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울타리 넘어다니는 게임, 시각장애인 소녀 이야기 '비욘드 아이즈'

조회수 2018. 4. 11. 13: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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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는 보이지 않게 된 순간부터 굳게 닫힌 철문과도 같았다

이 게임에는 달리기가 없다. 주인공이 큰 문제에 부딪히지도 않는다. 게임에서 유저가 겪는 어려움은 대체로 5분 이내에 해결된다. 복잡한 퍼즐 요소도 없다. 잔잔한 분위기를 쭉 따라가다 보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참 재미 없을 것 같은 게임처럼 보인다. 그런데 게임을 끝내고 나면 충실하게 '게임을 했다'는 느낌이 든다. 

 

<비욘드아이즈>는 사고로 시력을 모두 잃은 소녀 '라에'가 유일한 단짝인 '나니'를 찾으러 나서는 이야기를 담았다. 라에를 움직이고, 정해진 사물과 상호작용하며, 주어진 단서로 나니를 찾으면 된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유저는 이 단순한 구성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답함을 느낀다.

 

영국의 개발사 '팀17'과 1인개발사 '타이거앤드스퀴드'가 힘을 합쳐 제작한 <비욘드아이즈>는 인지도가 높은 게임은 아니다. 그러나 1년 전 쯤 스트리밍 방송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이 단순하고 조용한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 내가 '라에'가 된다

 

<비욘드아이즈>는 동화책을 읽는 듯한 인트로로 시작된다. 인트로에는 주인공 ‘라에’가 눈이 멀게 된 과정과, 눈이 먼 라에가 시각장애인이 된 이후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담겼다. 인트로의 일러스트에서 자연스럽게 인게임 화면으로 전환된 이후, 라에는 고양이 ‘나니’를 만나게 된다.

인트로는 마치 동화책 처럼 연출돼 있다

이 때 유저는 <비욘드아이즈>가 묘사하는 시각장애인의 감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라에의 주변은 보이지만 일정 범위 밖의 풍경은 흰 빛으로 휩싸여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유저는 라에를 움직여 게임을 진행하게 되며, 라에를 움직이고 감지 범위를 넓혀나감으로써 맵을 밝혀나가게 된다. <비욘드아이즈>는 이런 방식으로 라에의 제한된 시각을 표현했다. 초반 튜토리얼 격인 라에의 집 앞에는 맵이 이미 밝혀진 부분도 있다. 라에가 이동한 경험이 있어 지형을 알고있는 것을 표현한 것.

                                                                          <비욘드아이즈>는 라에가 보는 세계뿐만 아니라 듣는 세계도 표현했다. 근처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퍼진 음원 주변의 시야가 일시적으로 밝아진다. 소리의 크기에 따라 밝혀지는 시야의 크기가 결정되며, 소리가 잦아들면 시야도 함께 잦아든다.

새가 지저귀는 찰나의 순간에 시야가 밝아졌다가, 소리가 잦아들면 다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유저는 라에를 움직여 직접 시야를 밝히는 것 외에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음원지를 통해 맵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유저는 라에를 움직여 확인할 수 있는 정보와 소리가 들림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이용해, 빛에 휩싸인 맵을 탐험하고 최종적으로는 사라진 나니를 찾아 내면 된다.

 

 

#보이지 않기에 일어나는 일들

 

유저는 처음에, 라에가 그려나가는 맵의 정보가 확실한 정보라고 생각하고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오래 가지 않는다.

 

우선 이야기하자면, 라에가 그려 나가는 세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확실한 것이 아니다. 범위 내에서 밝혀진 부분은 어디까지나 라에의 상상과 판단의 결과물이다. 소리가 들리거나 냄새가 나서 그 정보를 미리 파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맞는 정보인지 확인하려면 두 가지 방법 뿐이다. 직접 보거나, 직접 만져보거나.

라에의 상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라에는 ‘직접 봐서’ 물체를 확인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결국 자신이 입수한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직접 만져보는 방법밖에 없다. 직접 만진다는 행위는 곧 확인되지 않은 물체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멀리 있지만 파악해 낸 물체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물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라에는 ‘저 쪽에 무슨 소리가 났으므로, 저 곳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이 앞에 소리가 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처음 가는 길은 라에에겐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그래서 라에는 조심스레 걷느라 뛰지 못하고, 사물에 가까이 가면 손을 뻗어 그 사물을 만지려 한다.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나아가야 할 길에 둘러져 있는 울타리나, 하천을 건너는 데 필요한 돌다리 같은 사소한 것들도 장애물이 된다. 

 

울타리나 돌다리는 소리가 나지 않기에 장애물이 된다. 소리가 나지 않아도 두 눈으로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비장애인과 달리, 라에는 바로 앞까지 가서 직접 만지기 전 까지 그 장애물들을 인지할 수 없다.

뻥 뚫려 있는 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막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대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장애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만’ 나기 때문에 장애물이 되는 경우다. 길가를 달리는 자동차, 어디선가 맹렬히 짖는 맹견, 까마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어딘가에서 맹견이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해 보자. 라에는 그 소리를 듣고 그곳에 맹견이 있음을 인지하지만, 그 맹견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는 것은 상상에 맡겨야 한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만져서 확인해 볼 수도 없는데, 그 맹견이 줄에 묶여 있는지, 철창에 막혀 있는지, 자신의 코앞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이런 공포 요소는 검은 띠로 표현되며 라에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공포 요소에 가까워질수록 화면은 무채색으로 변해가고, 라에는 몸을 웅크리며, 망설이는 걸음걸이 때문에 이동속도가 줄어든다.

