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집, 회사 살린 비결? 제 '깡밍아웃' 들어볼래요

조회수 2020. 6. 30. 14: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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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때 장사하며 의대 붙었지만 의류디자인학과 진학

남미에서 모델 활동 후 회사 창업

디자인만 올리면 생산 연결하는 플랫폼 ‘파이’ 런칭


이지윤 컨트롤클로더 대표는 이제 갓 서른을 넘겼지만 사업경력이 15년에 달한다. 가족의 부도, 폐업위기 등의 불운을 딛고 국내 최대 의류생산 대행 플랫폼 파이(FAAI)를 운영하고 있다. 그를 만나 스타트업의 생존비결을 들었다.


◇디자이너와 봉제공장의 연결고리


파이(FAAI)는 ‘패션AI’의 줄임말이다. 패션업계 인공지능이 돼서, 불편을 해소해 주겠다는 뜻이다. 주된 서비스는 봉제공장과 생산 의뢰자를 연결하는 것이다. 생산 의뢰자가 어플리케이션에 희망하는 디자인, 수량, 납기 등을 등록하면, 파이 측이 해당 주문을 소화할 수 있는 봉제공장을 연결한다. 생산 의뢰자는 자체 디자인으로 옷을 만들어 판매하는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가 제일 많고, 대형 의류 브랜드, 단체복을 맞추는 동호회, 종교단체 등도 있다.

출처: 컨트롤클로더
컨트롤클로더 이지윤 대표


이들이 주문을 넣은 후 생산할 공장이 결정되면, 공장 관리부터 배송까지 모든 과정을 파이가 전적으로 책임진다. “생산 의뢰자는 주문만 올리면 끝입니다. 의뢰자의 집이나 사무실로 원하는 옷이 원하는 수량만큼 도착하니 편리하죠. 공장과 수시로 얘기하면서 물건 떼어오느라 왔다갔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정 과정은 앱으로 실시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장들도 번거로울 게 없습니다. 앱에 들어온 주문을 우리가 전달하면, 그대로 생산만 하면 됩니다. 앱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죠.”


파이는 2018년 8월 서비스를 시작해, 지금까지 3680개의 공장과 디자이너를 연결했다. 합이 맞는 공장을 찾기 어려워 고생했던 디자이너나 브랜드들이 파이에 열광했고, 좋은 고객을 찾지 못해 쩔쩔맸던 봉제공장들도 환호했다. 리오더율은 82%에 이른다.


◇물건 팔아 집안 살린 당돌한 고등학생


빚 갚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패션잡화를 제조해 해외로 수출하던 부모님의 회사가 이 대표가 17살 될 때 부도가 났다. 채권자들이 집에 난입해 팔지 못한 손목시계, 팔찌 등의 잡화를 박스 째로 집어 던지며 화풀이했다. 애써 만든 잡화들이 행패 부리는데 이용되는게 안타까웠다. 어떻게든 팔아 부모님 빚 갚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출처: 컨트롤클로더
컨트롤클로더 이지윤 대표


“오픈마켓 파워셀러를 수소문해서 집 근처 계시는 분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교복 차림으로 물건 광고하는 법과 파는 법을 알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 분의 마음을 열기 위해 철판 깔고 매일 찾아갔습니다. 커피 타드리며 계속 졸랐죠. 한 3주쯤 지났을까. 그 분이 저를 앉혀 놓고 오픈마켓 운영법을 알려주시더군요. 그때 배운 걸 토대로 옥션, 지마켓 등 몰을 열어 상품을 팔기 시작했어요.”


맏이의 책임감으로 시작한 일인데,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지렛대가 됐다. 매주 금요일, 채널별로 5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자신감을 얻고 오프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지하철 신길역 상가를 임대했어요.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다니는 곳인데, 가만 보니 그 분들이 귀국하기 전에 지하상가에서 물건을 쓸어가다시피 하더라고요. 돈 되겠다 싶어서, 오프라인 매장을 3개 냈는데 다 잘됐습니다.”


