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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교수의 일침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조회수 2021. 3. 16. 17: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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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케이스에 보관하는 여성을 위한 콘돔

미국에서 디자인 조교수 재직 중 창업

여성의 성 담론에 대한 편견 뒤집고 싶어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지위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지지를 촉구하는 날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선 '성'에 있어서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여전하다. 몇 년 전만해도 여성은 성에 무지한 것이 미덕이었다.


성적인 이야기를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여성으로부터 성적자기결정권을 박탈할 위험이 있다. 설상가상 공교육에서 행해지는 성교육은 아직까지도 피상적인 수준에 그친다.


스타트업 세이브앤코의 박지원 대표는 이런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인식의 판을 바꾸기 위해 창업에 뛰어들었다. 2018년 박 대표가 창업한 세이브앤코는 여성향 인티메이트 코스메틱(성 생활 용품) 브랜드 ‘세이브’(SAIB)를 운영한다. ‘여성을 둘러싼 편견(BIAS)을 뒤집는다’는 취지를 담아 편견의 영어 철자를 거꾸로 해 이름을 지었다. 콘돔, 여성청결제 등을 온라인몰에서 판다.



◇한국 여성이 제 손으로 콘돔 안 사는 이유

출처: 더비비드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시각정보디자인을 전공한 박 대표는 디자인 분야의 수재다. “학부 재학 중에는 삼성디자인멤버십에서 활동했고요. 2011년 미국 국무부의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됐습니다. 덕분에 디자인 분야의 명문 미국의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에 진학해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2013년 20대 후반에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캠퍼스 디자인 대학의 조교수로 부임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미국 캠퍼스. 그곳에서 삶을 뒤흔든 문화 충격을 경험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할 디자인 솔루션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어요. 그때 말 수 적고 수줍음 많은 여학생이 콘돔 사용을 증진하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순간 ‘이걸 어떻게 피드백 해야 하나, 남학생들이 놀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요. 저를 제외한 모든 학생이 안전한 성관계를 주제로 열성적으로 토론을 하더라고요. 그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죠. 그 자리에서 민망함을 느낀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어요."

출처: 세이브앤코
교수 시절 박 대표의 모습.


그때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학교 보건소 프론트 데스크에 무료 콘돔을 비치해 둬요.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만큼 콘돔을 가져갈 수 있는 거죠. 미국에선 성교육을 할 때도 ‘피임을 하려면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 수준의 원론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얇은 콘돔을 손상시키지 않고 제대로 씌우는 법을 실습하죠. 미국에선 성인 여성이 성에 무지한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로 봐요.”


한국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살펴봤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선 여성이 성생활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면 ‘헤프다’고 손가락질 해요. ‘여성의 성’이라는 주제 자체를 금기시하다 보니 여성 소비자가 콘돔을 구입하는 데 소극적이죠. 콘돔은 남자의 전유물이란 인식이 강해요. 브랜딩, 홍보 문구, 제품명이 지극히 남성향이에요. 여성 소비자가 콘돔을 계산대에 올리는 걸 민망해하는 이유죠.”


◇고민 끝에 틴케이스에 보관하는 콘돔 고안

출처: 세이브앤코
미국 교수 시절 제자들과 함께한 사진.


2017년 상반기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귀국했다. 이때부터 ‘남의 물건’이라 여겼던 콘돔을 미친듯이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한국, 미국, 유럽 시장에 있는 제품을 사서 성분과 재질을 분석했어요. 콘돔에 첨가된 살정제나 사정지연제 같은 성분 중에 몸에 좋은 게 없었어요. 콘돔 표면에 묻어 있는 성분이 몸 내부에 남아 여성에게 치명적이었죠. 내부 장기가 피부 표면보다 흡수율이 42배나 높아요.” 


처음부터 모조리 바꿔야 했다. “유해 화학 성분을 모두 빼는 것은 물론 콘돔 재료로 식물성 원료인 천연 라텍스를 쓰기로 했어요. 콘돔 파손을 방지하기 위한 윤활제로는 실리콘 오일을 썼고요. WHO(세계보건기구)가 라텍스 콘돔에 가장 좋은 윤활제로 추천하는 성분이죠.”

출처: 더비비드
박 대표는 창업 후 한국 시장의 모든 콘돔을 분석했다.


디자인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전문 분야인 디자인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디자인과 브랜드가 사람의 생활 패턴이나 생각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콘돔을 한 번도 사 본 적 없는 여성이 콘돔을 사게 만드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이런 행동에 변화를 주기 위해 여성친화적인 디자인을 만드는 데 주력했어요.”


