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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족부터 흙수저까지 … 1990~2020년 신조어와 한국경제 천태만상

1990~2020년 신조어 분석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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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정리해고를 두려워했던 ‘사오정’이 2000년대 구직을 거부하는 ‘니트족’으로 돌아섰고, 2000년대 ‘된장남ㆍ녀’를 비웃던 이들이 2010년대 ‘탕진잼’을 추구하고 있다. 신조어의 변천사다. 그 시대의 사회상 말고 무엇이 보이는가. 스스로를 몰아세우던 사람들이 조금씩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루저란 신조어가 ‘수저계급론’으로 바뀐 건 이를 잘 보여준다. 신조어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반기를 들었다.

출처연합뉴스

새로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 생겨난 말, 또는 기존에 있던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말. 신조어의 사전적 정의다. 하지만 흔히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신조어는 세태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전에 없던 말이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말이 널리 쓰이려면 그만큼 그 시대의 화두를 담고 있거나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 신조어가 시대의 사회상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근 인터넷 보급률과 스마트기기 사용률이 높아지면서 부쩍 늘어난 신조어가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 입에서 알쏭달쏭한 신조어가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최근 일이 아니다. 1920년대 모던껄ㆍ모던뽀이부터 최근의 소확행ㆍ탕진잼까지, 시대별로 공감대를 얻은 신조어는 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신조어의 변화만 살펴봐도 시대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더스쿠프(The SCOOP)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극한 신조어의 변천사를 살펴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 흐름과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이 느낀 체감경제 온도가 한눈에 보였다.


■1990년대 | 경제성장과 오렌지족 = 199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속도가 매우 빨랐던 때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호황이 정점에 달했고,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ㆍ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는 한국 경제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90~1995년 우리나라의 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0.5%에 육박했다는 사실은 당시 경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상 처음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 달러를 넘어선 것도 그 무렵(1994년)이다.

출처연합뉴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소비 규모도 부쩍 커졌다. 이때를 기점으로 등장한 ‘X세대’란 신조어는 달라진 소비행태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나 1990년대에 20대를 겪은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애초 X세대의 뜻과 국내에서 쓰인 의미는 다소 달랐다.


캐나다 작가 더글라스 쿠플랜드가 처음 사용한 X세대의 의미는 “이전 세대의 문화를 거부하는 정의할 수 없는 세대”였지만 우리나라에선 “경제적 풍요 속에 성장해 향락을 추구하고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세대”라는 뜻으로 통했다. 


실제로 당시 가계에서 느끼는 체감경제 온도는 상당히 높았다. 당시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실시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난 증산층”이라고 밝힌 응답자는 전체의 75%에 달했다. 


1990년대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강남 부동산 신화’다. 1970년대 강남 개발계획으로 허허벌판에 들어선 아파트 가격이 본격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열악한 교통인프라 문제가 해결되고 기반시설이 들어서면서 주거환경이 개선됐고, 경기고ㆍ휘문고 등 명문고가 잇따라 강남으로 둥지를 옮긴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강남 신화에서 비롯된 신조어가 ‘오렌지족’과 ‘야타족’이다. 오렌지족은 강남에 거주하면서 호화스러운 소비생활을 즐기는 20대, 야타족은 부모가 사준 고급 승용차를 몰고 길거리 헌팅을 하는 오렌지족을 말한다. 당시 강남의 압구정동은 오렌지족ㆍ야타족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1990년대 초만 해도 물질적 풍요 속의 과소비 행태를 꼬집는 신조어가 대다수일 뿐 경제적 어려움을 비관하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1990년대 말 | 명태ㆍ동태ㆍ조기 = 1990년대 말엔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1997년 외환위기가 우리나라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면서다.


기업들의 무리한 투자와 수출실적 악화, 단기차입금 증가, 경상수지 적자 등 경제 호황에 가려져 있던 문제가 터졌고, 재무건전성이 크게 악화된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가를 한껏 올리던 IT산업의 거품이 빠지면서 ‘닷컴버블’까지 터졌다.


기업들이 속속들이 무너졌다. 재계 순위 2위의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대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도 깨졌다.