◇의대 포기하고 모델 활동


20대 때는 원없이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의대에 붙었지만, 옷과 사업이 좋아 의류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가서도 계속 관심은 사업에 있었다. 군화 때문에 발이 아프다는 당시 남자친구의 말에서 착안해, 군화에 맞는 편한 깔창을 군대에 납품하는 걸 추진했다. “책 한 권에 가까운 제안서를 만들어 국방부에 제출했어요. 결국 입찰을 통해 PX 입점에 성공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고교 때부터 운영하던 오픈마켓 쇼핑몰을 군인용품몰로 전환했어요. 지금까지도 제 가족이 이 몰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컨트롤클로더
대학생 시절의 이지윤 대표


외국 경험이 하고 싶어서, 늘씬한 키를 살려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패션 모델이 됐다. “한 기획사를 통해 지원했더니 바르셀로나, 런던, 아르헨티나 세 군데에서 캐스팅 제안이 왔어요. 남들 다 가는 유럽대신 미지의 세계인 남미에 끌려 아르헨티나를 선택했습니다.”


재밌었다. 하지만 모델로 성공하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젊을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해, 부담없이 즐겼다. 비자 문제로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동기 선후배들을 만났더니 제 시계만 멈춘 것 같았어요. 대기업 같은 본인의 꿈을 따라 하나 둘 떠난 거죠. 교수님도 ‘졸업하려면 너도 이제 공부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일단 학교는 마치기로 했다. “취업특강, 취업컨설팅 등을 다니며 앞으로 뭘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객관적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니 암담하더군요. 평균 학점 2.1점에, 토익도 본 적 없고. 심지어 뭘 원하는지도 몰랐어요. 희망 기업과 직무조차 없었죠. 결국 진로 찾는 것을 돕는 교수님이 저더러 ‘너는 취업 못하니 창업하라’고 하시더군요.”

출처: 컨트롤클로더
모델 활동 시절의 이지윤 대표


처음 ‘얼마나 답이 없으면 창업 얘기까지 하실까’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못할 것도 없었다. 함께 졸업작품을 준비했던 친구들의 말이 가슴에 불을 지폈다. “친구들이 졸업 전시가 끝나면 토익 공부를 하겠다는 거예요. 옷을 정말 잘 만드는 친구들인데, 생산이나 판로 확보 같은 디자이너의 현실적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다른 길을 찾겠다는 거죠. 그 친구들의 재능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옷만 만들면 내가 헹거에 걸어서라도 팔아준다’고 호언장담했어요. 그게 컨트롤클로더의 시작입니다.”


◇파산직전까지 내몰린 디자이너 매니지먼트


2013년 패션 디자이너 매니지먼트로 출발했다. 신규 디자이너를 찾아 계약을 맺고, 유통과 마케팅을 대행했다. 작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된 디자이너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재능을 발휘했다. 많은 연예인 스타일리스트들이 줄을 서서 옷을 달라고 졸랐다. TV를 켜면 어디에선가 무조건 컨트롤클로더를 통해 만들어진 옷이 나왔다. 해외 바이어를 통해 외국 진출도 했다. 여러 창업경진대회에서 상을 타고, 투자 유치도 받았다.

출처: 컨트롤클로더
FAAI 서비스 초기 화면


호기로운 23살. 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시절 유행했던 슈퍼스타K처럼, 저희가 직접 디자이너 지망생을 모집하는 콘테스트를 열어 최후의 한 명에게 브랜드 런칭 지원금 1억원을 줬습니다. 곳곳을 뛰어 다니며 스폰서를 모아 상금 1억원을 마련했죠. 지금 생각하면 어렸으니까 무턱대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화려한 외형이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하나의 플랫폼으로 원재료 소싱부터 생산, 유통, 마케팅, 해외진출까지. 스타트업이 감당하기에 사업 범위가 너무 넓다는 문제도 있었다. “수익보다 비용이 많으면서 경영난까지 왔습니다. 소속 디자이너와 직원들의 연쇄 이탈이 이어졌죠. 결국 폐업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거듭된 빚의 함정에 빠지면서, 길바닥에서 주운 ‘급전’ 명함의 빚까지 손을 댔다. 육두문자로 가득한 빚 독촉 문자에 눈을 뜨는 게 일상이었다.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오는 일도 많았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생산 연결로 전환하니 시장 호응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급한대로 생산 연결만 해주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아는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을 찾아가 생산 공장을 연결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손과 발이 돼 주겠다고 했죠. 그러자 한 번에 15개 디자인을 주면서 생산 공장을 찾아달란 디자이너가 나왔어요. 아는 공장을 다 뛰어다니고 공장에서 쪽잠을 자면서 생산 대행을 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해당 디자이너가 저에게 500만원을 주더군요. 그렇게 번 돈으로 빚 갚고 또 일 구하러 다니고. 그 일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출처: 컨트롤클로더
업무 중인 이지윤 대표