콘돔을 보호하고 겉으로 봐선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도록 틴케이스로 포장을 하기로 했다. “콘돔은 작은 마찰이나 압력에도 손상될 수 있어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고민하다 틴케이스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포장만 보면 화장품 같아요. 콘돔에 관심 없던 소비자도 예쁜 외양에 반해 관심을 갖게 하는 게 목표였어요. ”


◇ 눈 높은 일본 소비자 사로잡은 비결

출처: 세이브앤코
틴케이스에 보관하는 세이브의 콘돔.


2018년 9월 각고의 노력 끝에 첫 제품 ‘세이브 프리미엄 콘돔’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출시 후 1~2년 간은 편의점, H&B 스토어 등 오프라인 매장 확장에 중점을 뒀다. “한국 사람들이 콘돔을 미리 구비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편의점에서 낱개로 사는 습관이 굳었더라고요. 콘돔을 집으로 배송시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분도 많았고요.”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집콕족이 많아지면서 온라인몰에서 매출이 폭발했다. “2020년 온라인 매출만 전년 대비 800% 이상 신장했어요. 콘돔 누적판매량은 60만개에 달하죠.”

출처: 세이브앤코
사무실 한 벽면을 꽉 채운 수상의 흔적들


가능성을 인정받아 2019년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 500 Startups에서 시드투자를 받았다. 각종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휩쓸었다. “독일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2018,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2019, IDEA 2019 등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뿐만 아니라 미국 스파크 디자인 어워드, IDA 국제 디자인 어워드, 이탈리아 A’ 디자인 어워드 등 총 15곳에서 수상했어요. 그동안의 노력과 시도가 제대로 통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콘돔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제품 출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에는 여성청결제를 출시했어요. 여성의 질과 생식기는 산성인데요. 염기성 비누나 세정제로 몸을 씻으면서 생식기가 알칼리성을 띄면 질염에 걸리기 쉬운 환경으로 변해요. 이를 막기 위해 약산성 여성청결제가 필요하죠. 영국 비건 인증, 독일 더마 테스트에서 엑설런트 등급을 받았어요. 유해물질을 포함하지 않고 피부 자극 없이 순한 성분으로만 만들었다는 뜻이죠.”

출처: 세이브앤코
세이브앤코의 약산성 여성청결제.


해외에서 세이브앤코 제품을 먼저 찾았다. “콘돔은 의료기기로 분류돼 각국 식약처의 기준을 통과해야만 수출이 가능해요. 상대적으로 인허가 절차가 간단한 홍콩에서 판매 중이에요. 화장품으로 분류되는 여성청결제는 콘돔보다 수출이 용이해요. 현재 홍콩, 동남아,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고 이 중 가장 큰 시장인 일본의 경우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까지 입점했습니다.”


◇ 판매수익의 10% 기부...소비자 인식 변화에 보람

출처: 세이브앤코
현재 개발 중인 세이브의 자판기. 청소년이 ‘청소년 인증’을 하면 50% 할인된 가격에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여성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판매 수익의 10%를 건강한 성생활과 여성 권리 시장을 위한 분야에 기부합니다. 캠페인 상품 판매 수익은 모두 기부하고요. 2020년 성년의 날에는 보육 시설에서 자라 성년이 된 보호종료아동에게 저희 제품과 장미꽃, 성교육 내용이 담긴 책자를 전달했어요. 뉴스레터 서비스 ‘뉴닉’과 손잡고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 콘돔 기부 캠페인을 연 적도 있습니다. 저희는 여성을 위한 회사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 신장, 청소년 성교육과 관련한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노력 덕분인지 박 대표는 점진적인 사회 변화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저희 제품 덕분에 처음으로 남자친구와 콘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여성분들의 후기를 받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아요. 예전의 제가 그랬듯 콘돔이라는 제품에 대해 말하기 조차 어려워 했던 여성 소비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엔 아내와 애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입하는 남성 고객도 늘고 있어요.”

출처: 세이브앤코
음지에 놓인 여성의 성 담론을 보다 빨리 양지에 끌어올리는 것이 박 대표의 목표다.


사람들이 ‘여성의 성 담론’을 보편적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시점을 앞당기는 것이 목표다. “우울증, 공황장애 같은 정신 관련 질병만 해도 몇 년 전에는 말하기 어려운 주제였어요. 지금은 비교적 부담없이 말하고 받아들이잖아요. 여성의 성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아직까지는 금기의 영역인 여성의 성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삶의 풍경이 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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