가까스로 도산 위기를 넘긴 기업이라도 구조조정마저 피하진 못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한순간에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렸다. 이때 실업률은 1997년 2.6%에서 이듬해 7.0%로 훌쩍 뛰었다.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가계소득 수준이 주저앉았다. 가령, 소득 수준이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빈곤층(도시 2인 이상 기준)의 비율은 1997년 8.7%에서 1998년 11.4%로 치솟았다. [※참고 : 중위소득은 전체 가구를 소득 순으로 정렬했을 때 한가운데 있는 가구의 소득을 말한다. 중산층과 빈곤층 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1990년대 말 실업과 구조조정에 관한 신조어가 쏟아져 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게 ‘명태’ ‘동태’ ‘황태’ ‘조기’다. 각각 ‘명예퇴직’ ‘한겨울에 퇴직’ ‘황당한 퇴직’ ‘조기퇴직’을 뜻한다. 


부쩍 짧아진 정년을 의미하는 신조어도 유행했다. 45세가 정년이라는 ‘사오정’, 56세까지 남아있으면 도둑놈이라는 뜻의 ‘오륙도’, 30대도 구조조정을 피하지 못한다는 ‘38선’에는 외환위기 이후 한파가 불어닥친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2000년대 초 | 취업난과 양극화 = 2000년대 초 외환위기의 여파가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희망 섞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나바다ㆍ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사업에 성공하거나 큰돈을 벌자”는 의미의 신조어 ‘대박’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는 예정 상환기일인 2004년 5월보다 3년여 빠른 2001년 8월 모든 차입금을 상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엔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일으켜 보자는 기치가 높이 올랐다. 2002년 방영된 BC카드의 광고 문구 “부자 되세요”가 안부 인사를 대신하는 신조어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대외 여건도 나쁘지 않았다.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는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 호재였다.


빠르게 부상하는 중국 경제도 우리나라가 안정적으로 수출 실적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했다. 경제지표도 살아날 기미를 보였다. 2000년 1723억 달러에 그쳤던 수출액은 2005년 2844억 달러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6.9%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위축된 경제활동을 활성화하자는 기조가 과했던 탓일까. 부작용이 컸다.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과 사용은 2002~2003년 카드대란으로 이어졌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카드사(비은행계 제외)가 개인한테 발급한 신용카드 수는 1999년 25 39만장에서 2002년 5665만장으로 늘었고, 같은 기간 카드이용금액은 55조7861억원에서 282조9832억원으로 급증했다. 


카드빚을 갚지 못하는 신용불량자가 늘자, 부도 위기에 놓인 카드사들은 줄줄이 모기업에 흡수되거나 일부 매각됐다. 금융권에서 시작된 감원한파는 외환위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반 기업들로 이어졌다. 실적은 늘었음에도 고용에 소극적이거나 되레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유행한 신조어들은 대다수 20대 청년들의 ‘구직난’과 연관돼있다.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중규직(비정규직의 처우를 받는 정규직)’ ‘88만원 세대(20대 비정규직 평균 월급 88만원)’ ‘스펙(직장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등이 모두 이때 만들어진 말이다. 


좁아진 취업문에 구직을 포기하는 청년(니트족),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이들(캥거루족), 공무원시험 준비로 돌아서는 사람들(공시족)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제 사정이 넉넉한 이들과 형편이 어려운 이들 간의 거리감도 더 멀어졌다. 중위소득 50% 이하의 빈곤층 비율을 뜻하는 상대적빈곤율은 2000년 10.4%에서 2005년 13.6%로, 대표적인 소득불평등 지표인 지니계수와 5분위배율은 같은 기간 각각 0.279→0.298, 4.40배→5.17배로 악화됐다. ‘엄친아’ ‘된장녀ㆍ된장남’ 등 이때 등장한 신조어에 상대적 박탈감과 허영심이 깃든 이유다.


■2000년대 말 | 인간관계 포기 =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세계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2000년대 세계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형 사건이었다. IMF에 따르면 2009년 선진국들의 경제성장률은 3.4%(전년 동기비) 떨어졌고, 개발도상국은 2.8% 성장하는 데 그쳤다.