공장 연결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아예 플랫폼화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들이 옷을 만들어 팔기까지 생산을 가장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개발자 친구에게 급하게 부탁해서 앱을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버그가 계속 생기는 말썽꾸러기 앱이었는데, 꾸역꾸역 의뢰가 계속 들어오더군요. ‘아 지금 시장에 이만한 대안이 없구나.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폐업위기에 처했던 컨트롤클로더는 극적으로 기사회생했다. ‘옷을 만들고자 하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표방한다. 전문 디자이너 뿐 아니라 인플루언서, 블로거도 파이를 찾는다. 캐릭터를 넣은 옷 등을 의뢰하는 것이다. 신세계, 코오롱, 이랜드, LG패션, 삼성물산 등 대기업들 의뢰도 줄을 잇고 있다.


-주요 고객이 대기업으로 바뀌고 있는 건가요.

“아뇨. 온라인에선 대기업 옷인지, 신진 디자이너 옷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기업 메인 상품이 겨우 500개 팔릴 때, 어떤 인플루언서는 1만개를 팔았다며 재주문을 넣습니다. 패션이 갈수록 개인화, 파편화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브랜드가 완전 경쟁을 하는 거죠. 그러면서 생산 외주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화장품 시장의 한국콜마 같은 회사가 되겠습니다. 수많은 옷이 각자 브랜드는 제각각이더라도, 모든 생산은 우리를 통해 이뤄지는 거죠.”

출처: 컨트롤클로더
FAAI 서비스 앱 화면

◇올해 1분기에만 200억원 돌파


지난해 총 중개액이 100억원이었는데, 올해는 1분기에만 200억원을 넘어섰다. 코로나 특수 덕이다. 해외에서 옷을 생산하던 브랜드들이 국내 생산을 택하며 파이를 찾는 경우가 급증했다. 수술복, 특수복, 마스크 등 생산 의뢰도 크게 늘었다. 일손이 바빠지면서 불과 한 달 만에 직원을 두 배 가까이 증원했다. 


-앞으로 계획은요.

“아직은 뚜렷한 경쟁자가 없는데요. 많은 기업이 저희와 비슷한 서비스를 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잠재적인 경쟁자들이 꾸준한 격차를 느낄 수 있도록 서비스 고도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우리 서비스를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 업체가 저희를 통해 한국 공장에 생산을 맡기는 식이죠. 글로벌 서비스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출처: 컨트롤클로더
컨트롤클로더 이지윤 대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어요.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사업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보니 어려서부터 롤러코스터 같은 삶에 익숙했습니다. 어릴 때는 모두가 그런 줄 알았어요. 하지만 크면서 보니 안정적으로 살아온 사람도 많더군요. 제 컨디션이 회사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롤러코스터 같은 회사가 돼선 안됩니다. 스스로 안정을 취하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돌발 상황이 생기면, 제가 자체적으로 세운 매뉴얼에 따라 평온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예비 창업인들에게 조언이 있다면요.

“저는 너무 어렸을 때 창업했습니다. 돈이 어떻게 흐르는지,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시장의 흐름은 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이 창업했죠. 그나마 깡 하나로 버텨온건데, 그래서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너무 오래 지나온 것 같아요. 시장 흐름을 미리 알고 사업을 시작하면 데스밸리 구간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부디 철저히 대비해서 창업하길 바랍니다.”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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