 담아 전각 도장 새겨

 

북촌의 골목 골목을 탐험하며 독립운동의 족적을 따라간 서른 명의 소환사들은 세종대왕 시대의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의 집터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목을 축인 뒤, 그 아래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의 고불서당에서 오늘 밟은 발도장를 오래도록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전각 도장을 새겼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로그인 화면에 나오는 '문화재지킴이' 공지를 보고 덜컥 프로그램 참가를 신청했다는 최승옥 씨는 "대학교 1학년 때는 관광지인 줄 알고 왔는데 이렇게 뜻깊은 이력이 담겨있는 곳이라니 놀랐다"라며 자신의 소감을 전했습니다. "전부 <롤> 하는 사람일 텐데, 이 사람들 티어는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다녔다는 윤철희 씨와 김태진 씨는 묵묵히 도장을 파면서 기자에게 "재밌다"라며 앞으로도 문화재지킴이 프로그램을 한다면 또 참가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좋아하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좋은 일 한다고 해서 왔다"는 김희정 씨 역시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문화재지킴이 프로그램을 지켜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2016년에 문화재지킴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력이 있는 한 커플은 "예전에 북촌에서 데이트를 한 적 있는데, 그때는 안 보인 것들을 볼 수 있어 뜻깊다", "개인적으로 왔으면 잘 몰랐을 텐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라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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