'검은 띠'로 표현되는 공포 요소는 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와 라에와 유저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맹견에게 소리를 질러 물러나게 하거나 직접 무찌르는 등의 능동적인 행동은 할 수 없다. 유저는 공포 요소를 빙 돌아 피해가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제한된 시야 내에서 그 공포 요소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소한 시련과 별 것 아닌 극복

 

대부분의 게임은 일정한 구조를 갖는다. 유저가 어떤 것을 원하게 되고, 그것을 얻으려면 시련을 겪어야 하며, 그 시련을 극복해 내고 보상을 받아 성장한다. 시련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강력한 몬스터일 수도 있고, 복잡한 퍼즐일 수도 있다.

 

<비욘드아이즈>에서 라에는 수많은 시련과 마주친다. ‘시련’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여기서의 시련은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몬스터나 날카로운 가시가 깔려 있는 함정 같은 건 아니다. 

 

앞서 말한 코 앞의 울타리나 보이지 않는 돌다리, 목줄이 채워지지 않은 맹견 같은 것들이 <비욘드아이즈>의 시련이다. 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라에에게는 큰 걸림돌이 된다. 울타리는 시도 때도 없이 라에의 앞에 튀어나오며 하천을 건널 돌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맹견이 길을 막고, 자동차가 다니는 차도는 아예 시커먼 안개로 뒤덮여 있다.

하천은 물소리로 파악할 수 있지만, 돌다리는 파악할 수 없다

비장애인이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평범한 길이, 라에가 처한 시각적 제한 때문에 유저가 풀어나가야 할 ‘퍼즐요소’가 된다. 게임의 목표인 ‘나니에게 가는 길’은 라에의 상상으로 그려져 있고, 유저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나가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라에를 나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비욘드아이즈>는 동화책 같은 구성을 한 시뮬레이터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니를 찾아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하고, 상상을 지워 나가며 현실을 인지해 나가는 것을 시련으로 부여함으로써 일종의 ‘퍼즐게임’이 된다.

 

시련이 있다면 극복도 있는 법. 유저는 게임을 진행하며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데, 이 극복 또한 라에가 겪었던 시련들처럼,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다. 울타리로 길이 막혀 있으면 돌고 돌아 입구를 찾으면 된다. 돌다리가 없다면 끝없는 하천을 따라가 돌다리를 찾으면 되고, 맹견은 피해가면 된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울타리도, 언젠가는 입구가 나온다

떼어 놓고 보면 보잘것없고 단순한 행동이지만, 라에가 처한 입장과 그에 따른 ‘사소한 시련’들을 겪었다면 그 행동의 의미는 조금 달라진다.

 

유저는 제한된 감각 속에서 상상과 허상 속에 시달리고 답답함을 느낀다. 그것이 확인을 통해 비로소 ‘진짜 길’이 되었을 때, 그 행동은 단순한 행동을 넘어서 퍼즐을 풀어 낸 듯한 감각이 된다. <비욘드아이즈>가 게임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순간이다.

 

 

#시련 끝에 얻는 것

 

수많은 극복을 통해 라에는 ‘나니’를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하나의 시련을 극복해 낼 때 마다 게임 속에선 나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런 나니의 환영을 쫓아 라에는 나아간다.

우리는 게임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면 일정한 보상을 받는다. 그 보상은 여러 게임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RPG게임의 경우 달라진 데미지, 점점 더 거대한 몬스터를 잡는 재미 등이 있을 것이고, 아케이드 게임의 경우엔 점점 더 어려운 퍼즐에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 등이 있을 것이다.

 

<비욘드아이즈>는 유저에게 어떤 보상을 주었을까. <비욘드아이즈>가 고난을 헤쳐온 유저에게 주는 보상을 따지기 전에, 먼저 게임에서 ‘보상’을 줌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유저들은 게임 속에서 숱한 시련을 극복해 낸다. 그 이전에, 유저에게는 그 시련을 극복해야 할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어려운 시련을 극복해 내면 유저에게는 어떤 만족감이나 뿌듯함이 주어지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보상’은 어떤 시련을 통한 직접적인 결과물을 제시함으로써, 유저 입장에선 명확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게 하고, 다음 도전을 시작하게끔 만드는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그 보상은 게임의 최종 목적까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RPG를 예로 들자면 RPG의 중점적인 목표는 유저의 캐릭터가 점차 강해지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그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RPG의 숱한 퀘스트, 수많은 몬스터라는 시련을 겪은 유저가 얻는 보상은 RPG의 목적인 ‘성장’이다.

<비욘드아이즈>는 그런 동기부여를 ‘나니를 찾으러 여행을 떠나는 스토리’로 제시한다. 한 소녀가 유일한 단짝이었던 고양이를 찾는 게임에서, 나니의 환영은 유저에게, 그리고 라에에게 충분한 동기부여가 된다. 유저는 시련을 겪어나가면서, 결국 라에가 나니를 찾을 수 있을지 계속해서 궁금해 하게 된다. 나니의 환영이 유저에게 있어서 어떤 ‘보상’이 되는 셈이다. 

 

또한 그 환영은 <비욘드아이즈>의 스토리 안에서 라에를 이끌고 성장시키는 역할도 수행한다.

 

유저는 퍼즐을 풀고 보상으로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라에라는 한 소녀가 아픔을 딛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비욘드아이즈>의 따듯한 색감과 조용하고 잔잔한 분위기는 그 성장 과정을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이 지면에 <비욘드아이즈>의 줄거리를 이야기할 수 없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나, <비욘드아이즈>가 스토리를 진행하는 재미와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가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 직접 플레이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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