우리나라 역시 경제성장률이 0.8%로 뚝 떨어졌다. 2006년 2만 달러를 돌파했던 1인당 GDP는 다시 1만 달러대로 쪼그라들었다. 수출도 급감했는데, 2009년 수출액 증가율은 -13.9%였다. 2001년 이후 8년 만의 마이너스 성장률이었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암울한 경제상황은 신조어로 대변됐다. ‘이구백(20대 90%는 백수)’ ‘장미족(장기 미취업자)’ ‘삼일절(31세 넘으면 취업불가)’ 등 고달픈 취업난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물론 ‘루저’와 ‘잉여인간’을 비롯해 바닥으로 떨어진 청년들의 자존감을 드러내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루저는 한 방송에서 “키가 180㎝ 이하인 남자”를 일컫는 말로 처음 쓰였지만 이후엔 “외모는 물론 변변한 직장이 없거나 능력ㆍ재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뜻이 확대됐다. 잉여인간은 ‘쓰고 남은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잉여와 인간을 합친 말로, 쓸모없는 사람, 낙오자라는 뜻으로 쓰였다. 


열악한 주머니사정 탓에 ‘관계’를 포기하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밖에선 화려한 커리어우먼이지만 퇴근 후엔 집에 틀어박혀 지낸다는 ‘건어물녀’, 초식동물처럼 온순한 성향의 남자를 가리키는 ‘초식남’, 외부와 단절된 자신만의 공간에서 머물길 추구하는 ‘코쿤족’ 등 모두 연애와 결혼, 나아가 관계를 포기한 이들이다.


■2010년대 | 뉴노멀과 헬조선 =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장기적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전문가들은 ‘뉴노멀 시대(New Normalㆍ세계적으로 저성장ㆍ저소비ㆍ고실업 추세가 두드러지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소비침체, 높은 실업률, 소득 양극화, 부동산가격 폭등과 가계부채 등 경제 문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ㆍ철강ㆍ자동차 등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산업들의 실적이 감소세를 그렸고, 2017년엔 국내 1위 국적선사 한진해운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문제는 미래 전망도 밝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경기침체와 글로벌 보호무역기조, 지정학적 리스크 등 악재가 잇따르면서 2018년 12월 이후 수출액이 13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점점 악화하는 경제 상황 때문인지 신조어도 ‘극단의 부정’을 내포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했던 ‘3포세대’는 201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내집마련ㆍ인간관계ㆍ꿈ㆍ희망까지 포기한 7포세대와 N포세대로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리하게 대출로 집을 마련한 탓에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하우스푸어’ 대신 내집마련은 엄두도 못 내는 ‘주거절벽’, 과거엔 퇴직을 걱정했다면 이젠 퇴직 이후의 생활을 걱정해야 하는 ‘반퇴’가 새롭게 등장했다.


한국 사회와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꼬집는 신조어가 부쩍 늘어났다는 점도 2010년대 신조어의 특징이다. 경제적 빈곤의 원인을 풍자한 신조어가 개인(루저ㆍ잉여인간)에서 ‘수저계급론’ ‘헬조선’ 등 집단과 사회구조로 옮겨간 건 이를 잘 보여주는 예다. 부와 권력의 대물림 현상과 특권층의 비리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방증으로 풀이할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 


최근엔 또다른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탕진잼(탕진하는 재미)’ ‘욜로(인생은 한번 뿐 현재를 즐겨라)’ ‘시발비용(스트레스를 푸는 데 지출하는 비용)’ ‘플렉스(돈자랑)’ 등 과소비와 향락을 부추기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얼핏 보면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 경제가 고속성장하고 있던 때의 신조어와 유사하다. 하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곽금주 서울대(심리학) 교수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보니까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한 저축보다는 현재를 즐기자는 심리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예컨대 과거엔 내집마련을 위해 언제까지 얼마나 돈을 모으면 되겠다는 계획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계획을 세울 수 없을 만큼 하루가 멀다 하고 집값이 오르고 있다. 또한, 큰 소비는 못하더라도 작은 소비라도 알차게 하자는 의미의 신조어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갈수록 주머니사정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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